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Whose H? (2)
아침에 일어나 일 층으로 내려온 도현은 주방에서 달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쪽으로 향하자 주전자를 들고 있던 서혜나가 반갑게 웃었다.
“일찍 일어났네. 아직 시차 적응도 덜 됐을 텐데… 안 피곤해?”
그건 도현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집에서 제일 잠이 많은 사람은 서혜나였다. 긴 비행으로 힘들었을 텐데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닌가.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했나?
도현은 이른 기상의 이유를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접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집에 찻잎이 남아 있었어요?”
“응. 다 가져가는 건 힘드니까.”
유통 기한은 괜찮으려나.
약간 의심스럽게 주전자를 쳐다보니 서혜나가 웃었다.
“아, 이건 개봉 안 했던 거야. 상태 보니 아직 괜찮아 보이더라. 너도 줄까?”
“아, 네. 주세요.”
괜찮다니까 배탈은 안 나겠지.
도현은 찻잔 몇 개를 들고 서혜나와 테라스로 향했다. 아직 서늘한 날씨라서 정원에 나가진 않았다. 정원이 보이는 유리창 앞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이번엔 루이보스였다.
“취향이 바뀐 거예요?”
싱그러운 노란빛이 한 방울 뚝 떨어진 주홍색 수색에 도현이 물었다. 그가 알기로 서혜나는 홍차, 그중에서 스트레이트 티를 즐겼는데, 요즘엔 캐모마일, 루이보스같이 향이 은은한 차를 마시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음, 그런 셈이지.”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저 모호한 대답은 뭘까. …그러고 보니 이거 얼마 전에 매니저 형이 나를 타박했던 말이잖아.
며칠 전의 일과 겹치자 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예상외의 구석에서 유전을 실감한 느낌이었다. 도현은 이상한 기분을 찻물과 함께 삼키려 노력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자 기분 좋은 고요함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도현은 굳이 화제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으며 침묵을 즐겼다.
이러니까 꼭 델마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같네.
그때도 이른 아침이면 티타임을 가지곤 했다. 서혜나가 늦게 일어난 날이면 그녀가 퇴근한 후에 차 대신 코코아를 마셨다. 테이블 위로는 잔잔한 대화나 책 따위가 오고 갔다.
“평화롭다.”
도현은 자기가 무의식중에 말한 줄 알았다. 그러나 문장의 주인은 그가 아니라 서혜나였다. 도현의 시선을 느낀 서혜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도 생각은 여전해?”
같이 남는 거에 미련을 버린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제가 진의 집에서 지내고….”
“응.”
“다음번에는 오라고 할게요.”
로테와 통화하면서, 도현이 신세 지는 것 같아 미안하다 할 때 그녀가 돌려준 대답이었다. 다음번에는 진을 그쪽에서 돌봐 달라고.
- 언젠가 한국에 갈 거라고 얼마나 노래를 불러댔는지…. 안 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갈 거래. 그리고 걔는 그러고도 남을 애지. 그때 진을 부탁할게. 어때, 공평하지?
현재에 닥친 상황과 미래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상황을 같은 선상에 두는 건 너무 편의적인 행동 같긴 하다만. 그게 도현의 부담을 조금 덜어준 건 사실이었다.
“괜찮죠?”
“그럼, 진은 이쪽에서 환영이지.”
그녀는 진과 니콜라스를 제 조카처럼 예뻐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 말도 분명 진심일 거다.
서혜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집에서 지내는 건 생각보다 편한 일이 아니야. 혹시 불편하다거나, 돌아오고 싶어지면 언제든 엄마한테 연락해. 아빠한테 해도 되고.”
사실 도현은 그 부분에 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서혜나와 한참 어색한 사이일 때도 둘이서 같이 살았는데, 진의 가족과 같이 지내는 게 대수일까. 그러나 말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알았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자, 슬슬 일어나자.”
어느새 창백했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은 근방의 카페에서 해결했다. 그곳은 샌디에이고 거주 시절에 서혜나가 즐겨 갔던 카페였는데, 사장은 그녀와 도현을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카페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아침을 해결한 두 사람은 배도 꺼트릴 겸 집까지 다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다시 나왔을 땐 양손에 캐리어를 든 채였다.
“캐리어 엄마 줘.”
“제가 할 수 있어요.”
도현은 그녀의 도움을 사양한 채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는 흰 손에 들려 쉽사리 이동했다. 도현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병원에서 나왔구나.
묘하게도 그런 감상이 들었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싶어서 주변을 맴돌다가도 금방 제풀에 지쳐 창백한 낯으로 밭은 숨을 내쉬던 아이와 지금의 도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더는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땅을 굳건히 밟고 선 다리는 낭창하지만, 힘이 있어 보였다. 때마침 구름이 이동하며 햇빛이 검은 머리카락 위로 쏟아졌다. 도현은 움직이지 않는 서혜나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뭐 놓고 왔어요?”
- 알잖아요, 두 분 모두. 제가 얼마나 혼자서 잘 지내는지요.
위더스 센터 입원 당시, 서혜나는 도현의 간호인들로부터 일상을 전달받았다. 무얼 했고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것에 관심을 보였는지.
도현의 말이 정말로 맞았다. 도현은 그 먼 곳에서 홀로 병을 이겨내면서도 한 번도 자기 자신을 포기한 적이 없다. 병원에 입원한 다른 아이들에게 거부당해도 울기보단 책을 펼쳤고, 일방적으로 혐오 받아도 거기에 매몰되어 있기보단 털어내길 택했다.
경이로울 만치 강한 아이였다. 그녀가 그 먼 곳에 도현을 홀로 둘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거다. 그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할 걸 아니까.
그런 도현이, 그토록 강했던 아이가 이제 몸까지 건강해졌다. 그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의 걱정을 도현이 거추장스러워했던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는 너무 강해서, 너무 일찍 강해져서 그런 걱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그녀다.
일찍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던져두고 아이가 성숙하다는 점에 위안했으면서, 이제 와 저 좋을 대로 걱정하다니. 얼마나 대중없게 느껴졌을까.
“아니야. 불 껐는지 헷갈려서 그랬어.”
“불은 다 껐어요. 화장실이랑 테라스까지 다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서혜나가 피식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참 똑 부러지는 아이였다.
그들의 보살핌은 사실,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 *
진의 집은 도현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를 탄 지 몇 분 되지 않아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현은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올렸는데, 그보다는 집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는 게 더 빨랐다.
“도리야아!”
거의 거실에서 내내 마당만 바라보고 있다가 차를 보자마자 달려 나온 수준의 속도였다. 검은 차 앞에 선 소년에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찬란한 금발이 오후 햇살 아래 헝클어졌다.
그대로 달려들 것 같던 진은 한 발자국 남겨두고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을 얽혔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침묵한 채,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나서야 다시 보는 친구를 샅샅이 훑었다.
조금 달라졌나. 키는 좀 큰 것 같고…. 머리카락은 미세하지만 조금 더 길었다. 델마 졸업 당시엔 턱 아래에서 달랑거리던 단발이 지금은 쇄골을 넘기고 있었다.
한 차례 훑고 난 도현이 다시금 진과 눈을 마주쳤다. 때마침 탐색을 마친 진도 도현을 마주 바라봤다. 진의 얼굴에 구김살 하나 없이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어.”
조금의 숨김 없이 드러낸 순수한 애정 앞에서 도현은 기이하게도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각은 잠시였다. 도현은 곧 간질거리는 행복감을 느꼈다.
“…나도.”
도현이 건든 듯 만 듯, 미약한 힘으로 껴안자 진이 도현의 몸통에 팔을 둘러 꽉 껴안았다. 짧은 우정의 포옹 후 떨어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만나자마자 난리네, 난리야.”
뒤따라 나온 로테가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인사하자 그녀가 밝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 뒤를 보았다.
“나나, 오랜만이야.”
그녀의 얼굴에는 꽤 진한 친애가 묻어 있었다. 도현은 진과 자신뿐만 아니라 로테와 서혜나의 사이도 제법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도현이 반겨줘서 고마워.”
“인사는 됐어. 도현이면 내 아들이나 다름없는데, 뭘.”
“그럼 도현 레이시야? 마음에 든다!”
진의 말에 도현이 애매하게 웃었다. 도현 레이시라니. 조합이 괴상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다간 게거품을 물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다비드는 싫어할걸.”
“아, 아. 세상에. 그랬지.”
“……?”
뭐지, 저 어색한 반응은.
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티가 나게 시선을 피한 진이 하하, 웃었다. …다비드랑 무슨 일이라도 있나?
혹시 내가 온대서 둘이 커플 싸움이라도 한 건가. 생각해보니 아주 유력한 가설이었다. 동시에 어이없기도 했다.
다비드 걔는, 내가 진을 그렇게 보지 않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경계하는 거야. 도현에게 진이랑 연애적으로 잘되라는 건 어렸을 때부터 업어 키운 자식과 사귀란 소리와 같았다. 끔찍한 개소리였다.
그리고….
‘진도 날 그렇게 안 보는데.’
진은 분명 도현의 외양을 좋아했다. 온갖 찬양을 듣고 있노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연애적인 감정과는 멀었다.
진은 도현을 예술 작품 좋아하듯 좋아하고, 진은 피그말리온이 아니었으니.
“밀턴은요?”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여섯 시 정도에 돌아올 텐데…. 나나, 당신을 보면 좋아할 거예요.”
“비행기 시간 때문에 그때까지 있기는 어려워요.”
“아아.”
로테가 잠시 아쉬워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있죠?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가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
…맞다. 도현은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진의 미학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진의 예술적 취향을 저격한 게 도현이라면, 로테의 심미안에 든 사람은 서혜나였다.
서혜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었다.
“그럼요. 나야 좋죠.”
도현은 기뻐 보이는 로테와 그녀가 웃으니 덩달아 따라 웃는 서혜나를 묘한 표정으로 볼 때였다.
“엄마, 그럼 난 도현이한테 방 구경시켜 줄게.”
로테가 의아하게 물었다.
“같이 얘기 안 나누고?”
“캐리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 정리 도와주고 나올게. 나나, 그때까지 여기 있을 거죠?”
“음, 시간이….”
“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넉살 좋게 구는 진에 서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시 전에만 출발하면 넉넉하니까.”
“좋아요! 도리, 이쪽으로 와! 네 방은 저기로 가야 있어.”
“진! 캐리어 무겁잖아!”
로테의 말에 진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내가 들 수 있어! 자, 하나는 네가 들어. 이제 따라와.”
“어….”
머뭇거리는 사이 진이 도현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현은 어정쩡하게 로테에게 눈인사를 한 후 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너도 알다시피 위층에는 내 방이 있고… 네 방은 일 층에 있어. 아, 바로 옆이 서재야. 우리 아빠가 하루에 열두 시간을 머무르는 그 공간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가 알아야 할 게 한 가지 있어. 아빠가 평소에는 무던한데, 일할 때는 조금 예민해지거든. 소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도현이 얌전히 조심하겠다고 하자 진이 투덜댔다.
“사실 그래서 그냥 내 옆방에서 지내게 하자 했거든. 그런데 안 된대. 네가 남자애라고.”
도현의 팔을 끌고 가던 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말이 돼? 우리가 파자마 파티를 하던 게 엊그제인데! 이젠 네가 남자애라고 옆방에서 지내면 안 된대!”
“음….”
“너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일단 생물학적 성별이 다른 건 사실이니까….”
“맙소사. 너 지금 우리 아빠의 편을 드는 거야?”
이게 편을 들고 말고의 문제였어?
솔직히 밀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도현이 연애적 감정을 품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지만, 그걸 아는 건 도현뿐이니까. 그래서 사실 그런 이유로 머무르는 거 자체를 거절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도현은 현명하게도 제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하다고 하려 했어.”
“그렇지? 역시 넌 내 친구야!”
그래, 진이 좋아하면 됐다.
흐뭇한 미소를 매단 도현은 진을 따라 일 층 끝방 앞에 섰다. 잠깐 기대하는 눈치로 도현을 쳐다보던 진이 흠흠, 하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드러난 풍경에 도현은 말문을 잃었다.
“자, 어때?”
진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무로 된 창틀 너머로 햇살이 들어왔다. 햇살은 창틀과 비슷한 결로 된 나무 책상 위에 둥글게 고였고, 그 너머로는 따뜻한 색감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우리 아빠가 옛날에 작업실로 쓰던 곳이야. 작업실을 서재로 옮긴 후부터 안 쓰게 됐는데, 그 후로 내 아지트가 됐지. 우리 집에서 제일 조용하고, 제일 햇볕도 잘 들고, 제일 운치 있거든. 너에게 특별히 빌려주는 거야. 이 방보다 네가 더 특별하니까.”
도현은 들어와 본 적 없는 방이었다. 아마, 도현이 델마 아카데미에 다닐 당시엔 이곳을 작업실로 썼던 모양이었다.
어떤지 물었지. 도현은 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감 없이 말했다.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