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97화 (498/582)

제497화. Whose H? (11)

밀턴에게 최선의 곡을 주문받았을 때, 도현은 고민했다.

어떤 곡이 나의 최선이 될 수 있을까.

수많은 작곡가와 그의 곡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가라앉았다. 상상한 모든 곡이 충분하고, 동시에 모든 곡이 불충분하게 느껴졌다.

그건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지친 도현이, 전시장 한 곳에 고이 놓인 비디오를 발견한 건.

‘The Wanderer’

도현은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틀었다. 혼자만의 기척이 전부인 거실, 커다란 TV 화면 위로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을 때.

도현은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현과 현이 공명한다. 그건 손끝을 타고 흘러가, 울림으로 화하며 서재 가득히 퍼져나갔다. 도현은 연주가 끝났음을 느끼며 마지막 음 한 자락까지 정성스레 퍼트렸다.

그렇게 몇 초.

도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검은 눈동자가 향한 건 단 한 명의 청중이었다.

“…….”

밀턴의 표정은 굉장히 모호했다.

그는 난제를 맞닥뜨린 학자처럼, 혹은 처음으로 별똥별을 목도한 아이처럼 그렇게 도현을 보았다.

“왜 이 곡을 골랐지?”

“이게 제 최선이었으니까요.”

도현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제가 틀렸나요?”

“…아니.”

이보다 더 완벽한 걸 찾을 순 없었겠지. 그의 중얼거림에 도현의 낯빛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런 도현을 골치 아프다는 듯이 보던 밀턴이 입을 열었다.

“도현, 솔직하게 말할까.”

뭐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뺨을 쓸었다.

“너는 천재야.”

“…….”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천재지.”

그 직설적인 말은 찬탄이나 숭배보다는 사실 직시에 가까웠다. 그런 말을 하는 밀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한 빛을 띠고 있었다.

“몇 년 전의 너는… 너는 그때도 분명 천재였지만, 무언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었어. 마치 두꺼운 털옷을 입고선 날씬해 보이려는 아이처럼.”

독특한 비유에 도현이 약간 움찔했다. 밀턴의 말은 매우 날카로웠다. 실제로 그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말랑한 육체에 형의 재능과 실력이 욱여넣어진 상황이었으니까.

“그 정제되지 않은 천재성과 날것 그대로 툭툭 튀어나오는 표현력은 소름이 끼쳤지. 혹자는 네 음악이 너무 거칠고 폭력적이라고 표현하더구나.”

그 말대로다.

도현은 마치 날카로운 날붙이를 처음 다루는 이와 같아서, 그 날붙이로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위협했다. 그가 추는 춤사위는 위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지만… 때로는 파멸적으로 보였다.

연주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온통 헤집어져 피투성이로 만드는. 그럼에도 아름다워 손을 뻗고 싶어지는 것.

그게 과거 도현의 음악이었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지. 그 안에 대체 뭐가 들어앉아 있는지. 거친 표면을 다듬고 나면 대체 뭐가 나오게 될지 말이야.”

밀턴은 그 후로 잠시 침묵했다.

그가 본 것을, 들은 것을, 경험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도현은 마치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았다.

아니, 아니다. 그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그보단… 차라리 허물을 벗은 거 같았다. 제 몸을 답답하게 뒤덮었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이제야 제 본연의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너는, 밀턴이 말문을 뗐다.

“너는 내게 배역을 주더구나.”

그의 말에 도현이 멈칫했다.

배역.

그 단어 선정이 무척이나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보자 밀턴이 소파를 눈짓했다. 도현이 자리에 앉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마치 네 세계에 초대된 기분이었어. 그뿐 아니라 너는 나를 그 세계의 일부로 만들었지.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밀턴은 회상하듯 뇌까렸다.

“아주 고요하고 아름다우면서, 슬픈 시간이었단다. 네가 의도한 게 맞니?”

“…제가 보는 걸 보여주려 한 건 맞아요.”

“그렇다면 네 재능이겠구나. 어쩌면 스크린 밖의 사람들을 네 감정에 동화시키는 재능이 여기서 발휘된 건지도 모르겠어.”

이해를 넘어 납득, 납득을 넘어 공감. 그리고 공감을 넘어 동화. 그건 도현의 연기가 가진 특징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관객이 느끼게 하고, 경험토록 하는 것. 도현이 천재라고 불리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것이 음악에서도 발휘된 것이다.

밀턴은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불가해하다.

대체 이 소년은 언제 실력을 갈고닦았으며, 변변한 스승 없이 이만큼 성장한 걸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테크닉도, 표현력도 모두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은 연주는 밀턴을 살면서 처음 겪는 미스터리로 빠트렸다.

가장 놀라운 건.

“아이는 아이인가.”

“네?”

눈을 뗀 사이 훌쩍 자라버렸다.

밀턴도 결국 음악인이라서, 자란 키가 아니라 그의 자란 연주를 보고 나서야 성장이 와닿았다.

그 어렸던 천재는 자랐다.

거부하는 이를 멋대로 휘두르며 굴복시키려 굴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이 다정해졌다. 여유가 생겼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더 이상 쫓기는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두려움을 심고 따르도록 강제하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파고들어 유혹했다.

이리 와. 이리로 와.

이 달빛에 몸을 맡기고 같이 춤을 추자. 무척 즐거울 거야.

겁에 질린 이는 달래고, 호기심을 보이는 이에겐 손짓하고, 홀린 이는 인도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폭력도, 공포도 없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밀턴 씨?”

소년의 눈에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밀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도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전 합격인가요?”

우스운 질문에 밀턴이 실소했다.

“반대의 경우는 조금도 상정하지 않은 얼굴이면서.”

“그래도 여쭤는 봐야죠. 그래서 어떤데요?”

“궁금하니?”

“네.”

“그래, 궁금하다니 알려줘야지.”

밀턴이 상냥하게 말했다.

“너와 내 딸에 대한 신의를 뒤로하고, 널 당장에 음악 대학에 던져 넣을까 고민 중이란다.”

“…….”

“…….”

“…안 되는 거 아시죠?”

“안다. 얘야. 빌어먹게도 잘 알아서 지금 딱 답답해 죽기 직전이거든.”

밀턴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의 눈에 떠오른 광기를 닮은 빛에 도현이 움츠러들었다. 도현은 결국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는 말을 남기곤 제 방으로 도망쳤다.

달칵, 방문을 닫은 도현은 따라오는 기척이 없는지 살폈다. 그는 밀턴이 서재에서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해 보였지….’

내내 침착한 눈빛을 해서 역시 평론가구나 싶었는데, 그냥 조용히 맛이 간 거였다.

이거, 밀턴의 도움을 받는 게 맞는 건가. 약간의 의심과 회의감도 잠깐. 도현은 피식 웃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해냈다.

아직 음반의 음 자도 밟지 못했지만, 일단 그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웠다. 목표했던 바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이다.

“…하하.”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속부터 흘러나오는 성취감에 도현은 한참을 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속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도현조차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던 검은 얼룩이 소리를 타고 몸을 빠져나올 때까지.

* * *

음악 학원에서 돌아온 진은 현관을 넘자마자 곧장 직진했다. 우다닥 달려서 간 곳은 도현의 방문 앞이었다.

벌컥!

“도리! 도리토스!”

“진.”

도현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가방도 안 놓고 온 진의 행색을 보고 작게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해.”

“그럼 안 급하겠어?!”

진이 도현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서 뭔데? 뭐냐고!”

누가 보면 돈이라도 떼먹은 줄 알겠네…. 도현은 힘없이 흔들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일단, 한 가지 물을게.”

“꼭 지금이어야 해?”

“응. 중요해.”

“…알았어. 말해봐.”

진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도현은 조금 긴장하며 물었다.

“너희 곡에 내가 손 좀 대도 돼?”

“하?”

어이없다는 음성.

역시 너무 나간 건가.

도현은 부끄러운 심정이 되어 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연스레 멱살도 자유를 찾았다.

“미안, 조금 주제넘었던 거 같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만약 바이올린 하면 어떻게 같이 연주하려고 했어? 우리 악보엔 바이올린 파트가 없는데?”

“…아.”

도현이 바보 같은 탄성을 내자 진이 뺨을 씰룩였다.

“그리고 말했잖아. 넌 우리 멤버라고. 그리고 그 곡은 우리 밴드 곡이야. …아하.”

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알 것 같네. 내가 널 이용만 하는 줄 알았어? 네 유명세 때문에?”

도현이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진은 할 말이 많은 눈을 하다가 가방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는 도현의 침대에 앉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바보야. 바보는 니킨데 왜 네가 바보처럼 굴어.”

“니키한테 말이 좀….”

“걘 바보 맞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넌 우리 멤버라고. 대체 그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다정한 널 두고.

“물어본 거에 답하자면, 당연히 돼. 무조건 돼. 물론 그걸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다 같이 의견을 듣고 정할 거지만.”

“그건 당연하지.”

“그럼 이제 말해줄 수 있어? 무슨 포지션인지.”

“네가 말한 거.”

많이 생각했다. 밀턴의 테스트 탓에 시간이 충분치는 않았지만, 그 시간을 쪼개어 를 듣고, 또 듣고, 반복해서 들으며, 느꼈다.

진은, Freaky Child는 이 곡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애매한 마음과 어정쩡한 태도로 그 사이에 끼어도 되나?

물론 아무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인사하겠지.

하지만 도현은 음악을, 진을, 그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바이올린.”

도현이 할 건 정해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