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92화 (493/582)

제492화. Whose H? (6)

옅은 생기가 도는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도현이 대답하지 않고 있음에도 밀턴은 여유로웠다. 그도 아는 것이다. 도현에게 다른 방도가 없음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그는 짐짓 친절하게 물어왔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덫 같았다. 도현은 그의 눈에 모든 걸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진의 아빠로서의 밀턴과 눈앞의 밀턴은 무척 다른 느낌이었다.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그는 이런 모습일 테지….

“아니요. 시간은 됐어요.”

“그럼?”

“그 전에.”

또렷한 눈길이 밀턴을 향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어요. 대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뭐가 그리 궁금하길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하마. 그의 답에 도현이 재빨리 물었다.

“저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뭔가요? 아니, 저를 도와줘서 밀턴 씨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

“밀턴으로 충분해. 그리고 이득이라….”

그의 대답에 따라서 도현의 대답도 달라질 예정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맞다. 밀턴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주겠지. 누가 봐도 아쉬운 사람은 도현이었다.

‘알아. 그래도… 일방적으로 빚을 지는 건 싫어.’

단순한 자존심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성적 판단에 기반한 불호였다.

첫째로, 진과의 친분으로 밀턴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 그건 서로 불편한 일이 될 테니까. 둘째는, 그런 일방적인 호의가 가진 단점이 명확해서였다. 일방적으로 내려진 호의는 일방적으로 거둬질 수 있으니.

“진의 친구니까… 라는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닌 것 같네. 왜? 그쪽이 너한테 편할 텐데? 나는 딸의 친구에게 뭘 뜯어갈 만큼 낯이 두껍진 않으니, 대가도 요구하지 않을 테고.”

“제 음반이 아니라, H의 음반이라서요.”

그리고 셋째.

이도현이라는 이유로 대가 없이 호의를 받아 탄생한 음반이, 과연 H의 음반일까?

아니.

“복잡하게 사네. 혹시 결벽증이 있니? 강박증이라든가.”

“전자는 모르겠고 후자는….”

도현은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그런 이상한 애를 진의 친구로 둘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

콧잔등을 찡그리던 도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네, 맞아요.”

그렇다고 상대에게 진실한 대답을 요구하는 와중에 거짓된 답을 돌려줄 수는 없잖아. 그런 기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뱉은 도현은 밀턴의 눈치를 보았다. 도현과 눈을 마주친 밀턴은 눈을 한번 깜빡이더니, ‘그렇구나’ 하고선 말았다. …잠깐, 이게 끝이라고?

당황한 건 도현 쪽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흠,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만…. 연주자 중에서 그런 정신적 질환은 흔한 편이야. 늘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지.”

…이상했다. 지금껏 도현의 강박증은 부모님에게도, 메리에게도, 그리고 도현 자신에게도 벗어나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인지되어 왔는데…. 밀턴은 그게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과장되게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고, 도현을 치료받아 마땅한 환자로 보지도 않았다.

그냥 이전과 똑같았다.

“…….”

미묘한 기분에 도현이 침묵했다.

“혹시 걱정해주길 바랐는데 내가 기대를 저버린 거라면 말해주렴. 당장에라도 너의 마음을 같이 고민해보고, 상담사를 소개해줄 수 있어.”

도현이 질색했다.

“아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상담사는 이미 있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잠깐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밀턴은 조급해하지 않고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잔 너머로 보이는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상념에 빠진 얼굴이었다.

자연스러운 침묵 속에서 그 또한 생각에 잠겼다.

‘이도현이 아니라 H라.’

이도현이 아니다. 진의 친구가, 같은 동네에 살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저 연주자 H로서 네 앞에 있다.

…그러니 너도 진의 아빠가 아닌 밀턴으로서 내 앞에 있어라?

하, 밀턴은 헛숨을 뱉었다. 참 발칙하고….

‘기특하기는.’

그는 줏대가 확고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분명한 색채가 깃들어 있어서였다. 수많은 연주자를 인터넷으로 쉽게 접하고, 기계로 만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그건 무척 귀한 재능이었다.

밀턴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바이올린을 해야 하는데.’

그는 아직도, 델마 아카데미 수업에 참관하러 갔다가 들었던 비발디 ‘사계’를 잊지 않았다. 잊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

에서 보인 연주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직도 사람들은 H를 노련한 연주자, 혹은 젊은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로 추측했다. 찌라시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정말 그 누구도 8살 아이라 생각지 않았다.

‘나도 직접 듣지 못했다면 상상하지 못했겠지.’

시선을 드니 어느새 훌쩍 커버린 소년이 보였다. 세월이 참 빠르다 싶으면서도, 그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동안 소년이 바이올린을 놓고 있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더 많은 이들이 들어서, 더 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더 많은 발전을 이뤄내는 것…. 그리하여 다시금 클래식의 시대가 찾아오는 것.

지금까지 그런 수준의 천재는 몇 명 만나보지 못했다.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 그가 봐온 그 누구보다 독보적인 천재성과 스타성을 가진 연주자가 바로… 저 소년이었다.

하느님의 시련인지, 클래식을 빛낼 천재가 할리우드에 있긴 했지만…. 밀턴은 흐려지려는 눈을 바로 했다.

아무튼, 도현이 이 음반을 계기로 바이올린에 진지해진다면, 그는 무엇이든 두 팔 걷고 도울 마음이 있었다.

“그냥 도와주겠다는데도 거절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저쪽에서 거부하는 걸 어찌하겠나.

여기서 밀턴이 설득하려 군다 한들, 저 애가 말을 들을까? 그럴 리가.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저 고집스러운 검은 눈만 봐도 뻔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수밖에.

“일주일 뒤. 2월로 넘어가기 하루 전날.”

“…….”

“그날까지 무엇이든 좋으니 곡을 준비해와. 네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곡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내게 보여주면 좋겠구나. 네가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라는 걸 말이다.”

또, 그 나름의 기대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저 소년은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진보했을 것인가, 후퇴했을 것인가. 나를 만족하게 할까 아니면 실망스럽게 할까?

여전히, 그때의 그 천재일 것인가?

“미리 말하지만, 내 기준은 꽤 까다로울 거야. 네가 이도현이 아니라 H의 음반이라고 했으니 나도 이도현이 아닌 H를 평가할 생각이다. 네가 배우 활동에 집중했다는 것도, 바이올린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다는 것도 모두 평가 요소에 반영되지 않겠지.”

밀턴은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기분을 느꼈다. 저 발칙한 소년의 등장은,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진 밀턴에게 신선하고도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는 젊은 날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년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는 도현의 대답에 집중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아쉽긴 하지만 그 또한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결국엔 소중한 딸의 친구였으니.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면….

“제가 바라던 거예요.”

“하하.”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그를 설레게 했다. 원석이 분명한 천재를 마주한 순간…. 무언가, 거대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질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때.

“좋아, 기대할게. H.”

씩 웃은 밀턴이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주 잡았다.

허공에 뜬 두 손이 짧게 흔들린다.

어제 나눴던 것과는 다른 의미의 인사였다. 지금부터 너를 연주자로서 대우하고, 생각하겠다는 인사.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도현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밀턴은 앞으로 얼마나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 속으로 그려보았다.

* * *

“아침에 아빠랑 서재에 있었다며. 무슨 얘기 했어?”

거의 정오가 되어서 느지막이 일어난 진이 눈가를 비비며 물었다. 도현은 대답 대신 엉망으로 뭉친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진이 노곤한 표정이 되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잡담했어.”

“아빠가 너랑?”

의아한 말투.

진은 밀턴과 도현의 합이 도통 상상되지 않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평소의 밀턴은 도현과 그렇게 대화를 나눌 위인이 아니니.

그가 차갑다거나 선을 긋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밀턴은 시종일관 도현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다만, 필요 이상 가깝게 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응. 다른 사람 집에서 처음 머무는 거니까…. 뭐 불편한 거 있는지 아니면 필요한 거 있는지 물어보시더라.”

“아하.”

그제야 납득한 기색이었다.

‘오늘 나눈 얘기는 나중에 알려줘야지.’

적어도 밀턴의 테스트를 통과한 후로 생각 중이었다.

새벽에 밀턴에게 진의 친구가 아닌 H로 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번 일에 개입하게 되면 상황이 조금 곤란해진다.

왜냐면 밀턴은… 딸 바보니까.

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H에 대해 입 한번 벙긋 안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진이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불합격’ 통보를 내릴까? 도현은 회의적이었다.

물론 약속한 게 있으니 최대한 지키려 노력하겠지만…. 그가 자신의 무의식에 영향을 받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도현은 정말로 H로서, 실력으로만 평가받고 싶었다.

음반도 음반이고.

‘나도 궁금해.’

도현은 최근 들어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왔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워졌다. 배우 활동도 미루고 바이올린에 몰입하게 된 후로 생긴 변화였다.

‘이전보다는 발전한 것 같은데 얼마나 나아진 건지는 모호하단 말이지.’

하루 내내 연주하다 보니 감각이 무뎌진 걸까?

게임 캐릭터처럼 레벨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의지할 건 본인의 귀와 감밖에 없었다. 그게 아쉬웠다.

도현이 복도에 멈춰 있자, 진이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빨리 점심 먹자. 한 시에 모이기로 해서 급해.”

“약속이 있었어?”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집에 가려고 하긴 했다. 그러니까, 진의 집 말고 도현의 집 말이다. 도현은 자신의 연습 장소로 그의 집을 생각해둔 참이었다.

연습실처럼 이용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장소였다.

그래도 그 전에 진과 조금 놀고 싶었는데… 이전처럼 바닷가에 놀러 가거나, 아니면 방바닥에 뒹굴면서.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는데 진이 태연히 말했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너도 있어.”

“나? 난 약속 잡은 적 없는데?”

“괜찮아, 괜찮아. 내가 대신 잡았어.”

그거 괜찮은 거 맞아?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니 진이 입꼬리를 씩 들어 올렸다.

“말했잖아. 내 밴드부원 소개해 준다고!”

“하지만 클럽 모임에 내가 끼기는 그렇지 않아?”

“무슨 소리야. 다들 널 반길걸. 애초에 너는 우리 클럽 명예 회원인데다가… 게다가 따지고 보면 창시자 격이라고!”

“창시자? 내가 왜?”

진의 밴드부에 일절 기여한 적이 없는데, 창시자라니?

“’Freaky Child’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겠어?”

“아….”

도현은 자신의 밴드부, 그러니까 극 중 밴드부의 이름이 ‘Freak’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그런고로 너는 우리 밴드부의 기원이기도 해. 네가 명예 회원이 아니면 누가 명예 회원이겠어? 그리고 이미 말해놓았어. 내 친구 데리고 간다고.”

“내 의견은?”

“안 돼?”

신이 나 떠들던 진이 물끄러미 도현을 응시했다. 낮에는 더욱 금빛이 진해지는 눈동자가 도현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도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

저 눈을 보고 어떻게 싫다고 하겠어. 도현은 쉬이 포기했다. 자존심이 강해 포기를 모르는 소년은, 제 친구들에게만큼은 무척 쉬워지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오후 한 시.

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바로, 진의 집 창고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