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83화 (484/582)

제483화. Winter Break (17)

띠릭, 두 사람이 출근하며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집중하던 도현은 숨을 터트렸다.

왜 그랬지.

자신 있게 일을 친 것까진 좋았는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후회가 물밀듯 쏟아져 내렸다. 도현은 심란해졌다.

이 와중에 도현을 더욱 머리 아프게 하는 건, 말한 것 자체에는 후회가 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속내를 드러냈다는 게 아니라, 그 방식이었다.

- 예전엔 안 그랬는데.

“하.”

도현이 짧은 숨을 토해냈다.

예전은 무슨….

그런 말을 굳이 해야 했나.

- 아, 죄송해요. 제가 조금 새삼스러워서요.

“…아아.”

괴로운 신음성이 흘렀다.

섭섭했다고, 그러니 알아달라고 투정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눈에는 예전 일을 가지고 어리광 부리는 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으, 도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베개에 파묻은 얼굴 옆으로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도현은 한참이나 베개에 얼굴을 박고 끙끙거리다가, 삼십 분가량이 흘러서야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은 온통 까치집이 진 채였다.

도현은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 걱정을 이해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충동적으로 뱉었던 말은 모두 진심이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그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그 걱정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도… 모두 다. 그것이 진심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갑작스러워.’

내가 대체 언제부터 진심을 곧이곧대로 꺼냈다고?

서혜나와 이장혁이 도현을 걱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병원을 나온 뒤부터, 그들은 항상 그래왔다. 오늘도 그저 평소와 같았을 뿐이다.

이상한 사람은 도현이었다.

‘…이유는 역시 그건가.’

영혼.

하나가 된 영혼은 너무 자연스럽게 일상에 파고들어 때때로 인지하기조차 어려우면서도, 종종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전과 같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

예를 들어, 오렌지주스가 그랬다.

도현은 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왜 오렌지주스가 인기가 많은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형은 신 것도 곧잘 먹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냉장고의 오렌지주스를 맞닥뜨린 도현은 주저했다. 나는 이걸 싫어하는가, 좋아하는가? 싫어해야 하는가, 좋아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간 지점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런 사소한 변화가 도현의 달라짐을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거야, 먹어보고 경험으로 결과를 도출하면 되는 거니까.

먹어보다 보면 그것을 선호하는지 아닌지 자연히 알게 될 터다. 급할 것 없이 기다리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건 오렌지주스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비아냥거린 일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부모한테 비아냥거린 것도 아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생각하면 할수록 잠깐 미쳤던 거 같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큰 문제는 그거였다.

내가 별로 잘못한 거 같지 않다는 거.

그 놀란 표정을 봤음에도, 출근 시간이 다다라서 문 앞에 맴도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나서는 맥없는 발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다지 잘못한 거 같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 한 건… 없잖아.’

조금 감정적으로 대응한 건 맞지만.

그들이 과거에 도현을 외면했던 것도, 이제 그때처럼 보살핌이 절실하지 않은 도현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것도 모두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으음… 도현의 표정이 흐려졌다.

큰일이다.

생각하니까 다시 심장 부근에서 뭉근하게 억울함과 답답함이 샘솟았다. 진정시켰다고 생각한 것이 다시 기승을 부리려 들었다. 아니야, 흥분하지 마. 진정해.

그들은 이미 회사에 가고 없는데 이제 와 짜증이 난다 한들 어쩔 건가. 도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제 감정을 달랬다. 그래도 아까보단 덜 격한 감정이라서 더 다루기 쉬웠다.

울컥한 심정을 내리누른 도현은 생각했다.

역시 미국에 가야겠어.

당장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껄끄럽기도 하고… 그들과 자꾸 마주치다간 지금처럼 감정적으로 굴 것 같았다.

그건 싫다.

도현이 생각하기에 감정에 휘둘려 울분을 토해내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형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고수해온 방식과 어긋났다.

애초에 도현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어색했다. 미국에 머무는 게 미안해서 두통까지 왔던 게 몇 년 전인데, 이제는 화를 내다니. 화인지 비꼼인지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이제는 음반이 아니더라도 미국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애매한 상황 속에서 도현은 긴 숨만 흘렸다.

검은 눈동자가 핸드폰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했다. 매니저 형은 한 시간 정도 뒤에 오려나. 흰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를 배회했다. 그러다 곧, 결심한 듯 누군가의 번호를 눌렀다.

* * *

지니 레이시가 주니어 하이 스쿨에 입학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교무실에 방문해 밴드부를 창설한 거였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학교는 7학년부터 클럽을 개설할 수 있는 뭣 같은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이 얼마나 불합리하며 황당한 것인지 일주일 내도록 항의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승자는 진이었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매일 아침 교무실에서 노래를 부를 거라는 진의 말에 선생님들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렇게 진은 입학 초부터 학교 규칙을 바꾸었다.

멤버를 모으는 건 쉬웠다. 일단 진의 든든한 남자 친구이자 드러머인 다비드가 있었고, 델마 아카데미에서 같이 밴드부를 하던 몇몇이 같은 학교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첫 일 년간은 적응기였다.

새로운 클럽의 규칙을 만들어야 했고, 목표도 세워야 했고, 부원들끼리 친해져야 했고-그 과정에서 폭탄은 존재했다-, 합을 맞춰야 했다. 그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일 년은 훅훅 지나갔다.

그리고 7학년이 되었을 때.

진의 클럽 ‘Freaky Child’는 제법 내실 있는 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진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다. 그 험난함을 말하자면 삼 일 밤낮을 꼬박 지샐 수 있었지만- 진은 만족했다. 이제야 정말 밴드부다워진 것 같으니.

게다가 이번에는 새로운 멤버도 들어왔다. 입학한 지 반년 된 따끈한 신입생이자 키보디스트였는데,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사라져버린 이전의 키보디스트랑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훌륭했다.

“정말 방학에도 해야 하는 거예요? 금요일에다가, 게다가 난- 입부서도 안 냈는데?”

멍한 눈으로 카펫 위에 앉아 눈을 끔뻑이던 조너가 말했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 있지. 그냥 친한 친구한테 다음 학기에 밴드부에 들어갈 예정이라 말했을 뿐인데, 왜 개학도 전부터 창고에 끌려와서 자연스럽게 끼어 있는 거지?

“방학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우리 부원이라는 게 중요하지.”

“제 의견은요?”

“밴드부에 들어올 생각이었다며?”

“그건 그런데….”

“우리 학교에 밴드부는, 그러니까 제대로 된 밴드부는 우리 클럽밖에 없어. 블랙 필드 걔네는 밴드가 아니야. 세상에, 팝이라니. 그건 밴드에 대한 모욕이야. 게다가 이름도 구려. 너도 그런 이상한 클럽보단 조금 더 진지한, 진정한 락이 좋지 않아?”

“그것도 그런데….”

“그럼 된 거지! 그리고 이미 우리 비밀기지에 발을 들였잖아. 여기는 부원한테만 공개하는 곳이란 말이야. 여길 안 순간 너는 끝이야.”

“그런 곳인 줄 알았으면 안 왔어요! 여긴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인가요?”

키보드 앞에 선 소녀가 아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편이지….”

쯧, 혀를 찬 다비드가 조너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너는 조금 울먹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너무 겁먹지 마. 말은 저렇게 해도 널 해코지하진 않을 테니까.”

“이미 여기 끌려왔는데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진의 손에 얼렁뚱땅 끌려온 조너가 항변했다. 다비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어쩔 수 없고.”

조너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다비드는 언제나 진의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직 둘 사이를 짐작하지 못한 조너는 억울하게 눈꼬리만 늘어트렸다.

“지금 많은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데… 일단은, 그래서 소중한 방학에 저를 납치한 이유가 뭐예요?”

“납치라니! 정중하게 데려왔어!”

“…그래요. 그래서 정중하게 데려온 이유가 뭔데요?”

“그건 우리가 유….”

쾅쾅, 쾅!

갑작스럽게 들린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에 조너의 몸이 펄쩍 뛰었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게 있었다. 익숙하게 핸드폰을 드는 진의 모습이었다.

약간 성가시다는 듯 핸드폰을 확인한 진은 곧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왜? 누군데?”

“도리토스!”

도리토스? 갑자기 과자는 왜?

“…또 걔야?”

다비드가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진은 희희낙락하며 몸에 걸쳤던 일렉 기타를 벗었다.

“나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여기서 놀고 있어. 과자 있는 거 아무거나 먹어도 돼!”

“아니, 잠깐….”

“다시 올게!”

조너가 부르기도 전에 진은 쿵, 소리와 함께 창고를 나가버렸다. 조너는 닫힌 문을 황망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상급생들이 그를 일제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뭔데.

조너는 조금 울고 싶었다.

“여보세요? 도리!”

- 진.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왔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보고 싶은 친구였다.

“무슨 일이야? 나 보고 싶었어?”

- 응, 당연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다비드 없는 데서 전화를 받지.

진도, 다비드도 여기에 이성적 의미가 한 톨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다비드는 종종 싫어하는 티를 냈다.

“나도 보고 싶어. 이번 겨울에 여기 오면 좋을 텐데….”

진심으로 아쉬워, 약간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잔잔한 웃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달램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 그것 말인데 진, 혹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

- 내가 미국에서 머무를 곳이 없어서 말이야. 혹시 너희 집에 신세 좀 져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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