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Whose H? (7)
‘약속 시간이 코앞인데 늦장 부리는 이유가 있었네.’
아침잠이 많아 학교에 자주 지각해도, 친구와의 약속에선 놀랍도록 시간을 잘 맞추는 사람이 진이다. 그런 진이 한 시가 다 되어가도록 꿈지럭대며 움직일 생각을 안 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창고가 아지트라니.’
창고는 도현이 본래 기억하는 모습과 몹시 달랐다.
그때는 잡다한 잡동사니를 모아둔, 말 그대로 창고였다면 지금은 그보단 ‘아지트’라는 단어가 더 적절했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면 위로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그 탓에 벗겨진 벽마저 하나의 인테리어처럼 보였다.
그 앞에는 공구용 상자가 불규칙하게 쌓여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노란색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파 위에 펼쳐진 초록색 담요는 만지면 무척 부드러울 거 같았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가장 멋진 건 온갖 밴드 포스터도, 편해 보이는 소파도 아니었다. 바로 창고 정 중앙, 회색 러그 위에 배치된 밴드 악기였다.
기타, 전자 피아노, 드럼, 마이크….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된 스피커까지. 도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어때? 내 클럽 아지트가?”
“완전 최곤데.”
“큼! 그렇지?”
진은 신이 난 얼굴로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얕게 주근깨가 진 뺨 위로 홍조를 띤 채 재잘대는 진은 사랑스러웠다.
“저건 페틸 블랙의 포스터인데….”
“그래, 진. 설명은 고마운데.”
“응?”
“일단 저기 있는… 네 친구들부터 소개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
진은 뒤늦게 알아챘다는 듯, 감탄사와 함께 뒤를 돌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얼음처럼 굳은 소년 소녀들이 서 있었다. 그때, 소년 중 한 명과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툭, 시선이 마주친 소년이 품에 든 과자를 떨어트렸다. 질소가 가득 찬 봉지가 바닥에 추락하며 가벼운 소음을 내었다.
“앗, 과자!”
진이 화다닥 달려가 과자 봉지를 주웠다. 그걸 소중히 품에 안은 진은 친구들을 타박했다.
“왜 왔는데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어? 온지도 몰랐잖아.”
“…진, 내가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네 옆에 지금….”
“아, 맞아. 소개할게. 이 잘생긴 애는 내가 말한 우리 클럽 명예 회원.”
진이 도현의 팔에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이름은 도현 리인데, 발음이 어려우면 도리라고 불러.
도현이 항의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건데?”
“아마 평생? 그리고 도현, 이쪽은 내 밴드부 멤버. 왼쪽부터 조니 키드먼, 클라인 덴버, 캐서린 모스야. 그리고 한 명 더 있는데….”
“나 찾아?”
문 앞을 막고 선 아이들 틈을 비집고 나온 다비드가 팔짱을 낀 두 사람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팔을 빼냈다. 진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왔네. 마지막 멤버. 둘이 오랜만이지?”
오랜만은 오랜만인데… 그 오랜만의 만남이 조금 망한 거 같았다. 도현은 적개심 가득한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애써 다비드의 타는 듯한 시선을 외면한 도현은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 반가워. 오늘은, 음, 진이 소개해 준대서 따라왔어. 원래는 다른 곳에 사는데 지금은 진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고, 개학 전까진 머무를 예정이야. 종종 마주칠 수도 있겠다.”
조니, 클라인, 캐서린. 세 사람은 자기소개 하는 도현을 신기한 생물체 보듯이 쳐다봤다. 마치 눈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외계인을 본 사람처럼. 그럼 내가 외계인인 건가.
“진짜, 르옌? 정말로?”
툭 튀어나온 말의 주인은 조니였다. 그는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는데, 자신이 말을 뱉은 줄도 모르는 거 같았다.
도현은 그 반응이 어떤 이들에게서 자주 나오는지 알았다.
“응, 맞아. 패스파인더 좋아해?”
“세상에, 그걸 말이라고 해요?!”
팬보이, 혹은 팬 걸이 보이는 반응이 꼭 이랬다.
“여기서 르옌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오, 설마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죠? 제발! 아니, 사실 꿈이래도 조금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조니, 진정해. 지금 나도 같은 걸 보고 있거든.”
클라인이 조니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조니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클라인이랑 저랑 같은 꿈을 꿀 리는 없으니 현실이겠네요!
“어떻게 여기 온 거예요? 아니, 정말 우리 클럽 멤버예요?”
“그건, 글쎄…. 진한테 끌려온 거라서.”
“저도 끌려왔어요!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조니가 방방 뛰며 말하자, 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게 그렇게 해맑게 말할 일인가.
아니, 그보다.
“진, 너 저 애도 끌고 왔어?”
“…….”
“진?”
“그, 키보디스트가 갑자기 나가 버려서…. 하지만 나쁜 짓을 하진 않았어.”
“예고도 없이 집 앞에 나타나서 납치하듯 데려왔지만! 어두컴컴한 창고에 처음 보는 상급생만 가득해서 큰일 나는 줄 알았지만! 하지만 결국엔 르옌을 만났으니 된 거죠!”
아니, 그거 아무것도 안 된 거 같은데.
“그래, 조니. 봐봐. 우리 밴드부에 들어오니까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잖아. 내 말 듣기를 잘했지?”
“네!”
“좋아, 앞으로도 클럽에 충성하는 거야.”
“그럴게요!”
뻔뻔하게 한술 더 뜨는 진과 눈을 빛내는 조니에 도현은 잠깐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 무시하는 이들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그래, 누가 저 앨 말리겠어….
어느새 흐린 눈이 된 도현이 가엾은 조니를 애써 외면할 때였다.
“클라인 덴버, 베이시스트야. 백킹 보컬이기도 하고.”
도현은 소년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클라인은 약간 왜소한 덩치의 소년이었다. 색이 옅은 더티 블론드나 흰 편에 속하는 피부는 소년을 더욱 얌전해 보이게 만들었다. 밴드부보다는 도서부나, 토론부에 더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그와 악수하고 나니 새로운 손이 내밀어졌다. 클라인과 달리 활달한 인상의 소녀였는데, 상당히 미형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갈색 머리카락은 소녀를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캐서린 모스. 캣이라고 불러도 돼. 오, 맞아. 캐시랑 별명이 같지. 그래서 진이 나를 학기 내내 따라다녔다면 믿겨지니? 너는 내 클럽에 들어올 운명이라면서 말이야!”
에 영감을 받아 밴드부를 만들고, 아예 이름까지 Freaky Child로 지어버린 진이었다. 그런 진이라면 충분히 했을 법한 행동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겠네.”
“음, 그땐 곤란했지. 원래는 연극부에 들어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한번 해보니까 기타랑 내가 꽤 잘 맞더라고. 노래 부르는 것도 재밌고.”
연극부. 오늘 처음 보았지만 활달한 인상의 소녀와 잘 어울리는 클럽 같았다. 거기 들어가도 잘했을 거 같다고 생각하며 답했다.
“진은 사람을 잘 보니까.”
그토록 영입에 힘썼다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 아는 척하기는.”
통성명 나누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다비드가 퉁명스레 말했다. 조니와 클라인, 캐서린은 도현의 눈치를 봤지만, 도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비드가 저러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하나, 한 달 넘게 집에 머무른다는데 반기는 게 더 이상했다. 여기서 난장판을 치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도현이 순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다비드.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좋다.”
다비드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도현을 훑어보는가 싶더니, 곧 한숨과 함께 말했다.
“뭐, 그래. 일 년 만인가.”
“조금 더 됐어. 잘 지냈어?”
“너만 안 왔으면 더 잘 지냈겠지.”
“그래, 나도 반가워.”
아주 자연스러운 무시에 조니가 감탄했다. 그의 눈은 꼭 드라마를 보는 사람처럼 반짝였는데, 그 머릿속에 무슨 상상이 펼쳐져 있는지 알 만했다.
진을 가운데 둔 라이벌, 뭐 이런 거려나.
평소였다면 귀찮아서라도 해명 없이 두었겠지만, 지금은 다비드의 기분을 신경 써야 했다. 도현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조니의 상상을 깨트렸다.
“진과 나는 친구야. 그냥 친구.”
“남녀 관계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서….
도현은 조금 아연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이랑 사귀라는 건 가족이랑 사귀란 소리와 똑같은걸.”
“맞아, 우린 피는 안 이어졌어도 가족이라고!”
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해를 위해 가족이라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렇게 곧장 수긍해줄 줄은 몰랐던 도현은 은은히 감동했다. 진도 날 가족으로 생각하는구나.
그들은 잠시 후 자리를 문 앞에서 중앙 러그로 옮겼다. 계속 서서 대화할 거냐는 클라인의 합당한 의문 때문이었다. 문에서 중앙으로 이동하는 짧은 사이, 조용히 다가온 조니가 수줍게 물었다.
“저, 이따 사인해줄 수 있어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그럼 사진도….”
“물론이야.”
조니를 보는 도현의 감정은 조금 새로웠다. 한국에서야, 일찍이 유명 인사였지만 미국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베니스 수상이야 영화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나 알아보는 거고, 보통 어딜 가면 저를 알아보는 사람보다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건 한국에 오기 전까지도 유효했다. 시사회도 아니고 일상에서 저를 알아보고, 팬이라 말하는 이를 만나니 새삼 의 영향력이 실감 났다.
2편, 3편이 나온 후엔 또 달라지겠지.
도현은 미래를 상상해보려 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상상은 맥없이 흩어졌다. 현실로 돌아온 도현은 제게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다비드였다.
“…….”
그러고 보니, 다비드가 안다 했지.
재회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별 티를 안 내서 깜빡하고 있었다. 진은 분명 자신의 실수로 다비드가 H의 정체를 알게 되었노라 고백했다.
저 시선은 그럼 그런 의미일까.
의문이 일면서도 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다비드와 친밀한가의 문제완 별개로, 도현은 다비드를 믿었다. 정확히는 진을 좋아하는 다비드를 믿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도현은 유진 연기를 위해 다비드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얼굴에, 눈빛에 묻어난 순수한 애정을 읽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바를 믿는 거였다.
그래도 이따 얘기는 해봐야겠네.
“그런데.”
말을 꺼낸 이에게 시선이 쏠렸다.
“진, 네가 말했잖아. 도현이 명예 회원이라고.”
캐서린의 말에 진이 ‘그렇지’하고 말했다. 여전히 아이들의 눈길은 캐서린에게 몰려 있었다. 캐서린은 부담스럽지 않은지, 가벼운 태도로 물었다.
“그럼 포지션도 있어?”
캐서린이 던진 화두에 멤버들이 저마다 의견을 던졌다.
“영화에서 드럼을 쳤잖아. 그럼 드러머 아니야?”
클라인의 말에 조니가 반박했다.
“우리 부에는 이미 드러머가 있잖아요. 그럼 드러머가 두 명이란 소리예요?”
“두 명일 수도 있지.”
캐서린이 그런 둘을 한심하게 보았다.
“너희 뭔가 까먹은 거 같은데, 그건 영화잖아. 진짜 밴드가 아니라. 영화 속 포지션이 실제랑 같으리란 법은 없어.”
“캣이 몰라서 그래요! 그때 연주는 다 배우들이 직접 한 거라고요! 그렇죠, 도현?”
“어, 응. 그렇지.”
조니는 진짜 팬인가 봐. 수줍은 태도를 보고도 한편으론 그냥 유명 인사를 만나서 기뻐하는 거라고도 생각했던 도현은 조니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조니가 알았더라면 기뻐했을 일이었다.
“난 그냥 견학하러 온 거야. 포지션은 없어.”
“하지만 멤버라면서요?”
“명예 멤버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된.”
도현이 진을 쳐다보았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진은 의뭉스럽게 굴었다.
“아닐걸?”
“아니라니?”
“도리토스, 기억 안 나?”
“뭐가?”
“나한테 약속했잖아. 내가 유튜브를 만들면 도와주겠다고. 협연 연주자로 말이야.”
그런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길거리 버스킹을 했을 때. 서운해하는 진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 말했더랬다.
도현의 눈이 동그래지자, 진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럼 내가 널 그냥 부른 줄 알았어? 약속을 지킬 차례야, 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