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90화 (491/582)

제490화. Whose H? (4)

“…뭐야, 그 눈빛은?”

도현은 금방 이상함을 감지했다.

진은 짧게 헛기침한 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수상한데…. 그러나 도현은 더 묻지 못했다. 진이 부산스럽게 짐 정리를 시작한 탓이었다. 짐 주인이 손 놓고 볼 수는 없으니, 결국 옆에 쪼그려 앉아 같이 정리를 시작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캐리어를 정리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개 H의 음반은 어떻게 낼 예정인지, 그리고 도현이 왜 부모님과 싸웠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진은 도현은 타박하기도 했다.

“네 부모님 말씀이 맞아. 어떻게 혼자 지내겠다는 걸 허락해 주겠어? 물론 우리가 다 큰 것처럼 느껴지겠지. 혼자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말이야. 하지만 도리, 우린 고작 열셋이야!”

도현은 진과 자신의 대화가 조금 겉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건 도현이 진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이 많기 때문이었다. 진은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었다.

도현은 속으로 변명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그냥 말할 만한 순간이 없었던 거지.

그리고….

‘이걸 밝혀야 한다면 지금이겠지.’

더 늦게 말하면 기만이 될 수도 있다. 도현은 지금이 적합한 순간임을 바로 이해했다.

“이걸 말해도 화내지 않겠다고 맹세해줘.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뭐길래 그래?”

“맹세부터 해줘, 진.”

“좋아. 맹세할게. 진 레이시는 아무한테도 화내지 않겠다고!”

미안, 진. 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돌발적인 행동으로 당혹스럽게 해서…. 이 정도 안전장치는 필요한걸.

결과적으로, 도현은 과거를 고백했다.

진이 알고 있는 건 도현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었다는 사실이었다. 도현은 영혼과 형, 덩어리 님에 관한 얘기를 제외하고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것도 언젠가는 말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 꼭 필요한 설명은 아니니까.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말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고. 이런저런 판단과 사감이 섞여 적당해진 진실이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 ‘입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님과 어떤 관계였는지 듣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은 길게 침묵하다가 입술 끝을 살짝 떨었다. 그 탓에 흘러나온 목소리도 형편없이 흔들렸다.

“오, 제발 내가 잘못 이해했다고 해줘.”

생각보다 충격이 커 보이는 모습에 도현이 안타깝게 말했다.

“제대로 이해했어.”

“그러니까 네 부모님이… 지금 거실에서 엄마랑 티타임을 즐기는 나나가 아동 학대범이라고?”

“학대까지는….”

“그게 학대지, 그럼 뭐야!”

새된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도현은 진의 하얗게 질린 안색과 동요하는 눈동자를 보고 짧게 후회했다. 이렇게 무신경하게 말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녀는 도현의 생각보다 더 충격받고, 더 당혹스러워 보였다.

진은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거칠게 머리를 털어낸 후 낮게, 홀로 읊조리듯 말했다. 동그란 눈매는 평소와 달리 경직되어 있었다.

“난, 나는… 정말 몰랐어. 하나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내가 말하지 않았잖아.”

“그래도!”

진이 답답하다는 듯 연신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문고리를 향해 몸을 움찔댔는데, 그럴 때마다 도현은 ‘맹세 기억해’라며 말렸다.

진이 진정하는 데는 삼십 분의 시간이 걸렸다. 삼십 분간 화를 냈다가, 울먹이다가, 무언가 곱씹다가, 슬픈 낯빛을 했다가, 결국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진이 말했다.

“…나는 그들이 너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

“그렇게 보였다면 그게 맞을 거야.”

그런 부분은 객관적인 시선이 더 정확한 법이었다. 도현은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인정할 건 인정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진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말이 안 되잖아. 그러면 왜 너를 방치하고 학대한 건데?”

저도 모르게 톡 쏘아붙이듯이 말한 진이 흠칫했다. 그녀가 초조한 낯빛으로 보길래 도현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터져 나오는 숨을 참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지친 낯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모르겠어. 그냥 나나나 장혁에게 너무 실망했어. 그런 줄도 모르고….”

“진.”

진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

그녀의 생각처럼 도현의 부모가 보인 행동이 모두 가식이며 거짓이진 않았다. …뭐,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진 알겠지만.

사실 영혼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나면 그들의 행보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중적이었으니. 그런 오해가 당연하기도 했다.

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에 기대어 선 진의 손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제 손을 포갰다.

“네가 봤던 건 모두 진실이야. 그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내가 말한 과거도 진실이지만, 우리가 보냈던 시간도 진실이니까.”

“아, 도현. 내 소중한 친구.”

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게 물든 두 눈매 끝이 작게 반짝였다. 진은 허둥지둥 손등으로 제 눈을 비볐다.

“미안해. 지금 힘든 건 내가 아니라 넌데.”

“아니야. 네가 그렇게 화내주고 슬퍼해 줘서 고마운걸.”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말하지 않은, 아니, 숨긴 내 잘못이지. 내가 숨겼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도현이 으스댔다.

“나 꽤 유명한 배우잖아. 너도 알겠지만.”

진을 달래려 부러 과장하는 게 티가 났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 때 아닌 능글거림에 진이 어이없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가 즐거웠던 게 왜?”

어느샌가 진의 등을 토닥이고 있던 도현이 그녀의 눈을 바로 응시했다. 진의 집에 도착한 이후 수없이 시선이 섞였는데, 지금 순간에서야 제대로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진, 나는 네가 그래서 좋았어. 늘 즐겁고, 밝고, 긍정적이라서 말이야. 네가 그렇게 내 옆에 있어 줘서 나도 즐거움을 배웠거든. 그러니까 그런 걸로 너를 탓하지는 마.”

부탁이야. 도현이 재차 말했다.

진은 그 눈을, 목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도현이 무척이나 심미적으로 뛰어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새카만 눈동자에 떠오른 다정함을 본 순간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진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네 스승이 좀 덜 뛰어났어야 했어. 이렇게까지 긍정적으로 굴 필요는 없었는데.”

힘 빠진 말투에 도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진은 그런 도현을 흘겨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모르고 그냥 사춘기인 줄 알았네….

그리고 그 작은 중얼거림은 코앞에 있던 도현이 듣기에 충분했다.

“잠깐, 진. 뭐라고?”

“으음….”

“왜 내 눈을 피해? 진, 방금 분명히….”

“아! 세상에 시간이!”

“…….”

“더 늦으면 나나가 떠날 거야. 물론 지금 나나를 봐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약속해놓고 안 나가면 이상하게 여길걸. 너도 그건 싫지?”

그건 그랬다. 진과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벌서 시계는 세 시 삼십 분을 넘기고 있었다. 더 늦으면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보낼지도 몰랐다.

도현은 시계와 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가자.”

뭐, 그렇게까지 달라붙어 물고 늘어질 문제도 아니고. 결국 포기한 도현이 두어 발자국 물러나자, 진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는데, 도현은 그게 난처함에서 온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방금 그런 과거를 듣고 서혜나를 대하기는 어색할 테니까.

“진, 신경 쓰이겠지만….”

“도리야.”

“응?”

“너도 하나 고백했으니까 나도 하나 고백할게. 대신에 너도 맹세해줘야 해. 화내지 않겠다는 맹세 말이야.”

도현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약간은 걱정되면서도 드는 호기심에 도현은 순순히 맹세하겠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달칵, 잠겼던 문이 열렸다.

“사실 너랑 통화할 때 다비드가 옆에 있었어! 정말 미안! 진짜 진짜 미안!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진은 정말 도현이 말릴 새도 없이 방을 쏙 하니 빠져나가 사라졌다. 그녀의 햇살 같은 금발이 알랑거리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통화할 때 다비드가 있었다고?

언제,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떠오르는 타이밍이 있었다.

- 음반을 만들려고. H의 음반 말이야.

혹시, 그때…?

도현의 낯빛이 파래졌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진이 열고 간 문을 바라봤다.

“…진!”

그렇게 불러봐야 도망간 후였다.

* * *

진은 영악하게도 서혜나와 로테의 티타임에 끼어 있었다. 당연히도, 도현은 방금 들은 그 충격적인 말을 언급할 수 없었다.

“아! 왔네!”

로테가 도현을 반겼다. 도현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저를 위해 마련한 것 같은 자리로 향했다.

“그래서 도리가….”

진은 무언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며 종알대는 중이었다. 그리고 진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상대는 흥미진진한 눈을 빛내고 있는 서혜나였다.

의자를 꺼내던 흰 손이 잠깐 멈칫했지만, 곧 별 내색 없이 하던 일을 마쳤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서혜나를 보며 재잘대던 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하.”

익살스럽게 찡긋, 하는 시선에 도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 고백을 하고 이런 식으로 도망쳐온 것도 어이없는데…. 그러나 도현이 웃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역시 진은 대단해.’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게 고작 몇 분 전이다. 그런데 진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서혜나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은 연기자가 아니잖아. 만약 있었다면 어색했을 거야…. 도현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그건, 진이 그사이에 마음 정리를 모두 마쳤다는 뜻이니까. 도현이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하고,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리니까.

원망은 쉽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탓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반대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현이 여태 고난을 겪고 있을 만큼….

도현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니콜라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을 땐 둘 다 펑펑 울다가, 그리고 울다가, 계속 울다가, 지칠 때가 되어서야 진정했는데…. 그때를 생각해낸 도현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캐리어 정리는 다 끝난 거니?”

마침 도현을 보고 있던 로테가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 어린 다정은 진의 것과 얼핏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니 진도 따뜻하고 강한 사람으로 자란 거겠지. 도현의 마음속에서 로테와 밀턴을 향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니요. 다 정리하진 못했어요. 아, 인사가 늦었네요. 제가 머무르는 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빌려주신 방도요. 정말 멋지더라고요.”

“마음에 들었어?”

“네, 무척이나요.”

“다행이네. 그냥 손님방을 줄까 했는데… 진, 쟤가 그 방이어야 한다고 우기지 않겠니?”

그 광경이 상상되었다.

로테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곧 마음대로 하라며 허락해 주었을 것이다. 진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어리광을 부렸을 거고.

“아무튼….”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볍게 웃은 로테가 다정히 말했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도현은 짧게 숨을 쉬었다. 무언가 일이 많았지만, 결국엔 목표대로 도착했다. 그러니 지금은…. 도현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들었다. 두려운 것도, 기대하는 것도 같은 오묘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