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Winter Break (19)
조수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도현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곧바로 알려주겠다던 진은 아직 연락이 없었다. 물론 아직이라 해봤자, 채 여섯 시간도 안 지났지만. 그래도 애가 타는 건 어쩔 수가 없어 괜히 화면만 들여다봤다.
지금쯤 샌디에이고는 열 시가 되었으려나.
진은 그리 늦게 자는 편이 아니었다. 앞으로 두 시간 내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오늘 안에 답을 받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도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역시 부모님이 반대한 거겠지. 연락이 늦는 걸 보니 진이 그들을 설득하는 중일 테고…. 도현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괜히 진의 가족에게 부담을 얹어준 거 같았다.
지금이라도 문자를 보낼까?
톡, 톡. 엄지가 화면을 두들겼다.
날 생각해주는 건 좋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가족과 갈등을 빚는 건… 그건 좀 아니지.
일정한 박자를 타던 손가락이 뚝 멎었다. 도현은 가볍게 숨을 내쉰 후 메시지 앱에 들어갔다. 계획이 바뀌었다고 대충 둘러댈 생각이었다.
막 도현의 손가락이 ‘진, 미안한데 내가’까지 적었을 때였다. 띠링, 짧은 알람 소리와 함께 도현이 보고 있던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 레이시 : 연락 늦어서 미안 :( 중간에 일이 생겨서…. 그래도 나 좋은 소식 가져왔어! 네가 반길 소식이야.]
아?
[진 레이시 : 나 허락받았어!]
진짜로?
도현은 그 메시지를 세 번 정도 더 읽었다.
그리고 탄성을 뱉었다.
[진 레이시 :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도 된대. 도착 이틀 전에만 알려주래!]
[진 레이시 : 아, 방학 끝날 때까지 있을 거란 것도 말했어! 엄마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아빠는 집 안에서 너무 시끄럽게만 안 하면 된댔어.]
밀턴은 로테와 달리 주로 집에서 일했다. 그의 주요 일이 평론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서재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는 편이었다.
조용히 있는 건… 도현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원래부터가 시끄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막 포기하려던 찰나에 돌아온 대답은 도현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내가 두 분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니지?]
답이 여섯 시간이나 늦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진이 거절하는 두 사람을 설득하는 데 걸린 시간이 여섯 시간이라면… 도현이 진의 집에 가는 건 민폐였다. 간다고 해도 도현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있을 게 뻔했다.
[진 레이시 : 아, 추가할게.]
[진 레이시 : 연락 늦은 건 엄마 아빠 때문이 아니야. 엄마 아빠는 물어보자마자 그러라고 했어!]
[진 레이시 : 연락은 밴드부 때문에 늦은 거야.]
[진 레이시 : 또 문제 있어?]
줄줄이 떠오른 메시지를 본 도현이 헛웃음 쳤다. 속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내용이었다. 정말 당해낼 수가 없었다.
[있을 리가.]
도현은 우쭐대는 메시지에 답장하며 둥둥 떠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곧 진을 만날 수 있다. 진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이 그 먼 곳에서 에너지라도 넘겨준 걸까. 피곤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라면 마지막 일정도 수월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밴에서 내린 도현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이미 두 일정을 끝낸 상태임에도 피로가 들어차지 않은, 밝은 표정으로.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일정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도현이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도현이 금방 A컷을 받아낸 덕분에 퇴근 시간이 앞당겨진 이들은 친절하게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수고했어.”
스튜디오를 나서며 경찬호가 말했다. 한 손은 도현의 어깨 위에 올린 채였다. 도현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형도요.”
다음 달까지 차 있던 일정을 한 주에 몰아넣으면서, 조금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도현의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힘들어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도현은 그의 생각과 달리 아주 멀쩡했다.
멀쩡만 하나. 또랑또랑한 눈은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젊은 게 좋긴 좋구나.
경찬호는 내심 도현의 체력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이제 가야 하는데… 저녁은 어쩔래? 안 밀리면 가는 데 사십 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사십 분이요.”
물어보면서 별로 기대는 없었다.
도현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집으로 가는 걸 택했다. 집에 그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참 화목한 집이지.’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 기다리는 부모나, 밖에서 먹지 않고 들어가는 아들이나. 정말 그린 듯이 다정한 가족이었다.
“그럼 주변에서 먹고 출발해도 돼요?”
“음?”
그래서 돌아온 대답에 ‘네가 웬일이냐’라는 눈으로 보았다. 도현은 그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일을 열심히 했더니 배고파서요.”
“아.”
경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 세 번이나 이동하면서 촬영을 하면 배가 고플 법도 했다.
완전히 멀쩡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경찬호는 조금 미안해졌다. 어린아이가 힘든 티도 안 내면서 일하는데 그 고충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먹고 들어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딱히…. 형은요?”
“나도 별생각 없는데. 흠, 일단 차에 가서 생각하자. 주변에 식당이 뭐 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그게 좋겠네요.”
도현은 그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함께한 지 일 년. 그건 두 사람의 보폭이 같아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춰 걸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에 간다는 건 어떻게 됐어?”
“아, 그거. 가기로 했어요.”
“부모님이 허락했나 보네?”
“…비슷하죠.”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야.”
그의 말에 도현은 가만 웃기만 했다. 특별할 거 없이 은은한 낯빛이었는데, 이상하게 머리 한구석에서 경종이 울렸다.
이거 혹시 허락 안 받은 거 아니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투박한 눈매가 상대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검은 눈에 차오른 의문을 보았을 때, 의심은 맥없이 푹 꺼져버렸다.
에이. 그럴 리가.
‘그’ 도현이다. 아침에 부모님과 티타임을 가지며, 종종 엄마와 베이킹을 하고,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 위해서 집에 일찍 들어가는 이도현.
그런 도현이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미국에 갈 계획을 세울 리가 있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경찬호는 너털웃음과 함께 생각을 털어냈다.
식당이나 찾아야지. 괜히 이상한 생각 말고.
하루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닌 탓에 배가 고팠다. 그가 이런데, 성장기인 도현은 얼마나 배고플까. 경찬호는 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잘 들어가. 오늘 많이 움직였으니까, 다른 거 하지 말고 푹 쉬고.”
“그럴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자 벌써 하늘이 캄캄했다. 도현은 차에 타고 멀어지는 경찬호를 배웅하다가 발을 돌렸다.
정원에 들어서자 거실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의 실루엣도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도현의 발걸음이 느릿해졌다.
종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는데. 이 순간 갑자기 땅으로 뚝 떨어진 듯한 아찔한 추락감이 일었다. 하루 내내 머물던 미소가 조금씩 사그라들다가, 현관문을 열 즈음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띠리릭! 오늘따라 현관이 열리는 도어 록 소리가 크게 들렸다. 도현은 꾸물거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참으며 현관에 몸을 들였다.
“…다녀왔습니다.”
쿠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진 건 다급한 발소리였다.
“어, 어. 왔구나.”
이장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누가 봐도 급히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 옆에 선 서혜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초조한 낯빛이었다가, 도현을 본 순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안도하지.
그럼 내가 집에 안 들어올 줄 알았나?
기가 찼다. 아무리 이상하게 굴었다 해도 그렇지. 가출 소년을 보는 눈빛으로 보는 건 좀 아니잖아. 애초에 그렇게까지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지도 않았다.
“좀 늦었네.”
“…네, 길이 밀렸어요.”
“피곤하겠다. 밥은 먹고 왔다고 했지?”
“네.”
짤막하게 떨어진 대답에 일순 대화가 멎었다. 도현은 잠시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더 말이 없으면 방에 들어가 볼 심산이었다.
“…….”
“…….”
“그….”
도현이 말하란 듯이 서혜나를 보았다. 그녀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많이 피곤해?”
“괜찮….”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답하려던 도현은 멈칫했다. 새카만 눈동자가 상대의 표정을 읽었다. 사실 읽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간절한 표정은 너무 투명했다.
말이 멎은 사이. 그 찰나의 공백 동안 도현은 고민했다. 꼭 지금 대화해야 하나?
“…괜찮은데,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방에 들어가도 될까요?”
대화는 해야 한다. 진의 집에서 지낸다는 계획도, 그들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도 전해야 하니.
그런데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잖아.
도현은 이 상황이 조금 껄끄러웠다. 아마도 두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까부터 저런 얼굴로 내 표정만 힐긋거리고 있겠지.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아직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기엔 민망할 시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현아.”
서혜나는 대답 대신 그를 불렀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나약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이 순간 아이는 도현이 아닌 그들이 된 거 같았다.
거기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녀는 몇 년이나 같이 산 동거인이었다. 감정적 교류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도현은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씨가 된 걸까. 아니면 낮 동안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이제야 피곤이 몰려온 걸까. 도현은 진심으로 피로해졌다.
“왜 부르셨어요?”
그리고 피곤함은 목소리에, 표정에, 눈빛에 묻어났다. 그게 마치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성가신 존재를 보는 눈빛처럼 보여서, 서혜나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