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Whose H? (10)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
가볍게 아침 인사를 나눈 도현이 로테 옆에 섰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일손을 거드는 도현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냥 쉬어도 된다니까.”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이쪽이 더 마음이 편해요. 매번 했던 일이라 익숙하기도 하고요.”
“진이랑 어떻게 친한지 모르겠다니까.”
픽 웃은 로테가 베이컨 좀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도현은 그녀의 말대로 베이컨을 프라이팬에 올리고, 알아서 달걀 두 알도 풀었다. 베이컨에서 나온 기름이 스며들어 따로 식용유는 필요 없었다.
한 차례 구운 후에는 접시에 나눠 담고, 한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로테가 구운 빵과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버섯볶음이 추가되자 근사한 아침상이 만들어졌다.
도현은 냉장고에서 소스를 꺼내는 로테를 보며 말했다.
“진 깨울까요?”
“부탁할게.”
도현은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부분 진이 도현의 방에 놀러 왔기 때문에 그리 갈 일이 많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계단을 올라간 도현은 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진, 자?”
똑똑. 다시 두드려 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도현은 ‘실례할게’라고 말한 후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자는 버릇이 있어서 보이는 건 금색 실타래뿐이었다. 피식 웃은 도현이 침대가 아닌 창가로 향했다.
“으윽….”
부러 소리 내며 활짝 커튼을 열자 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도현은 아랑곳없이 남은 커튼까지 완벽하게 젖힌 후에, 부드러이 소녀를 불렀다.
“진, 일어나. 아침이야.”
“오 분만….”
“오 분 뒤에 또 그럴 거잖아.”
“아닌데….”
“진.”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불 뭉치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고개가 쏙 빠져나왔다.
“더 자면 안 돼?”
올망한 시선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침 식사 준비 다 했어.”
“…허유.”
알 수 없는 탄식을 뱉은 진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도현이 이 집에 온 이후로 본의 아니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아빠나, 엄마가 깨우러 오면 그냥 무시하고 자면 되지만 도현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진이 눈을 뜰 때까지 고집스럽게 불러대는 게 첫 번째 이유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한들 그렇게까지 구겨진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단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도현은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몸을 일으킨 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다 챙기면 내려와. 먼저 내려가 있을게.”
“그래, 네 맘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진이 조금쯤은 도현의 부탁을 들어준 걸 후회 중임을 모르는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다시 주방에 내려온 도현은 편안한 실내복을 입은 밀턴과 마주쳤다.
“일어나셨어요?”
“그래, 진 깨우고 오는 거니?”
“네. 방금 일어났어요. 곧 내려올 거예요.”
고생하는구나. 그 말에 도현이 작게 웃었다.
“고생이라 할 것도 없죠. 깨우면 금방 잘 일어나는데요.”
“그게 신기하단 말이지….”
밀턴은 진을 깨우려면 최소 30분 정도의 전쟁이 필요했다. 진이 조금 더 고집부리는 날에는 그보다 훨씬 길어졌다. 침대에 있으려는 자와 떼어내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다음 방학에도 우리 집에 올래?”
로테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도현과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때때로 편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자주 돌아다니지 않았으며, 가끔은 있긴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조용했다.
그뿐일까. 이렇게 집안일이 있을 땐 꼭 옆에 와서 거들었다. 진의 기상을 담당하는 것도 최근 도현의 몫이 되었고 말이다.
어른스러운 성격은 집안일에서만 발휘되지 않았다. 가끔 티타임을 가질 때면 진의 또래랑 얘기하는지, 제 또래랑 얘기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대화 매너도 좋아서 얘기하다 보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이 너무 좋아했다. 매일매일 놀이공원에 가는 애처럼 신나 하는데 어떤 부모가 싫어할까.
“마음은 감사해요. 그런데 그때는 이번 방학처럼 여유롭지 않을 거 같아서요.”
“아쉽구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파자마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진이 하품을 하며 걸어왔다. 그녀는 물 한잔을 마신 후 제 지정석에 가서 앉았다.
졸린 눈을 꿈뻑이던 진은 베이컨을 질겅질겅 씹다가, 막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맞아. 포지션은 정했어?”
베이컨을 꿀꺽 삼킨 진이 말했다.
“내일이 2월이잖아.”
도현이 진의 집에서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도현은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콕 찍어 홀그레인 소스를 발랐다.
“응, 생각했어.”
“드디어!”
진이 잠에서 확 깬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그녀의 뺨에는 옅은 흥분이 묻어났다.
“뭔데? 뭐로 정했는데?”
“근데 조금 이따가.”
“이따가?”
“저녁에 알려줄게.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응, 알려주면 당장 아지트에 가자고 할 거잖아.”
“…그건 그런데.”
“그러니까 이따가. 오늘은 할 일이 있어.”
진은 아쉬운 눈길로 도현을 흘깃거렸다. 그러나 도현은 완고했다. 결국 진은 빵을 베어 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저녁이랬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진이 오물오물 빵을 씹는 사이 도현은 대각선 자리에 앉은 이를 보았다. 그는 이미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은 곧바로 맞닿았다. 도현은 짧게 숨을 삼켰다.
오늘, 음반의 운명이 정해질 예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도현은 자연스레 밀턴의 서재로 향했다. 밀턴은 소파에 앉길 권하며 말했다.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진 않던 거 같던데.”
진과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개 다 할 수 있겠어? 욕심부리다 두 개 다 제대로 못 하면 제일 곤란한 건 너일 텐데.”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럼 왜?”
“둘 다 중요한 일이니까요.”
밀턴은 조금 어이없어졌다. 그는 제 딸이 소중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진의 밴드부와 H의 음반을 같은 무게 취급하는 도현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진에게는 그 밴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건 맞다. 하지만 도현에겐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눈치챘을 도현은 모르는 척 그가 준 우유를 홀짝였다.
“그래서, 언제가 편하니?”
“지금 당장도 괜찮아요.”
아주 자신만만하군.
밀턴은 건방지다 느끼면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소심한 사람보다 건방진 사람을 선호했다. 자신이 뭘 할 줄 아는지 아는 사람은 본디 자신감이 넘치는 법이었으니.
더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
“……”
그들은 더 기다려야 했다.
패기 좋게 바이올린을 가져온 것까진 좋았는데, 이 집에 둘뿐이 아니란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밀턴과 도현은 서로 어색하게 마주 본 채로 시간을 죽였다. 그 공기를 깨트린 건, 서재 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노크 소리였다.
밀턴이 문을 열자 들어온 로테가 도현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이야기할 게 조금 있어서 대화하는 중이었다는 말에 가늘게 눈을 뜨던 그녀는, 곧 아무렴 어떻냐는 듯이 말했다.
“지금 나가려고요. 진은 가는 길에 음악 학원에 내려주고.”
프리랜서에 가까운 밀턴과 달리 로테는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자주 데려다주곤 하던 밀턴이 물었다.
“같이 갈까?”
“안에 작은 신사분 계시잖아요. 둘은 여기 있어요.”
로테는 밀턴의 뺨에 가볍게 키스한 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테와 진, 두 사람이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귀를 기울이던 도현은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자 시선을 돌렸다.
“큼.”
밀턴이 헛기침을 했다.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조금 적나라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기에 별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곡은 안 알려주고 시작할 거니?”
“들으면 알 거예요.”
안 알려준다는 뜻이었다.
“손 풀 시간은?”
“공연에서 손을 풀진 않죠.”
“태도는 완전히 프로 연주자구나.”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 도현은 프로 연주자가 맞았다. 과거에, 그러니까 또 다른 나이자 형이.
밀턴은 그만큼 기대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도현이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든 순간, 그 말을 꺼낼 수 없어졌다.
차이라곤 손에 바이올린이 들렸는지, 아닌지 뿐이다. 그것만으로 도현은 다른 사람 같아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집중하게 하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저 소년에게, 화려한 배우의 길을 걷는 소년에게서 이런 기운이 풍기는 건지.
가볍게 치켜든 턱이나 팔의 각도, 곧게 세운 허리는 재롱잔치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연주자. 분명 연주자의 것이었다.
‘하마터면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뻔했군.’
밀턴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단 것에 안심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연주자라면 밀턴은 청중이었다. 조금 더 정중히 들을 필요가 있었다.
소년은 느릿하게 심호흡했다.
긴 눈매가 한번 감겼다가 뜨이고.
흰 손이 우아한 궤적을 그렸다.
* * *
첫 음이 시작된 순간, 밀턴은 헛숨을 토해냈다.
드뷔시, 달빛.
Debussy, Clair de lune
들으면 안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H의 시작이자,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의 첫 도약이었는데.
영화 자체는 취향이 아니라 많이 보지 않았지만, 그의 연주 부분만큼은 테이프가 닳도록 돌려 보았다. 밀턴은 눈을 감고도 도현의 연주를 그릴 수 있었다.
‘이게 네 대답이구나.’
도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라는 걸 증명하라는 말에,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해 보라며 당당히 내민 것이다.
웬만한 자신감으로는 할 수 없는 결정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력이 녹슬었거나, 이상한 버릇이 들었거나, 정체되었다면 날카롭게 갈고닦인 밀턴의 귀는 모든 걸 알아챌 테니까.
하지만….
밀턴은 어느 순간 떨리는 손을 느꼈다. 언제부터 떨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달빛 자락이 그의 위로 드리운다.
그것은 류트의 맑은 음처럼, 환상과 환각이 이지러진 하늘의 끝자락처럼 밤을 불러왔다.
영화에 담겼던 연주는 무척 강렬했다. 듣는 이의 심장을 멋대로 잡아채고, 파괴적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연주는….
안개처럼 스며들어 온몸을 적신다. 알아챘을 땐 이미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인 후였다. 그곳은 가면 무도회장이었다. 흰 밀랍으로 표정을 가린 이들이 밤하늘을 머리에 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밀턴은 그중 한 명이었다.
드뷔시의 음악은 듣는 게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그 추상적인 말을, 밀턴은 지금 순간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환상과 현실이 섞인다. 무도회를 연 소년의 손끝에서부터 달빛이 나부꼈다. 밀턴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이 연주를 놓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