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Whose H? (9)
널 이용하겠단 발언에 조니가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조니의 걱정과 달리 도현은 상처받지 않았다. 진 또한 도현이 상처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진은 생각해왔던 계획을 말했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거야. 우리의 데뷔곡이 담긴 뮤직비디오를.”
뮤직비디오.
그 한 단어에 모든 게 선명해졌다. 진은 그런 도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그리고 너를 그 비디오의 남자주인공으로 삼을 거고.”
“…….”
“그 도현이, 르옌이 밴드에서 연주도 하고 연기도 해. 당연히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장 관심받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네가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네 새로운 작품이 개봉할 때마다 우리는 언급될 테니까.”
들뜬 갈색 눈동자 사이로 금가루가 반짝였다. 도현은 불티 같다고 생각했다.
“너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수많은 기회를 얻는 거야. 도현.”
그 안에 도사리는 빛에 도현이 움찔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도 아니고, 오래된 전구 아래에 서 있는 것뿐인데 진은 강렬하게 빛났다.
도현은 처음 언어를 배운 아이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이해했어.”
만약 진이 다른 이유를, 친구나 제이 로빈 따위를 들었다면 도현은 결국 거절했을 거다. 자신의 음악이란 게 얼마나 큰 의미이고 소중한지 아니까 더욱이 그랬겠지.
하지만 진은 냉정하게 손익을 판단했다. 그렇게 도현을 설득했다. 도현은 자신이 진의 말에 넘어갔음을 인정했다.
“그런 거라면, 좋아. 할게. 다만 조건이 있어.”
“조건?”
스윽, 새카만 눈이 아이들을 훑었다.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눈에 담은 도현이 입술을 뗐다.
“한 명이라도 불편해한다면 나는 빠지겠어.”
“전 좋아요!”
조니가 황급히 외쳤다.
뒤이어 클라인도 동의한다는 듯 쿨하게 말했다.
“우리 채널이 망하는 것보단 낫지.”
“나도 동의.”
손바닥을 펼친 캐서린이 도현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근데 클라인 같은 이유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 될 거 같아서.”
“좋은 경험?”
“말했잖아. 원래는 연극부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지금은 밴드부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게 연기에 흥미가 사라졌단 소리는 아니거든.”
캐서린이 즐겁게 말했다.
“내가 또 언제 유명한 배우랑 연기해 보겠어? 난 솔직히, 진을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참이었어.”
“저도요! 도현, 저도 납치되길 잘했어요!”
캐서린과 조니의 반응에 도현의 안색이 한결 풀렸다. 그들의 반응에 조금 안심한 것이다. 이내 도현은 마지막 인원을 쳐다봤다.
“뭐.”
“다비드, 너는 어때?”
“…….”
그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곤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얌전히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애가 탄 건 나머지 멤버들이었다.
올망졸망한 시선이 모이자 다비드의 미간이 점점 더 짜부라졌다. 그는 결국 짜증이 난 얼굴로 툭 쏘아붙였다.
“알겠으니까 그 눈들 치워. 소름 돋는다고.”
툴툴거리긴 해도 공격적이진 않았다. 이곳에서 다비드의 태도를 오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마워, 다비드.”
“아, 됐어. 징그럽게.”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적인 다비드는 소파에 가서 드러누웠다.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잘됐네요, 도현!”
조니가 기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모르게 그의 복실한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방방 뜬 게 신기해서 만진 건데, 만져보니 제법 부드러웠다.
“조니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진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도현이 답했다.
“아는 애를 닮아서.”
“누구?”
“할리랑 브로콜리.”
“아….”
조니를 보던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개 같네. 왠지 욕 같은 말에 도현의 입꼬리가 짧게 떨렸다.
그날 클럽 모임은 조금 더 떠들다가 멤버들이 도현에게 미완성곡, 를 들려준 후에 끝났다.
포지션은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진이 블루투스로 보내준 노래를 반복해서 듣던 도현이, 무슨 악기가 제일 잘 어울릴지 고민해 보겠다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으면 안 돼. 네가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생각해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 아마… 2월 전에는 결정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진이 환히 웃자, 도현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그날은 본가에 들르지 못하고 저물었다.
다음 날.
도현은 전날과 달리 계획대로 그의 집에 향했다. 울타리를 밀자 잘 관리된 정원이 보였다. 겨울이라 특유의 생생함을 조금 잃은 정원은, 그 나름대로 소슬한 매력이 있었다.
바삭, 바삭. 운동화 밑창이 흙을 밟으며 미약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도현은 조금 더 걷다가 풀장 앞에 자리한 흔들의자 앞에 멈춰 섰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 집에 오로지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드니 일상적이던 풍경도 새삼스레 다가왔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래서 진이 아지트를 만드는 건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나만의 공간. 그런 생각이 들자 묘하게 속이 간질거렸다. 그냥 집일 뿐인데 혼자만의 비밀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도현은 문득, 조금 더 훗날의 일을 그려보았다. 나중에, 조금 더 나중에… 홀로 해외에 나가도, 그렇게 혼자 지내도 누군가에게 걱정이 되지 않을 때. 그때 조용한 나라에 집을 한 채 사두어도 좋겠다고.
도시와 떨어진 시골이 좋을 거 같았다. 바다보단 숲이 좋았다. 니콜라스와 달리 도현은 수영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한적한 시골에 별장을 하나 사들여, 쉬고 싶을 때마다 가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쉼터로….
즐거운 상상에 도현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집에 들어온 도현은 제일 먼저 보일러를 켰다. 손이 시리면 연주할 때 둔해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고민하다가, 주전자에 물을 받아 끓였다. 잠시 후에 향긋한 차향이 집 안에 은은히 차올랐다.
주전자와 찻잔을 거실 테라스 옆 테이블로 가져온 도현은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무도 없는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찻잔을 비워나갔다. 누군가는 심심하지 않냐 물을 수 있는 고요함이 무척이나 흡족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편안한 건 오랜만이었으니까.
한국에서 겪었던 온갖 감정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 도현은 오로지 평온했다.
한국에서 얻은 것은 무척 귀하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경험, 희운과의 만남, 영혼의 합일. 모두 가치를 잴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한 일들이다. 그로 인해 도현은 성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었던 성장통은 도현을 알게 모르게 지치게 했다.
그래서 도망치고자, 쉬고자 미국에 왔다. 실제로 도현은 진의 집에서 편했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게 완전하진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도현을 반겨준다 한들, 결국은 손님이었으니까. 그곳은 아늑하긴 해도 도현의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과 다르게.
탁.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비운 도현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 상태로 양손을 쥐었다 펴며 손의 감각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훌쩍 몸을 일으켜 섰다.
“이제 시작해야지.”
검은 눈이 향한 건, 맞은편 의자에 고이 놓인 바이올린 가방이었다.
* * *
목을 좌우로 움직인 남성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도 서류를 봐서 그런가, 목부터 등허리까지 뻐근했다. 밀턴은 잠시 몸을 일으켜 굳은 상체를 풀어주었다.
‘잠시 쉬었다 해야겠군.’
몸이 파업을 외치고 있었다. 조금 더 젊었을 때라면 무시했겠지만, 그는 이제 그리 젊지 않았다.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밀턴은 잠깐 휴식이라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로 향했다. 그가 애용하는 쿠션을 머리맡에 두고선 쓰러지듯 누운 남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곧 천장을 향하던 시선은 그 옆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정확히는 너머에 손님이 머무는 중인 벽 쪽으로.
“흐음….”
도현은 며칠째 소식이 없었다. 바로 옆방에서 지내면서 소식이 없다고 말하니 웃기긴 하지만, 정말 그랬다. 그는 같이 식사를 들고 차를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본래 밀턴은 도현에게 제안했다.
원한다면 근처에 좋은 연습실이 있으니, 그곳을 쓰게 해주겠다고. 도현은 그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 연습할 장소는 이미 골라놨어요.
그리고선 아침, 저녁에만 얼굴을 비추는 게 아닌가. 밀턴은 도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을 줄은.”
적어도 테스트를 어떤 기준으로 볼 건지 정도는 물어올 줄 알았다. 그런데 도현은 정말 칼 같았다.
밀턴도 덩달아 진지해질 정도로.
그는 제 턱을 쓰다듬다가,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도현이 두문불출해진 며칠 사이, 밀턴이라고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도현이 자신의 테스트를 통과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이 이뤄지도록 절차를 밟았다.
처음은 레코딩 스튜디오였다.
밀턴이 따진 조건은 두 개였다.
실력이 좋으면서, 신의가 있을 것.
도현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그저 그런 스튜디오와 프로듀서를 소개해줄 수는 없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그리고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스튜디오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그가 오랫동안 클래식계에 머물며 만든 인맥 덕분이었다.
다음은.
‘반주자.’
이 부분은 그도 조금 고민했다.
도현에게 반주자가 필요할지, 아닐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현과 연주의 결이 잘 맞을 거 같고, 실력 좋고, 또 비밀을 지켜줄 만한 피아니스트에게 말은 해놓았는데….
“모르겠단 말이지.”
가정일 뿐이지만, 도현이라면 완전한 솔로 앨범도 잘해낼 거 같았다. 음악을 듣지 못했으니 그의 음악에 기반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한 감정적인 생각이었다.
그래도 선택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다른 법이니 준비는 끝내 놓았다.
그는 한 달 전 월드 투어를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그의 오랜 지인이자 피아니스트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밀턴의 요청에 흥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선선히 수락했다.
- 좋아. 쉬다 보니 손이 근지러워지던 참이기도 했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군. 신변 비밀 조항도 꽤 흥미롭고 말이야.
애초에 약간 괴짜 같은 면모가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밀턴이 그를 선택한 거지만.
- 하지만 실망스러운 실력이라면 바로 뒤돌아 나갈 거야. 그렇게까지 한가하진 않거든.
그 말이 옳았다.
그 어떤 거장이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연주자의 반주를 맡아 주겠다고 할까?
밀턴이 아니었다면, 그가 음악계에 영향력을 가진 인사가 아니었다면, 오랫동안 알아 온 술친구가 아니었다면 성사 자체가 불가능했을 일이다.
물론 밀턴은 그의 친우가 실망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어서 한 일이었다. 그 또한 H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과거의 일.
천재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다가 추락하는 이는 수없이 많다.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이들도,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다.
도현이 그간 나태했다는 게 아니다. 밀턴도 귀가 있고 눈이 있기에 도현이 해온 일들을 알고 있었다. 누구나 감탄할 만한 배우의 길을 걸어온 도현이다.
그래, 배우의 길을.
밀턴은 바랐다. 바라건대 그 어린 천재가 주어진 재능을, 기적을 제 손으로 외면하지 않았기를. 그 빛을 스스로 꺼트리지 않았기를. 그의 눈이 벽에 붙은 달력에 향했다.
이틀.
이틀 후면 약속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