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91화 (492/582)

제491화. Whose H? (5)

1월 22일. 눈가를 찌르는 햇빛에 가느다란 눈매가 찌푸려졌다. 도현은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어제 몇 시에 잤더라?

엄마를 배웅하고, 진과 다시 짐을 정리하다가 밀턴이 도착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후에 방에 놀러 온 진과 놀다가…. 열한 시쯤에 진을 방으로 올려보냈다. 너무 늦게까지 같이 있으면 로테나 밀턴이 불편해할 수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환영해 준다고 하나 도현은 객식구였고, 집주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었다. 가기 싫다고 고집부리는 진을 어르고 달래 보내고 난 후엔….

맞아, 정리를 시작했지.

이번 정리는 진과 했던 짐 정리와는 조금 달랐다. 있는 대로 다 쑤셔 넣어 가지고 온 악보를 훑어보는 작업이었다.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도현은 자신이 커튼을 젖힌 채로 잠들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피곤해서 까먹은 것이다. 그래서 아침 햇살이 이토록 강렬했구나. 과연, 집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든다는 진의 말은 진실이었다.

잘 들다 못해 잠을 깨울 정도로 공격적인 햇빛을 받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내리니 발바닥에 푹신한 러그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 나 맨발이구나.

터덜터덜 걸어서 캐리어 옆에 두었던 슬리퍼를 신은 도현이 길게 팔을 뻗었다. 장시간 비행에 더불어 짐 정리로 혹사당한 근육이 시원하게 풀렸다.

몸을 이리저리 틀며 짧은 스트레칭을 하다가, 아예 러그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본격적인 몸풀기를 마친 후 도현이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너머로 푸른 잔디와 나무가 흔들거렸다. 잠시 그것을 감상하던 도현은 커튼을 치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왔다.

“…정신이 확 드네.”

순식간에 옷 사이사이 파고든 찬 바람에 남아 있던 잠기운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살짝 나른한 기운을 풍기던 두 눈도 명료함을 되찾았다.

도현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책상 위를 보았다. 어젯밤에 정리하지 않고 잠든 탓에 악보가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도현은 조용히 그 앞에 가서 섰다.

슬슬, 정해야 하는데.

음반을 만드는 작업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음반의 평균적인 길이는 74분.

1982년 당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74분이니, 그 정도는 한 장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에 따라 정해진 길이었다.

물론 그 후에 과학 발전에 따라 음반의 길이는 더 줄어들기도,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평균적인 CD 녹음 시간은 74분이었다.

꼭 그 시간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비슷하게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 시간을 채울 만한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도현이 레퍼토리를 선정하는 방식은 꽤 까다로웠다. H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있고, 또 H는 외의 이렇다 할 경력이 없으니 필하모닉과의 협연은 불가하다. 당연히 교향곡 같은 건 레퍼토리로 삼을 수 없다.

또, 일반적인 연주자의 경우, 필하모닉과 협연하지 않을 시 반주자를 두어 CD를 녹음했다. 하지만….

‘내가 반주자를 구할 수 있을까?’

일단 음악계에 인맥이 전무에 가까웠다. -형의 인맥은 고의로 외면했다. 안다 해도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알 뿐이고, 가서 내가 사실 정희성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만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혹여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비밀을 지켜줄지는 미지수였다.

어디서 운 좋게 비밀을 지켜줄 반주자를 구하더라도, 그가 도현과 결이 잘 맞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괜히 연주자들이 오랫동안 알아 온 이들과 녹음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반주자 없이 녹음할 수도 있다. 그런 음반이 많지는 않아도, 분명 있긴 하니까.

문제는.

‘선택지가 좁아져.’

바이올린의 경우 오직 바이올린 한 대만이 등장하는 곡을 무반주곡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무반주 소나타나 파르티타는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이었다.

역시 방법은 두 개뿐이다.

일정 부분 포기하든지, 아니면….

“…….”

조력자가 필요했다.

도현은 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엉망으로 늘어두었던 악보는 깔끔하게 정리한 후였다. 산책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 답답함은 조금 가라앉겠지.

몇 걸음 걷던 도현은 옆방 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불빛이 아롱거렸다. 누가 있는 건가? 도현이 그 안에 시선을 준 건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때마침 기척을 느낀 이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의 은테가 주홍빛 조명 아래 서늘히 반짝였다. 그 너머로는 깊은 이목구비가 자리해 있었다.

“…도리토스?”

그리고 지적인 중년 남성 입에서 나온 말은 분위기를 깨기에 충분했다. …언제까지 저렇게 부를 셈이지. 나이를 먹어도, 미국을 떠나도 변함없는 호칭에 도현은 허탈해졌다.

“좋은 아침이네요, 밀턴 씨.”

“그냥 밀턴이라고 불러. 그런데 일찍 일어났구나. 잠자리가 불편했니?”

“아니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잘 잤어요. 침구도 모두 깨끗하고 푹신하더라고요. 원래 지금이 제 기상 시간이에요.”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편이었다. 본래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니까.

“진이 널 조금만 닮으면 좋으련만.”

“진이 아침잠이 많긴 하죠.”

학교에 지각하지 않은 날보다 지각한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밀턴이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이고선 물었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들어올래?”

“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밤을 새웠더니 뇌가 둔해졌어. 네가 대화 상대가 되어주면 고마울 거 같구나.”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잠을 안 잔 거였나. 눈가가 어두운 것 같기도 하고…. 도현은 짧은 생각 끝에 알겠다고 말했다.

서재는 몇 번 구경해본 적 있었다. 밀턴이 일할 때는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그가 외출했을 땐 안에서 논 적도 있었다. 밀턴은 책상 위의 물건에만 손대지 않으면 그 외의 것은 너그럽게 허락해 주는 편이었다.

“거기 앉아. 마실 거 필요하니? 음… 코코아는 없고, 아, 우유는 있다. 우유 괜찮아?”

완전히 애 취급이군.

“네, 괜찮아요.”

“그래. 잠깐만.”

밀턴은 책상에서 일어나 옆에 마련해둔 작은 주방으로 향했다. 미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는가 싶더니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도현에게 건넸다.

혹시 당신 눈에 내가 열셋이 아니라 셋으로 보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아낸 도현은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따뜻한 우유는 고소했다.

밀턴이 권한 자리는 휴게용으로 마련한 소파가 아닌 책상 맞은편의 의자였다.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일이 많으신가 봐요.”

도현이 몇 분 전까지의 제 책상이 생각나는 책상을 보며 눈짓하자, 밀턴이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렇게 바쁘진 않아. 연초라서 일이 조금 밀린 거지…. 지금 해결해 두어야 편한 것들이 많아서.”

밀턴은 라디오 채널과 음악 저널의 고정 코너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음악 평론가면서, 동시에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는 초청 강사였으며, 음악 협회의 임원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하는 일이 있다는 거 같은데… 사람이 유능해도 힘들구나 싶었다.

“연초에는 행사도 많거든. 그럼 나 같은 사람도 바빠지지. 특별한 기간엔 늘 음악이 함께하는 법이니까.”

“힘들겠네요.”

“그렇게 힘들진 않아. 모든 게 다 내 바람을 이루기 위함임을 상기하면, 그리 힘들 것도 없거든.”

“무슨 바람인데요?”

“더 많은 이들이 클래식을 듣는 거.”

안경을 벗은 밀턴은 안경을 썼을 때보다 조금 더 인상이 강했다. 진을 닮은, 아니, 진이 닮은 태양 같은 금발이 그의 이마에 몇 가닥 드리워졌다.

“더 많은 이들이 들어서, 더 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더 많은 발전을 이뤄내고… 더 많은 사람의 일상에 클래식이 자리 잡는 거란다.”

밀턴은 분명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절대 소박하지 않은, 특히나 클래식이 멀어지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거창하기까지 한 목표를.

그런데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도현은 착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젯밤에 너와 진이 대화하는 걸 들었어. 아, 미리 말하지만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란다. 그저 들렸을 뿐이지.”

믿음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표정을 보니 많이 놀란 거 같구나. 네 방이랑 서재 사이의 벽이 좀 얇아서 말이지…. 다 들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렴. 어제 잠깐 휴식하려고 소파에 누워 있다가 몇 마디 주워들은 거니까. 그 후로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헤드폰을 꼈단다.”

…그러고 보니, 진이 처음 방을 소개해줄 때 뭐라 했더라.

- 그래서 말인데, 네가 알아야 할 게 한 가지 있어. 아빠가 평소에는 무던한데, 일할 때는 조금 예민해지거든. 소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게, 방음이 잘 안 된다는 뜻이었어?

뒤늦은 깨달음에 도현이 탄식했다. 아니,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아니다. 괜히 진을 원망하지는 말자. 이건 부주의한 내 잘못이었다.

도현은 충격은 미뤄두고 상황부터 정확히 파악하기로 했다.

“뭘, 정확히 무슨 말을 들으신 거예요?”

“취조받는 기분은 새롭네. 음, 네가 음반을 만들 거라는 것과… 곡 선정과 스튜디오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는 거 정도?”

다 들은 거잖아.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 그 후론 안 들었으니까.”

그 후로 무슨 얘기를 했지?

아.

- 그래서 아까 했던 얘기 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아무리 과거에 그들이 아동 학, 아니, 알았어. 알았다니까? 아무튼 너를 방치했다 해도, 그동안은 잘 지냈잖아. 네가 갑자기 화낼 린 없는 거 알아. 아무리 미국에 오는 걸 반대했다고 해도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못 들었단다. 타인의 사적인 얘기를 엿듣는 취미는 없어. 관심도 없고 말이지. 그 전의 이야긴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지만.”

믿어도 될까.

불안함이 치솟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현은 결국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이 타 우유를 마셨는데, 언제 식은 건지 식도를 타고 찬 기운이 퍼졌다.

다시 고개를 들자, 밀턴이 희미하게 웃었다.

“믿어주는 거니?”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내 믿음이 무슨 상관이야.

도현은 속으로 불만을 표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에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제가 여기 온 이유도 다 짐작하셨겠네요.”

“본의 아니게.”

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물었다.

“…비밀 지켜주실 건가요?”

“흐음….”

그가 대답을 미루자 도현은 애가 탔다. 식은 우유를 다시금 마시고 있자니 밀턴이 질문했다.

“내가 비밀을 안 지키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글쎄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자체를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이번 미국행은 뭐가 이렇게 변수가 많은지…. 다비드도 그렇고, 밀턴도 그렇고. 이러다가 세상 모든 사람이 제가 H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 무슨 불길한 생각을. 도현은 진저리 치며 제 생각을 밀어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아마도… 돌아가겠죠.”

“음반은 어떡하고?”

“제가 내려는 음반은 H의 음반이에요. 제가 아니라요.”

도현은 덧붙였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어차피 H의 음반은 사라져요.”

그 순간 H는 잊히고 오직 이도현만 남을 것이다. 어린 천재, 재능 있는 배우이자 정체를 숨겼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도현에게는.

“그럼 어쩔 수 없지.”

밀턴이 몸을 뒤로 물렸다. 의자 등받이가 그의 몸에 밀리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밀턴은 긴장한 도현을 보다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무뢰한 보듯이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내 딸이 아끼는 친구의 비밀을 멋대로 퍼트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도현의 눈에 희망이 감돌았다.

그것을 보던 밀턴은 생각했다. 저 애는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툭 튀어나온, 평범과 다른 존재는 언젠가,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임을.

영원한 비밀은 없다. 결국엔 밝혀질 사실을, 조금 때를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밀턴은 제 딸의 친구에게 그 ‘때’를 기다리는 정도의 친절을 베풀 마음이 충분히 있었다.

밀턴이 몸을 바로 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그의 눈에 비친 건, 미래의 훌륭한 음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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