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화. Whose H? (8)
- 생각해보면 그래. 내가 밴드 같이하자고 할 때는 그렇게 거절하더니!
- 그, 네가 제안한 포지션은 드럼이었잖아.
- 바이올린이었으면 수락하려고 했어?
- …아니.
- 그거 봐!
떠오르는 기억이 참 선명했다. 언제 잊었냐는 듯, 그때의 대화가 생생히 재생되었다.
- 다음에, 같이 연주할까?
- 밴드는 싫다며?
- 꼭 밴드 멤버가 아니더라도 협연자라든가, 그런 건 할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진, 너 유튜브 개설할 거라고 했지? 그때 내가 도와줘도 돼?
그래, 그랬다.
내가 그랬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 생각난 얼굴에 진이 팔짱을 꼈다.
“설마, 빈말이었다고 할 건 아니지? 그럼 실망인데.”
도현은 혼란한 와중에도 착실히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은 냉정했다. H의 음반만으로도 내 재량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음반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다른 일까지 벌인다고?
그건 용기가 아니다. 만용이지.
그래, 머릿속은 이토록 명쾌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진.”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이 달랐을 뿐이지.
진이 활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도현이 부정하거나 거부하리라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던 사람의 웃음이었다. 도현은 진의 믿음이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착잡해졌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도현은 제 생각을 부정했다.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할 게 아니라, 해내야 했다. 도현은 미국까지 오게 만든 음반을 포기할 생각도, 그렇다고 진을 실망하게 할 생각도 없었다.
“…저.”
조니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럼, 도현도 우리 멤버인 거죠?”
도현은 정정해 주었다.
“정확히는 명예 멤버, 혹은 협연 연주자.”
약속은 지키겠지만, 그렇다고 빼도 박도 못하고 밴드에 말뚝을 박을 생각은 없었다. 도현의 말을 들은 조니가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이더니 환히 웃었다.
“멤버란 거네요!”
“맞아, 우리 조니는 똑똑하기도 하지.”
진이 기특하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도현의 낯은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그런 도현과 진을 번갈아 보던 클라인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서 포지션이 뭔데?”
진과 도현, 그리고 다비드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포지션, 음, 도리의 포지션은….”
말끝을 흐린 진이 다비드를 흘끔 보았다. 그러자 흉흉한 표정을 하고 있던 다비드가 눈꼬리를 내리며 불쌍한 척을 했다. 설마 내 포지션을 쟤한테 줄 건 아니지? 그런 얼굴이었다.
물론 진은 본래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도현을 어렵사리 데려왔고, 또 조커처럼 특별한 패로 여기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실한 원년 멤버를 식어버린 수프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아니면, 보컬?”
진이 어물거리자 성질 급한 클라인이 재촉했다. 그에 다비드가 인상을 팍 구겼다.
“드럼은 빼. 드러머는 나야.”
“쟤가 드럼 친다고 해서 네 자리가 빼앗기는 건 아니잖아. Each of the days도 투 드러머 밴드였고. 비트 빵빵해서 좋을 거 같은데?”
“하, 그 밴드는 메탈 코어잖아. 우리는 멜로딕이라고.”
다비드가 말했다.
“엄연히 달라. 그리고 멜로딕 장르에 드럼 두 명은 낭비지.”
클라인은 다비드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확실히, 소리 지르는 데스메탈 쪽과 진의 밴드는 결이 달랐다. 드러머 두 명이 낭비라는 다비드의 의견은 합리적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캐서린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이야. 도현이 어떤 악기를 다룰 줄 아는지가 제일 중요하지. 어차피 다룰 줄 아는 게 드럼밖에 없으면 드러머 확정인 거잖아.”
“쟨 그것 말고도….”
무언가 말하려던 다비드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캐서린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혀를 한 번 차고 말 뿐이었다.
그때 경쾌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캣 말이 맞아. 중요한 건 도리지. 그런데 다 맞는 건 아니야. 도리가 다룰 줄 아는 악기는 드럼 말고도 많거든.”
“뭔데?”
“음,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진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꼽았다.
기타, 드럼, 피아노, 리코더, 첼로…. 거기까지 말한 진이 도현을 흘긋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바이올린도 할 줄 알고.
클라인이 놀라며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그 와중에 리코더는 또 뭐고?”
“네가 몰라서 그래. 도리토스의 리코더 실력이 얼마나 환상적인데. 한번 들으면 절대 무시 못 할걸?”
클라인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봤자 리코더잖아’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진은 더 설득하려 굴지 않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도리토스는 굉장히 다재다능해서 할 줄 아는 게 많거든. 솔직히 나도 쟤가 뭘 맡는 게 제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도리. 네가 선택해.”
진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는 무언가 찾는가 싶더니 핸드폰을 스피커에 연결했다.
“뭐 하는 거야?”
도현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진이 모호하게 웃었다.
“일단 들어 봐.”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피아노 반주가 시작됐다. 파도 위에서 물결치며 흩어지는 흰 거품처럼 어딘가 아스라한. 그 몽환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이던 찰나였다.
예고 없이 베이스 기타와 드럼이 치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아스라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경쾌함이었다.
Di da da da da
da da da da- ah
Di da da da da
da da da da- ah
독특한 전주가 시작된 순간 도현은 깨달았다. 듣는 순간 숨이 트이게 만드는, 바닷가의 바람을 닮은 목소리. 진의 목소리였다.
She was a girl
Who grew up in San Diego
And when the sea breeze knocked on the window
She just looked at the sea
Imagine’ of what would happen if the ocean dried up1)
도현은 벌어진 입을 다물고 노래에 집중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자란 소녀, 그리고 도시에서 자란 소년. 두 화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퍽 사랑스럽고 유쾌했다. 그러나 마냥 귀엽지만은 않았다.
얼핏 서투른 사랑 이야기를 하는 거 같지만, 그 속을 파고들면 그건 눈가리개일 뿐이었다. 진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Freaky Child’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랑스러운 가사로 잘 덮어썼다.
반복되던 후렴구가 잦아들고.
재생이 끝난 휴대폰은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지만, 스피커가 남긴 공기의 파동은 여전히 잔재해 도현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미완성곡이야. 녹음도 가이드용으로 단순하게 한 거고. 아, 제목은 . 아마 우리 밴드의 데뷔곡이 되겠지.”
“…이걸.”
도현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이걸, 작곡했어? 직접?”
“아빠한테 도움을 좀 많이 받았지.”
진은 태연하게 답했지만, 도현은 그녀처럼 태연히 굴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작곡할 줄 알았던 건데?”
“잘 못해. 배운 지 별로 안 됐거든. 아마 네가 한국에 갔을 때인가? 그쯤이었을 거야.”
“그때부터….”
“약간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내 곡이 아니라 우리 밴드 곡이야. 아빠랑 아빠 지인분 도움을 좀 많이 받았고… 그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 아, 조니랑 너 빼고.”
조니가 시무룩해졌다.
“왜 말 안 해줬어?”
성급히 나온 질문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진은 씨익, 델마 아카데미의 악동처럼 웃었다.
“당연히 이렇게 놀라게 해주려고?”
“…하.”
도현은 숨을 토해냈다. 어이없는 사람처럼 짧게 심호흡하다, 결국 마른세수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도현의 반응이 생각보다 크자 흡족한 낯을 한 진이 부연 설명했다.
“클럽 결성한 지 일 년도 넘었는데 왜 이제야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시작하겠어?”
도현은 그 물음을 이해했다. 장장 일 년에 걸친 준비가, 곡이, 이제야 얼추 끝을 보여서겠지. 도현이 듣는 순간 좋다고 생각했던 곡은 생각보다 더 오랜 기간, 진의 노력과 애정 끝에 탄생한 곡이었다.
도현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숨겼단 원망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단, 떨어져 있는 일 년 동안, 도현이 영혼을 극복하려 애썼던 그 시간 동안 진도 이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게 와닿아서….
“곡은 어땠어?”
그 순간 모든 눈길이 도현을 향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곡의 첫 감상을 원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며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어.”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성질 급한 클라인이 물었다. 도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평가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어. 그냥, 내 감상은… 너희를 무척 닮은 곡 같아.”
“칭찬인가?”
클라인이 아리송해하자 조니가 조심스레 말했다.
“클라인을 닮은 거면 칭찬은 아닐 텐데.”
“뭐? 내가 어때서!”
“글쎄요, 클라인이 제일 잘 알지 않을까요?”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조니의 얼굴은 제법 얄미웠다. 제게는 수줍은 팬처럼 행동하는 조니라, 이런 면모는 새로웠다. 본래 성격이 그리 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사는 누가 한 거야?”
“내가.”
진의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사는 진이 거의 다 했지.”
“…네가 이런 데 재능이 있는 줄 몰랐어.”
“나도 몰랐어. 밴드를 안 했다면 영영 몰랐을 뻔했지. 네 덕분이라고 생각해.”
을 찍을 때만 해도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부모님과 루카 하퍼의 일로 힘들기만 했는데….
“그거 정말, 기쁜 말이네.”
내가 친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니. 그게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진의 행복에 일조했단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동시에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이건 아닌 거 같아. 내가 너희 사이에 들어가는 건… 그건 너무 양심 없는 일이라 생각해. 이건 너희들 곡이잖아.”
존재하는 노래를 같이 연주하고 녹음하는 거라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직접 만든 곡을, 그것도 밴드의 데뷔곡을 도현이 함께하는 건…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도리.”
“그래서 필요하다고?”
“그래. 네 말대로 이건 우리 곡이야. 듣는 사람 없이 묻힌다 해도 잊지 못할 곡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어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 도현이 탄식했다.
진은 아무 생각 없이 도현을 부른 게 아니었다. 그저 친구란 이유로, 제이 로빈이라는 이유로 밴드에 끼우려는 게 아니었다.
도현의 유명세를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녀 말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듣고, 알도록. 수많은 노래에 힘없이 휩쓸려 사라지지 않도록.
1) 그녀는 샌디에이고에서 자란 소녀였어
바닷바람이 창문을 두드릴 때면
그저 바다를 바라봤지
저 바다가 말라 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