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86화 (487/582)

제486화. Winter Break (20)

따스한 조명이 은은히 퍼졌다. 커다란 침대를 중심으로 비친 조명은 방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각각 화장대 의자와 침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방에 들어온 지 십 분. 그동안 두 사람은 심각한 낯으로 각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따금 들리는 한숨 소리가 그들이 내는 기척의 전부였다.

“후우….”

이장혁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 몸짓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서혜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왜 부르셨어요?’

서혜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 저 애한테 의미 있게 들릴까. 그런 말이 있긴 한가? 순식간에 상실한 자신감에 그녀는 어색히 말을 돌렸다.

‘아니야. 수고했다고. 가서 푹 쉬어.’

‘네, 두 분도요.’

짧게 고갯짓한 도현이 방에 들어갔다. 한 번은 뒤를 돌아볼 것 같았는데, 방문이 닫히기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7년. 이젠 8년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 동안 도현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절실히 느낀 것이 있다면, 도현은 그녀가 봐온 누구보다 참을성이 뛰어나다는 거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 터다.

그녀 자신은 늘 불같았다. 다혈질이라는 소리도 자주 듣고 살았다. 그녀가 얌전해진 건 도현과 함께 살게 된 이후였다.

남편도 참을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나긋한 성격 탓에 종종 그렇게 오해받긴 하지만, 그도, 그녀도 알았다. 그건 참기 때문이 아니라 겁이, 걱정이, 생각이 많아서임을.

참는 것과 용기 내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 도현의 참을성은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고 그 아이 스스로 길러낸 것이었다.

그게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 자그마했던 아이에게 세상은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참지 않으면 하루를 버텨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을 테지. 그리고 그녀는 아이가 참아야 하는 것 중 하나였으리라.

그래서 서혜나는 언제나 바랐다.

도현이 더는 참지 않기를. 감정을 여과 없이 내던지기를. 그들을 인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 주기를.

‘왜 걱정할까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그 말이 모두 맞다.

질문에 답하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도현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아서. 그들이 뭐라도 되는 양 반대를 하고 걱정을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도현이 그것을 허락해준 덕분이라서.

그 순간 섬뜩함이 차올랐다.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모든 행위가 도현의 인내 아래 이루어진 일이란 게 불현듯 피부로 와닿았다. 도현이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만 느낄 수 없었던 사실이 선명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걱정을 이해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애는 너무나 다정했다. 여전히도.

‘하지만… 그래요. 혼자 지내는 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도현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가 준 권리이기에 그가 가져갈 수 있다는 걸. 원한다면 반대하든 말든 상관없이 멋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아주 냉정하게 선을 긋다가도, 마지막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한 발짝 물러선다. 다른 사람들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을 내어준다. 도현이 가진 다정함이었다.

그리고 한심한 부모는 아이가 내어준 다정에 매달려 안도했다.

도현이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도, 가족으로서, 아니. 한 명의 어른으로서 의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사실 그녀는 원한다면 도현을 붙잡고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전처럼 대해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다정한 아이는 그러겠다 하겠지.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아이니, 정말 모든 걸 잊은 듯이 행동할 거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떨지는 서혜나가 제일 잘 알았다.

바뀌는 건 없겠지. 그러나 동시에, 영원토록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도현은 영원히 그들을 참아낼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도현의 인내와 다정에 기생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서혜나는… 그녀는 그런 평화는 싫었다.

더는 참아야 할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 화를 내고 다투고 틀어지더라도 다시 붙는, 결국 서로를 보듬는 사이.

그래,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틀어진 것부터 바로잡아야겠지.

“내가 따라갈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도현을 실망스럽게 했다.

그래서 뭐?

“내가 도현이 따라갈게. 당신은 여기 있어.”

안다. 그동안 잘못했던 걸 모두 만회하겠다고,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해주겠다고 말해놓고. 정작 그 말의 범위는 그들이 곤란하지 않은 선이었다는 걸. 그걸 도현도 눈치챘고, 그리하여 실망했다는 걸.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는 짧았다. 그야, 도현의 다정에 익숙해져서 그랬겠지. 당연히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당연하게 느껴버린 거다.

하지만, 그래서 뭐?

“혜나야, 네 마음은 알지만…”

그러니까 또 그 아이의 다정에 의지하자고? 저 애는 착하니까 언젠가 나를 이해해 주겠지, 하면서?

안 된다.

적어도 그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서혜나는 다짐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약속했었잖아.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그건….”

이장혁이 멈칫했다.

“한 말은 지켜야지. 아니면 도현이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평소엔 제발 마음대로 해라, 멋대로 행동해라, 그렇게 염불을 외었으면서 막상 그러니까 곤란해 한다고? 그녀가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

이장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

“…나도 마음이 편하진 않아.”

“알아.”

“난 그냥…. 또다시 실수하고 싶지 않았어.”

서혜나의 얼굴에 닿아 있던 이장혁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 부근에 닿아서 멈추었다.

마찬가지로 제 배를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 여보.”

그녀의 임신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알게 된 날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도현에게 사실을 전하진 않았다. 못 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면 좋을지. 도현이가 이 사실을 반길지, 아니면 싫어할지 알 수 없어서…. 그러한 연유로 고민하는 사이 몇 주가 흘렀다.

서혜나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우리 맹세했잖아. 이번에는 정말 옆에 딱 붙어 있자고.”

서혜나의 임신 사실을 안 날. 두 사람은 기쁘면서도 마냥 기뻐하진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상처 주면 어쩌지?’

‘…….’

‘이번에도, 또 잘못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도, 도현을 임신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겁에 질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맹세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혼자 두지 말고 항상 같이 있자. 가족 다 같이.’

그렇게, 그들이 제일 후회했던 것이 그들의 맹세가 되었다.

그래서였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도현에게 안 된다고 말한 게. 사실 둘 중 한 명이라면 무리해서 따라갈 수 있었다. 둘 다 가는 게 불가능했을 뿐.

그녀는 남편을 탓할 수 없었다.

그가 아침에 고압적으로 굴었던 게, 도현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게 두려움에서 나온 태도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뭐라고 하겠는가.

자신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잘못 생각했다고?”

“그 맹세를 한 게 도현이 때문이잖아. 그런데 그 맹세 때문에 도현이에게 양보를 강요하면, 뭐가 좀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음반일 뿐이잖아.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거고….”

“여보.”

서혜나가 그의 말을 잘라냈다.

“그냥 음반이 아니야. 그게 도현이한테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둘씩 순위를 매기면 우리는 영영 도현이를 우선할 수 없어.”

이장혁은 침묵했다. 그는 결국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녀도 알았다. 그가 침묵하는 건 그녀의 말에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또다시 도현에게 실수했다는 사실이 무서워서다.

하지만 무섭다고 모른 척해서는 해결되는 게 없었다. 그리고 본래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존재였다.

서혜나가 몸을 일으켰다.

“가서 말할게. 같이 가겠다고. 왜 반대했는지까지, 다.”

“…….”

이장혁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결국 그도, 그녀도. 도현을 사랑할 뿐이었으니.

* * *

서혜나는 도현의 방문 앞에 섰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방에 들어가도 될까요?’

도현은 분명 대화를 거부했다.

표면적으로는 스케줄 때문에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속뜻까지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그 피곤이 일이 아니라 그들 때문인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한 후,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는 고요했다.

설마 잠들었나. 시간은 확인하고 왔는데… 평소라면 도현이 독서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녀가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덜컥.

“…엄마?”

방에서 도현이 나왔다.

어느새 사복에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도현은 그녀를 보고 잠깐 눈을 찡그렸다. 의아한 듯, 불편한 듯.

그걸 안타깝고 애틋하게 응시하던 서혜나가 물었다.

“도현아,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지금요?”

껄적지근한 기색이 느껴졌다. 서혜나는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녀를 응시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방으로 들어간 서혜나는 책상에 펼쳐진 책을 보았다. 역시 책을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슨 얘긴데요?”

“오늘 아침에….”

“…….”

운을 떼고 나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혜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꺼내려던 계획을 틀었다.

“아니, 예전에. 예전에 내가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하지?”

“…네.”

“그 약속 어겨서 미안해.”

해명이 아닌, 사과가 먼저였다.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온 사과에 도현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흰 얼굴을 단단하게 덮고 있던 막이 조금 부서졌다.

“엄마가 미안해. 실수….”

“…….”

“아니, 잘못했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형용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느린 움직임이었는데, 그녀는 도현이 당황했다고 느꼈다.

“같이 가자, 미국.”

아래로 내리뜬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시선을 내리고 있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가만히 있던 도현은 얕은 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주한 검은 눈동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했다.

“…알겠어요. 저도 그런 식으로 말해서 죄송해요.”

특유의 차분한 음성이었다.

“정말 미안해. 사실 우리가….”

그녀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말할 생각이었다. 사실은 둘째가 생겼고, 그로 인해 겁을 먹었다고. 너에게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그런데 우리가 또 실수했던 거 같다고.

그러나 그녀의 해명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같이 가주시진 않아도 돼요.”

“…왜? 엄마는 괜찮아. 같이 가자.”

무리한 부탁을 했단 생각에 그러는 걸까? 그러나 이어서 나온 말은 생각과 달랐다.

“아니요. 그거 때문은 아니고 혼자 지내는 게 안 된다고 하셔서 이미 다른 방법을 찾았거든요. 진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이미 로테와 밀턴 씨에겐 허락받았고요.”

“…진의 집에서?”

도현은 서혜나의 황망한 반응을 보다가 시선을 조금 돌렸다. 어쩐지 그 얼굴에 난감함이 비친 거 같기도 했다.

“네. 이미 다 얘기해 놓아서 말을 바꾸긴 조금 그러네요. 다음 주에 가겠다고 말도 해 놓았어요.”

“…….”

어느 사이에 그걸…. 아니, 그럼 우리는?

“그, 허락해 줬다니 고마운 일인데, 그런데 오래 머무르면 불편하실 수도 있잖아. 그냥 엄마랑 같이 가는 게 어때?”

말이 조금 황급하게 나왔다.

아찔한 예감 탓이었다. 그녀는 본래 사과를 하고, 같이 미국에 가서 그녀의 잘못을 만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때,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안 돼요?”

도현이 기다란 눈매를 깜빡였다. 고개가 살짝 움직였는지 단정한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다.

도현의 말 어디에도 분노는 없었다. 잘 일어났냐고 아침 인사를 하는 것처럼 가능 여부를 태연하게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혜나는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그녀의 사과가 빈말이나 다름없는 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된다고 하기엔 그 후의 그들의 관계가 걱정되었다.

그녀는 도현이 알겠다고 말했다 해서, 정말 용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게 떨어져 있다가, 정말 마음이 멀어지기라도 하면?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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