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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87화 (488/582)

제487화. Whose H? (1)

화요일, 오전 9시 10분.

인천 국제공항.

평일임에도 공항은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게이트 앞에 선 도현은 캐리어를 바로 세웠다. 동시에 뒤따라오던 발소리도 뚝 멎었다.

도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깊게 눌러쓴 모자로 인해서 하관만 언뜻 보였다. 도현은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상대가 제 눈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잘 다녀 와, 도현아.”

먼저 말을 뗀 건 이장혁이었다.

그들 사이엔 여전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일주일 전.

서혜나가 방을 다녀간 후 그들은 합의를 마쳤다. 그 과정에서 이장혁은 도현의 말을 묵살한 일을 사과했다. 그리고 진의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에 그러라고 했다.

어딘가, 기가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눈치 보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

생각해보면, 아빠는 자주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엄마와 달리 먼저 무언가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일도 흔치 않았다. 도현이 한 말에 긍정하는 것 외에는.

그래서 혼자 가겠다는 말에 ‘안 된다’라며 단호히 거절한 게 더욱 당혹스러웠다. 서혜나라면 모를까, 도현이 아는 이장혁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왜였을까. 그렇게 단호하게 군 건.

이제 와 그의 행동의 이유가 약간 궁금해졌다. 그러나 도현은 묻지 않았다. 결국 도현의 뜻대로 이루어졌으니. 그 이유를 안다 한들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해서였다.

“도착하면 전화 줘야 해. 알았지?”

능청스럽게 굴려 노력하는 거 같았지만, 이장혁은 연기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아까보다 배로 어색해졌다.

그쯤 되자 도현은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강하게 무언갈 말한 건 처음인데, 거기에 대고 도현이 반항적으로 굴었을뿐더러, 이후에도 도현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내가 조금 과했던 거 아닌가 싶어진 것이다.

“도착하면 밤이니까 다음 날 전화할게요.”

“아빤 괜찮은데….”

“다음 날 할게요.”

“그, 그래.”

이장혁이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도현은 그를 조금 묘한 눈으로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빠가 이토록 제 눈치를 보고 있으니 그도 불편해야 맞는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편한 마음이었다.

마치, 속내를 드러내버린 날 어떠한 제어 장치가 완전히 빠져버린 거 같았다. 그 때문에 통제가 안 되어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뇌 한구석이 풀려버린 듯 편안했다.

불안한데 편하다니.

‘모순이 따로 없네.’

마주하기 껄끄러웠던 것도 그들이 사과해 오면서 사그라들었다. 심지어 지난 일주일간 주변을 맴도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탓에, 이젠 억울한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같이 가잖아.”

서혜나가 꺼낸 말에 도현의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랬다.

지금 게이트를 넘어 비행기에 탑승하는 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도현과 서혜나.

일이 이렇게 된 건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서혜나가 찾아온 어느 날 밤으로.

‘안 돼요?’

도현이 그렇게 묻자 서혜나의 표정이 휙휙 바뀌었다. 파랗게 질렸다가 하얗게 탈색되었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다채롭게 변하던 표정은, 한참 후에 진정됐다.

‘친구 집에서 지내고 싶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미 말을 꺼내서 말을 바꾸기 어렵다니. 누가 들어도 성의가 부족한 핑계였다. 도현은 그때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마, 부모님을 향한 껄끄러움도 남아 있었고, 또 진과 통화하면서 머릿속으로 기대를 품어버린 모양이었다. 그 두 가지 이유가 오 할을 차지했고, 나머지 오 할은….

‘그렇다면 허락해 주실 거예요?’

떠보는 듯이 나간 말투였다.

도현은 그때 분명 서혜나를 시험했다. 생각을 거치고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시험하듯 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만약 그 시험에 서혜나가 오답을 제출하면, 대체 어쩌려고 했던 걸까.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문제를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높게 쌓아 올렸던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차갑게 굳었던 것이 따스하게 감싸여지는 감각에 도현은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진의 집에서 지내도 좋아. 하지만 가는 건 같이 가.’

‘네?’

그녀가 눈을 마주쳤다.

‘엄마랑 지내자는 게 아니야. 그냥 데려다주겠다는 거지.’

‘미국에 갔다가 저를 데려다주고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요?’

왜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기이했다. 가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린다. 그런데 왔다가, 데려다주고 바로 가겠다고?

대체 왜?

‘이게 내 조건이야. 그럼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어때, 들어줄 수 있겠어?’

‘싫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그럼 너 혼자 가겠지.’

그게 뭐야.

도현은 눈을 찡그리다가, 떫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요.’

그렇게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도현은 이장혁과 대화하는 서혜나를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비효율적이다. 혼자 가는 게 걱정되면 UM 서비스라도 신청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심지어 이장혁도 같이 오겠단 걸 도현이 싫은 티를 내서 한 명만 동행하게 된 거였다. 도현은 정말이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걱정되나?

홀로 미국에 가겠단 말에 걱정돼서 안 된다고 할 때는 그저 흘려 넘겼던 말이, 기이하게도 이제 와 떠올랐다.

“…연락은.”

도현이 운을 떼자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도현은 모자를 조금 고쳐 썼다. 시야가 아까보다 더 가려졌다.

“연락은, 계속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그러려고 했다.

비록 이장혁이 도현의 말을 막은 탓에 말하지 못했지만, 도현은 그들을 안심케 할 열다섯 가지 방안을 생각해 놓았다. 그때와는 달리 진의 집에 머무르니 그 열다섯 가지 규정을 빡빡하게 지키진 않을 테지만….

“말했잖아요. 일곱 시에 전화하겠다고요. 전화할게요.”

대답이 없다.

무반응에 도현이 조금 의아해지려던 찰나.

“…도, 도현아.”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차라리 무반응이 나았네.

예상보다 극적인 반응에 도현은 한없이 어색해져서, 괜히 속으로 변명했다. 원래 하려던 일일 뿐인데. 그리고 내가 가출 소년도 아니고, 연락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왜 저렇게 감격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하지.

심지어 눈가가 붉어지기까지 했다. 더 보고 있다가는 괴로워질 거 같아서 도현은 괜히 시간을 보는 척했다. 도현의 사인을 알아들은 서혜나가 적당히 상황을 마무리했다.

“우리 이만 가 봐야겠다. 당신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도현이가 말한 것처럼 내일 연락할 테니까.”

“응….”

이번엔 내일 연락하겠다는 말에도 이장혁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가 정말 울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알면 더 기분이 이상해질 거 같아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현은 게이트를 넘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샌디에이고에 도착하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있었다.

탁.

서혜나가 벽 한 곳을 누르자, 오랫동안 꺼져 있던 불이 일시에 켜졌다. 두 사람은 잠깐 감상에 젖었다.

오랜만이었다. 샌디에이고 집은.

시사회 당시 들르긴 했지만, 그땐 일정 탓에 집에 붙어 있는 날보다 호텔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오네.”

서혜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도현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모든 게 그대로다.

도현이 자주 끌어안곤 했던 쿠션도 소파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친구들과 자주 앉아서 놀았던 카펫도 여전했다. 테라스에는 티타임을 가질 때 썼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너머로는 해가 어둑하게 진 정원의 풍경이 보였다.

“주방도 깨끗하다. 관리 잘해주셨나 봐.”

어느새 주방을 둘러보고 있던 서혜나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집 안은 그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전문 관리 인력에게 집을 맡긴 덕분이었다.

다만,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서인지 조금 추웠다. 사용되지 않는 공간 특유의 서늘함이 집 안 전체에 서려 있었다.

“방에 올라가 볼래?”

“네.”

도현은 사양하지 않고 곧장 이 층으로 올랐다. 계단을 밟을 때 나는 소리도, 어쩐지 향수를 자극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도현은 제 방은 대충 훑어보고, 곧장 다락방으로 향했다.

“…아.”

동그란 카펫, 그 주변에 늘어놓은 그림들. 그리고 그 뒤에 잡동사니들이 널린 서랍장.

익숙하고도 그리운 풍경이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여기서 진, 니키랑 많이 놀았는데…. 카펫 위에서 그대로 잠든 적도 많았고. 한쪽 구석에는 니키가 콜라를 흘린 흔적도 남아 있었다.

“도현아,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아래를 모두 둘러보고 위로 올라온 서혜나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도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편안하고, 즐거운 미소.

서혜나의 모든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도현은 마치… 공간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비어 있던 퍼즐에 마지막 조각이 끼워진 것처럼, 딱 그렇게 완전해 보였다.

그녀는 기억을 되짚었다.

도현이가 저렇게 편하게 웃은 적이 있던가?

그녀가 멈칫한 사이, 도현은 한 박자 늦게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 뭐라고 하셨어요?”

“으응, 별건 아니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데려다준다고. 그래도 괜찮지?”

“네, 이 시간에 갈 순 없으니까요.”

순순한 수긍이 돌아왔다.

“그래, 그럼. 보일러도 켰으니까 곧 따뜻해질 거야. 내일은… 일찍 갈 거니?”

데려다만 주겠다 했지만, 막상 편안하게 웃는 도현을 보고 있자니 욕심이 일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아니요. 오후가 좋을 거 같아요.”

서혜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분명 도현은 ‘너무 일찍 가도 폐’라는 생각에 저리 말했겠지만, 그녀에게는 꼭 유예를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게 좋겠다. 여기는 식재료가 없으니까 내일 아침은 나가서 먹자.”

“그렇게 해요.”

샌디에이고의 집에 도착한 이후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말랑해진 도현은 순하게 대답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 같기도 했다.

바로 다음 날 진의 집에 갈 거니 캐리어를 풀 필요는 없었다. 홀로 있을 시간을 원하는 것 같아 서혜나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후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으면서, 그녀의 시야에 도현의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며, 설렌 얼굴.

그녀는 문을 닫고 잠시 생각했다.

저토록 즐거워한다.

그 즐거움에 파문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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