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98화 (499/582)

제498화. Whose H? (12)

“-바이올린이라고?”

혼란스러워하는 진에 도현이 말했다.

“왜? 이걸 기대했던 거 아니야?”

“아니, 그렇긴 한데….”

그으, 래도. 진이 말을 늘리며 눈치를 보자 도현이 픽 웃었다. 바라긴 바랐는데, 막상 바란 상황이 닥치니 걱정되나 보지.

“솔직히 원했던 상황은 맞아. 인정해.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워.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진이 조심스레 말했다.

“넌 아직 비밀을 밝힐 생각이 없잖아.”

도현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의 말대로 도현은 H의 정체를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왜? 의문과 불안, 따스한 염려가 일렁이는 시선에 도현이 잔잔히 말했다.

“나무를 숲에 숨기는 거야.”

그간 도현은 고민했다.

사람들이 나를 H로 생각할까?

사람의 상식이란 생각보다 견고하다. 오랫동안 다듬어진 상식은 때론 편견이 되고, 그건 눈에 보이는 사실조차 쉬이 왜곡하고는 한다.

도현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왔다. 태생적으로 관계에서 도태될 운명을 타고났기에, 무의식, 혹은 본능적인 감각에서부터 그것을 경계했다. 그리 아등바등한 결과가 연기에서 꽃피운 재능이었다. 연기는 사람을 이해하는 예술이니까.

그래서 도현은 알았다. 제가 진의 유튜브에 나와서 바이올린을 켠다 해도, 사람들은 도현이 H라는 증거보다 H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려 집중하리란 걸.

그간은 조금이라도 증거가 될 법한 일이라면 피했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은, 도현은 보다 더욱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응.”

“도리,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분명히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전처럼 조용하지 않을 거라고.”

그의 친구는 역시 다정했다. 원하는 결과물을 눈앞에 두고도 결국엔 친구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이 물어보면 데뷔 영화의 영향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고 할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으음….”

진은 여전히 찝찝해 보였다. 도현은 아까부터 서 있는 진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의심한다면,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면 돼.”

“어떻게?”

“글쎄…. 이건 어때.”

도현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올라왔다. 소년에게서 보기 드문 표정에 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진은 방금까지의 걱정을 잊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상대를 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H로 의심하지 못할, 절대로 열셋의 소년이라고 믿기지 않는 음반을 만드는 거야. 예를 들어….”

예리한 누군가가 나를 의심해도 상식적인 사람들에게서 미쳤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 산뜻하게 뱉은 말에 진이 도현을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우스워 도현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진은 떫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말이야 쉽지.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도현은 진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말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야. 일단 네 곡은 밴드 음악이고, 바이올린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H 음반과 네 데뷔곡 공개 시기도 비슷할 테니 더더욱 의심하지 못할걸.”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어딘가 노랫말처럼 들렸다. 뮤지컬에서 주인공이 희망을 노래하는 장면 같기도 했다. 잘 조각된 뺨 위로 즐거움을 띄우고, 검은 눈을 별처럼 반짝이는 소년은 기묘하게도 어떤 기대를 심어주었다.

저 애라면 정말 해낼지도 몰라.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진은 입을 벌렸다. 이 순간 진은 도현과 재회한 날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변했구나, 도리.”

단순히 둘러싼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의 도현은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위태로움이 있었다. 눈을 떼면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자꾸 쳐다보게 되고, 신경 쓰게 되는 아슬아슬함.

그 위태로움은 도현이 가진 창백한 아름다움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분위기가 진이 맨 처음, 도현에게 끌렸던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도현은 그렇지 않았다. 눈을 떼면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고, 단단하고… 믿고 싶어지는 느낌이었다.

도현이 가볍게 웃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진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도현을 따라서 웃었다. 이전이라면, 글쎄. 알던 것과 달라진 도현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의 존재가 절실했던 과거의 도현을 그리워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오직 기꺼움뿐이었다. 진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도현이 자라는 동안 진 또한 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이건 잊지 마. 네가 선택한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 난 책임 안 질 거라고.”

“너한테 책임지라고 했다간 다비드한테 혼날걸. 안 그래.”

“그건 그렇네.”

유쾌하게 웃은 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어? 내일? 아니면 모레? 설마 그보다 늦는 건 아니지?”

“아, 맞아. 그거 관련해서 할 말이 있었는데.”

도현은 밀턴과의 일을 차근히 설명했다. 그에게 들킨 경위부터 오간 대화, 그리고 시험 결과까지.

그 모든 걸 들은 진은 입을 떡 벌렸다.

“밴드 일은 걱정하지 마. 같이 할 수 있으니까. 너희 주에 세 번 모인다고 했지? 연습하러 모이는 시간엔 함께할게.”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그래. 중요하지. 중요한데! 왜 이제야 말해준 거야?”

“네가 알면 밀턴 씨의 평가에 사감이 섞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너를 너무 사랑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주먹을 꽉 쥔 채 외치는 말에 도현이 부드러이 얼렀다.

“화내지 마, 진. 시험 끝나자마자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야.”

“…허.”

언제 이런 여우가 됐을까?

진은 기가 차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의 말대로 아빠는 그녀를 너무 사랑하고, 진이 도끼눈을 뜨고 있는 한 객관적인 평가는 어려웠을 테니까.

그래,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섭섭해!’

섭섭했다.

도현은 나를 믿지 못했던 걸까?

모르는 척해 달라 부탁하면 입도 벙긋 안 하고 있었을 텐데. 굳이 나한테까지 꽁꽁 숨겨야 했던 걸까?

진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갈색 눈에 서운함이 일렁였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려 고개를 조금 숙였다. 도현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니까, 서운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진, 이것 좀 봐줄래?”

“이건….”

진은 도현이 내민 종이를 위에서부터 찬찬히 살폈다.

그건 악보였다.

그것도 의 악보.

진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음표를 훑어 내려갔다.

“바이올린 파트를 추가하면서 전체적으로 조금 손봤어. 완성도가 높아서 내가 따로 건들 만한 곳이 많진 않더라.”

괜찮으려나.

급하게 만든 악보라 도현은 별로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해왔던 선율이긴 한데, 악보로 옮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머릿속에 울린 음표를 옮긴 거라 아직 연주해본 적도 없었다.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을 추가한 거야. 가볍게 손본 거라 아직 수정할 부분이 많….”

“너!”

휙! 부릅뜬 눈으로 악보를 읽어 내려가던 진이 바람 소리가 날 것처럼 격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란 동요를 담고 있었다.

“너, 너! 작곡할 줄 알았어?”

“…아.”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작곡이라.

당연히… 할 줄 알았다.

아니면 형이 어떻게 마지막 순간 <노을>을 만들어 냈겠는가. 그의 형은 전문적으로 작곡을 배운 적이 있었다. 평소엔 곡을 만들기보단, 무대에 올릴 곡을 편곡하는 데 썼지만 말이다.

“조금?”

진은 말문이 막혔다.

조금? 이게 조금이라고?

진은 입술을 꾹 물고 시선을 내렸다. 그녀를 경악에 빠트린 악보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음과 음이 조화를 이룬다. 어딘가 아쉽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완벽하게 차올라, 그렇다고 답답하지 않게 적당히는 비워져, 하나의 선율이 되었다.

진은 얼얼한 충격을 느꼈다.

이거였어.

진이 오랫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건 확신이 없어서였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미묘하게 잔류하는 아쉬움. 무언가… 퍼즐 한 조각이 빠진 느낌. 그 한 조각을 찾아내려 애써봤지만, 손에 집히는 건 퍼즐이 아니라 모래 부스러기였다.

그리고 지금.

진은 마지막 조각을 찾았다.

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쓰다듬었다. 그를 보던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마음에 들어?”

“…….”

“진?”

“…흐윽.”

울먹이는 소리에 깜짝 놀란 도현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악보를 소중히 품에 안은 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 죽겠단 얼굴로, 이 감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잔뜩 찡그리고선,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괴상한 표정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정확한 대답이었다.

도현은 기껍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 * *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틱. 재생이 끝난 핸드폰까지 침묵에 동참하자,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쓸데없이 크게 들렸다.

“…이걸, 쟤가 한 거라고?”

다비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쏠렸다. 시선의 주인공인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창고 조명 아래 유난히 흰 얼굴이 그들의 눈에 콕 박혔다.

클라인은 완전히 얼이 나갔고, 캐서린과 조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핸드폰과 도현을 번갈아 보길 반복했다. 다비드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충격에 얼룩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다비드가 말문을 뗐다.

“너 뭐, AI 그런 거야?”

농담인 줄 안 도현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그럼 이게 뭔데? 이게 말이 돼?”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모든 게!”

다비드가 성이 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삿대질까지 하는 그에 도현은 살짝 놀라 눈을 둥글게 떴다.

“연기는 배우라 그렇다 쳐. 그런데 이제는 작곡까지 한다고? 거기다 바이올린도 하고?”

“그게 어때서?”

“그게 어때서-?”

그는 숫제 뒷목을 잡을 기세였다.

도현은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댔다.

내가 H란 건 알고 있던 거 아닌가. 작곡할 줄 안다는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다비드가 들었다면 너의 모든 게 문제라며 소리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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