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화. Winter Break (18)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소요됐다.
정확히 세 번 깜빡인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거… 여기로 온다는 소리잖아. 맞지?
그럼 만날 수 있는 건가?
진의 뺨에 옅은 홍조가 서렸다.
니콜라스는 여름방학에 프랑스에서 그를 만났다지만, 진은 아니었다. 이미 예정된 가족 여행으로 인해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시사회 일정으로 샌디에이고에 온 도현과 만나서 놀긴 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마저도 도현과 진의 일정이 엇갈린 탓에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세상에, 나는….”
벅찬 마음에 말을 흐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한층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갑작스럽게 미안해. 내가 미국에 갈 일이 생겼는데, 부모님이 시간이 안 되셔. 혼자 지내는 건 반대하셔서 막막하던 차에 네가 생각나더라. 그래서 연락했는데… 곤란하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음, 도리야.”
- 미안, 많이 당황했지. 너한테 부담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한….
“아니, 아니. 멈춰봐!”
- …….
멈추랬더니 정말 숨소리만 들렸다.
얼마 전에 영화관에서 봤을 땐 정말 다른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진이 아는 그 도리토스였다.
델마 아카데미에 다니고, DJ-N조의 일원이었으며, 툭하면 땅을 파는 버릇이 있는 진의 소중한 친구, 도리토스.
“일단 나는 부담스럽지 않아. 오히려 나한테 말해줘서 기쁜걸. 그러니 사과는 받지 않겠어.”
짚을 건 분명하게 짚고.
“그리고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진이 헛웃음 지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 아…. 음, 그래. 미안…이 아니라, 알았어. 다른 방법을 찾아볼….
“당연히 되지! 언제 올 건데? 얼마나 있으려고? 설마 금방 떠날 건 아니지? 아, 나 지금 너랑 놀 계획 잔뜩 세웠어!”
- …진짜?
“그럼!”
오랜만에 도현과 놀 생각을 하니 벌써 신이 났다. 그게 목소리에도 묻어났는지, 도현은 잠깐 웃음을 흘렸다.
- 고마워. 하지만 로테랑 밀턴한테 허락받아야 하잖아.
“무조건 된다고 할걸?”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니콜라스가 도현의 가족 여행에 끼었지만, 도현이 원했다면 도현이 진의 가족 여행에 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여름방학 동안 휴양지에 머무르며 친구들과 같이 오지 못한 걸 아쉬워하자, 로테는 ‘다음번에는 같이 가자. 아니면 진, 네가 원한다면 방학 때 집으로 불러도 된단다.’라고 말했다.
로테는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하자고 말했으면 진짜 그러자는 뜻이었다. 나중에 여행 계획을 짜서 도현과 니콜라스를 놀라게 해주려고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진짜야. 너는 언제든 우리 집에 와도 된다고 했어.”
- 조금 오래 있어야 하는데도?
“그러면 더 좋지!”
- 하지만, 타인이 집에 머무르면 불편할 수 있잖아.
“우리 집에 손님방이 몇 개인지 몰라서 그래? 그래서 얼마나 머무르려고?”
- 그게….
“응응.”
- 방학이 끝날 때까지?
주저함이 짙게 뭍은 음성이었다.
- 물론, 가능한 경우를 말한 거야.
소심한 말이 덧붙여졌다.
그게 참 도현다워서, 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방학 내내 우리 집에서 머물게 되겠네. 무조건 가능할 테니까!”
안 된다면 떼를 써서라도 가능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지. 진은 밀턴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애초에.
‘안 될 리가 없는걸.’
도현은 진, 니키, 도리 셋 중에 제일 소심했다. 특히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자신감을 잃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래. 엄마랑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좋게 보는지 모르는 게 틀림없지.
두 사람은 도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도현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눈치 없는 니콜라스도 아는 사실을 도현만 몰랐다.
뭐, 그런 것도 귀엽지만.
사실 진은 도현의 그런 면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겉보기엔 냉해 보여서 도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냉정한 성격이리라 지레짐작하곤 하니까. 꼭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비밀 같아서 우월감과 만족감이 들었다.
“언제 올 거야? 엄마 아빠한테 말해 놓을게.”
- 진짜 괜찮은 거야?
“그렇대도! 설마 나 못 믿어?”
- …으음.
진은 미지근한 반응을 흘려 넘겼다. 대신 흥분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빨리 오면 좋겠다.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애들이 많아. 아, 이번에 내 클럽에 신입이 들어왔거든! 걔도 소개해줄게. 넌 우리 클럽 명예 회원이니까!”
- 내가? 언제부터?
황당한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무시한 진이 조잘거렸다.
“그래서 언제야? 설마 이렇게 말해 놓고 다음 달이라고 하는 거 아니지? 방학 끝나기 일주일 전이라거나?”
그러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거 같았다. 이미 한 달 치 계획이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건 아니야. 너랑 네 부모님만 괜찮다면… 다음 주에 가도 될까?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분들이 괜찮을 경우를 말하는 거야.
“으응, 알겠어. 알겠어.”
- 진,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지?
“그렇다니까.”
진이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전화 끝나는 대로 엄마 아빠한테 물어볼 테니까. 그러면 되는 거지?”
- …응.
뒤이어, 작은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 저… 고마워, 진. 진심이야.
진의 손가락이 살짝 옹송그레 말렸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포근한 기운을 잔뜩 담고 있어서,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진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잠깐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소소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 같던 통화는 진을 부르려고 온 다비드의 등장에 잦아들었다.
“이제 끊어야겠다. 사실 지금 클럽 모임 중이거든.”
- 이런. 내가 너무 시간 뺏은 거 아니야?
“괜찮아. 나 없어도 잘하거든. …아, 그런데.”
진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여기에 올 일이란 게 뭐야?”
너무 오랜만의 만남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다.
역시 배우 활동이려나?
진은 그럴듯한 후보를 생각해냈다. 일정이 잡힌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작품에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TV 프로그램이라든가….
- 아, 그거.
“뭐야. 걔 여기 온대?”
어느새 옆에 선 다비드가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도현의 대답에 집중했다.
- 가서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는 알아야겠네. 너한테 도움받는 거니까.
어, 뭔가… 심상치 않다.
진은 기대에 찬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이유가 뭐길래?
진이 귀를 기울이자, 다비드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그리고.
- 음반을 만들려고.
고요한 와중에 도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
- 음반. H의 음반 말이야, 진.
…잠깐.
진은 잠시 들은 이야기를 되뇌었다. 음반을 만든다고. 음반을. 그런데 이제 H의….
“H? H가 누군데?”
아차!
“쉿! 쉿!”
진은 다급히 다비드의 입을 막았다. 다비드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진은 목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망했다.
도현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H의 비밀을 지켰다. 남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게 조별 과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진도, 니콜라스도 그런 도현을 의아해했으나, 나중엔 존중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고, 나중에는 무언갈 짐작해서 침묵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걸, 이런 식으로 들킨다고?
진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이따 듣는다고 할걸. 왜 굳이 지금 물어봐서! 멍청한 지니 레이시!
- 진? 내 목소리 들려?
“으, 응! 아, 지금 애들이 빨리 오라고 난리여서. 이따가 다시 연락해야겠다!”
- 그래? 그럼 얼른 가봐.
“응, 그래야겠네. 부탁한 건 물어보고 다시 연락할게!”
“진, 왜 쟤한테 다시 연락을….”
진의 부릅뜬 눈에 다비드가 깨갱 물러섰다. 그는 불퉁한 표정으로 툴툴거렸지만, 더는 진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비드가 조용해진 덕분에 무사히 통화를 끊은 진은 가슴을 쓸었다. 일단 도현한테는 안 들켰는데…. 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일 년 사이 훌쩍 큰 다비드가 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고수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비드가 심드렁히 물었다.
“그래서 뭔데? 걔 배우 그만두고 가수로 데뷔해서 미국 온대?”
얜 어쩌지….
오랜만에 친 대형 사고에 진은 조금 막막해졌다.
* * *
“…기분 좋아 보이네?”
스케줄을 위해 도현을 픽업하러 온 경찬호는 의아하게 말했다. 무슨 고민인지는 몰라도 한동안 죽상으로 다니던 도현이, 딱 봐도 ‘나 기분 좋아요’라는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래 보여요?”
“응.”
단호한 대답에 도현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다 다시 웃음이 번졌다.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뭔데?”
“그냥, 친구랑 통화하는 게 재밌었어요.”
일부 사실이었다.
진과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도현이 기분 좋아지는 건 사실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 당연히 되지!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기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도현은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굳이 막지 않았다.
아직도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진이 싫어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하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반길 줄은 몰랐다. 뜻하지 않게 친구의 애정을 확인한 기분이라 마음이 간질거렸다.
진의 호언장담과 달리, 도현은 그의 부탁이 거절될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진의 말과 달리 밀턴과 로테가 도현을 반기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타인이 머무는 걸 반기는 쪽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지금 기쁜 건 진이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주 통화하고, 그럴 때마다 델마 시절과 별다를 것 없이 친밀하게 대화하긴 하지만… 그래도 떨어진 시간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진이 그를 조금 멀리 생각할 수도 있겠단 불안이 자리했다. 니콜라스와는 동질감이라는 특별한 유대를 가졌지만, 진은 조금 달랐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녀를 아끼고 좋아하듯이, 그녀도 여전히 나를 아끼고 좋아했나 보다. 거리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게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도현이 샐샐 웃는 것을 보던 경찬호가 떠름히 물었다.
“…혹시 여자 친구야?”
“네?”
검은 눈에 황당함이 차올랐다. 약간은 상대를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경찬호는 머쓱해져서 헛기침했다.
“큼, 아니면 말고.”
그 시선을 버티지 못한 경찬호가 화제를 돌렸다.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지금 이동해야 해.”
“…네, 그래요.”
오늘 스케줄이 세 개였던가. 도현은 잡힌 일정을 떠올리며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