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Whose H? (3)
세 개의 캐리어를 줄줄이 늘어놓고 하나하나 꺼냈다. 그들은 한동안 짐 정리에 집중했다. 진이 유의미한 반응을 보인 건, 도현이 한 캐리어에서 악보 다발을 꺼냈을 때였다.
“뭐야? 악보?”
진이 호기심을 보였다.
“밑에 있는 건… 음반이네? 너 캐리어 하나를 다 이걸로 채워서 온 거야?”
“응.”
진이 탄식했다.
“진심이구나, 너.”
하긴, 진심이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그리 중얼거리면서 진은 도현의 얼굴을 살폈다. 대놓고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도현은 편히 보라는 듯 침대에 털썩 앉았다. 진은 그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도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실은 차에서 내린 도현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도현에게 달려가며 점점 가까워질 때. 진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낯섦을 느꼈다.
그대로 달려들어 오랜 해후를 풀지 않고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마음에 찰 때까지 관찰하는 게 진의 오랜 버릇이며, 습관이다. 진이 이토록 긍정적인 이유기도 했다. 무엇이든 아주 집요하게,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다면 사랑스러운 구석을 한 곳쯤은 찾아내기 마련이니. 그러니 진의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한때 진이 집중적으로 관찰하던 이는 도현이었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관찰했고, 나중에는 몸에 익어서 그리했다. 진은 도현을 꽤 많이 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변화를 선연히 느꼈다.
정확히 콕 집어 표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언가 변화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진은 멈춰 섰다.
한국에서 지낸 영향일까?
진은 금방 부정했다. 그렇다면 여름방학에 만났을 때도 낯설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조금 컸구나 싶었어도 이런 감상은 들지 않았다.
진은 저와 꽤 오래 떨어져 있던 친구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서 변한 거고, 어떤 이유로 H의 음반을 결심한 걸까.
불현듯 아쉬워졌다. 그 변화를 옆에서 함께하지 못한 게.
하지만 진은 지나간 시간에 아쉬워하느니, 눈앞의 친구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진은 책상에서 몸을 뗀 후 문으로 걸어갔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긴 문을 등지고 진이 도현을 바라봤다.
“이제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
“뭐를?”
“뭐든.”
음반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 혹은 그를 위해 미국행을 결정한 이유, 그것도 아니면 ‘이도현’이 아닌 ‘H’로 세상에 알려야 하는 이유….
이렇게 달라진 이유.
진은 무엇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명이라도 해도….”
도현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선 눈 끝을 살짝 찡긋했는데,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본인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도현은 그대로 눈을 몇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뭔가 있나 싶어서 진도 따라 쳐다보았는데, 보이는 건 평화롭고, 익숙한 풍경뿐이었다.
“상생, 환원, 기록.”
난데없이 단어 몇 개가 나열됐다.
“봉사 활동하러 가서 들은 말이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그곳에 왔는데, 그 이유가 이거였어. 그리고 때마침 나는…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 중이었고.”
“…….”
“그때까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연기뿐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니더라고. 이젠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기도 하고….”
도현은 진을 잊은 게 분명했다.
그의 말은 설명이라기보다는 복기나 회고에 가까웠다. 아주 불친절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붕 뜬 말들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자선 음반이었어. 사실 시기가 겹쳤던 거 같아. 때마침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었는데, 그 구실이 나타난 거지.”
진은 불친절한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주 기민하게 상대를 낱낱이 훑었다. 표정부터, 눈빛, 몸짓까지. 때로는 언어보다 비언어가 진실을 드러내니까.
도현은 연신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때로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조금 답답해하는 것도,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진은 구름 사이에 자리한 요점을 짚었다.
“기록하고 싶었다고? 왜?”
“달라졌으니까.”
달라졌고, 그래서 기록하고 싶었다.
모호하면서 이토록 명확할 수가 없었다.
“미안, 알아듣기 어렵지.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은데,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렇게밖에는.”
도현이 찡그리듯 웃었다.
진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얼추 알겠어.”
“알겠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얼굴이었다. 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도현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기록은 말 그대로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거지만, 때로는 정리의 의미로 쓰인다.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낼 때, 혹은 과거의 일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때.
진은 생각했다.
도현은 무언가 정리가 필요한 상태인 게 분명하다고. 그리고 그 정리 방법으로 바이올린 음반을 생각해낸 거라고.
그러면 저토록 횡설수설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정리를 끝내서 그 결과를 적으러 온 게 아니라, 하나씩 직접 정리하러 온 것이니.
또 뭐 때문에 눅눅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눅눅해짐을 해결할 방법으로 진을 생각해낸 건 칭찬해주어 마땅했다.
연기 연습하는 것도 주변에 말하지 않아 오해를 사던 도현이다. 그런 도현이 문제가 생기자 진의 집에 찾아왔는데, 어떻게 반갑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진은 도현을 꽉 껴안고 온몸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도현이 기겁할 걸 알아 그러진 않겠지만!
그리고 더 솔직해지자면….
‘의외야. 니콜라스를 찾아갈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진이 모르는 끈끈한 유대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녀가 아니라 니콜라스를 찾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외롭지는 않다. 진의 옆에는 다비드와 다른 친구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그녀가 외로울 시간도 주지 않으니.
하지만 가끔은 무력해졌다.
소중한 것을 속절없이 빼앗긴 기분. 나란히 걷던 두 친구가 나를 놓고 먼저 가 버린 듯한 허망함.
그래서 도현이 니콜라스가 아니라 진을, 그것도 곧장 찾았단 건 그녀에게 뜻깊었다.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도현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굳이 여기로 온 이유는 조금 복잡해. 한국에서는 나한테 관심이 조금… 조금 과도하게 많아서 비밀을 지키기 어렵기도 하고.”
이 대목에서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정확한 분위기는 모르지만, 종종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또 부모님이랑 갈등이 생겨서 집이 불편해서….”
“잠깐!”
“응? 왜?”
“나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 같아. 네가 부모님이랑 싸웠다는 소리였는데….”
하하, 귀가 벌써 가 버렸나. 어쩌면 기타 소리가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다. 진이 자신의 청력을 의심할 때였다.
도현은 조용했다. 이내 침착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거 맞아.”
삼 초간의 정적.
“부모님이랑 싸웠다고?!”
그리고 경악.
진의 기겁한 반응에 도현이 머쓱하니 뒷목을 문질렀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물론 나도 저지르고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화해했어. …아마도.”
저 부정확하게 덧붙이는 말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진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이 싸웠다고? 그것도 부모님이랑?
진이 봐온 도현은 감정 회로가 남들과 달랐다.
그는 도통 화를 내는 법을 몰랐으며, 누군가 불쾌히 행동해도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해결했다. 통제력이 매우 뛰어나서라기보단 그러한 일들에 화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그런 도현이 부모님과 싸울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한집에서 지내는 게 불편해서 미국에 올 정도로!
그때, 진은 무언가 오류를 짚어냈다.
“너 나나랑 사이좋게 우리 집에 왔잖아?”
“화해했다고 했잖아.”
“그게 사실이면… 그럼 미국에 올 필요 없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게 뭐야?”
황당한 눈빛에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에 오는 것까지가 화해의 과정이었어.”
“여기까지 오는 게? 미국에 가는 걸로 싸우기라도 한 거야? 네가 오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라도 했어?”
진은 별다른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도현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도현의 어깨가 움찔 튀는 것을 본 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리토스….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뭔데?”
“너, 우리 집으로 가출한 거야?”
“…….”
“…….”
“…그, 부모님이 허락했으면 가출은 아니지 않을까.”
“근데 시선은 왜 피해?”
“착각이야.”
도현이 뻔뻔하게 눈을 마주쳐왔다. 동요 한 점 없이 잔잔한 낯빛은 얼핏 진실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테지만 진은 아니었다.
“하나만 물을게. 너 나한테 전화해서 물어볼 때, 그때 나나한테 허락받은 후였어?”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진은 탄식했다.
내 친구가 가출 소년이라니?
도현이 가출이라니?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걸 물어보기 전까지 꽁꽁 숨긴 도현도 어이없었고, 그냥 상황 자체가 황당했다.
일 년 만에 본 도현은 일 년 전보다 더 키도 크고, 잘생겨지고, 존재감도 커졌지만, 동시에 더 이상해졌다.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짧고 번뜩이는 그 생각은 무척이나 황당무계하면서도 강렬했다. 적어도 진의 마음속에 작은 싹을 심어놓기엔 충분했다.
우수에 찬 눈빛과 깊은 이목구비를 보다 보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지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무작정 수긍하기엔 묘하게 찝찝했다.
달라졌고, 그걸 기록하려고 미국에 왔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모님과 불화가 있었고, 가출도 시도하려고 했고….
도현의 얼굴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만, 도현과 상황을 떼어 놓고 보면 명확했다.
진은 그런 아이들을 잘 알고 있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다. 진의 주변에 있는, 폭풍 같은 호르몬 시기를 보내는 친구들이 그랬다.
진이 잠긴 문에 등을 기댔다. 혹시, 혹시나….
사춘기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