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Whose H? (13)
도현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진의 가족은 생체 리듬이 도현보다 느린 편이라, 그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과 도현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은 두 시간의 오차가 있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여덟 시. 그 시간 동안 도현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여나 인기척에 누군가 잠에서 깰까 봐서였다. 대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읽었다.
책은 도현에게 세상을, 사람을 보는 창구였다. 그건 병원을 나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주방이 부산스러워진다.
로테가 일어난 것이다.
그즈음에 도현은 책을 정리하고 그녀를 도우러 간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로테의 출근도 배웅한 후에는.
“잠깐 보지.”
“네.”
도현은 자연스럽게 밀턴을 따라 서재에 들어갔다. 밀턴이 소파에 앉으면, 도현은 그에게 자신의 레퍼토리를 보여줬다. 그러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피드백을 주었다. 도현은 밀턴의 도움을 받아 음반에 넣을 곡들을 조금씩 추려가고 있었다.
점심까지 길어질 때도 있고, 금방 끝날 때도 있다. 후자는 보통 밀턴이 바쁜 날이었다. 그러면 도현은 바이올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후론 단순했다. 연습, 연습, 그리고 연습이었다. 중간에 가볍게 점심을 챙겨 먹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
저녁 식사 전, 집으로 돌아갈 때는 부러 둘레길로 가서 진의 집까지 달렸다. 연주자에게는 체력 또한 중요한 요소니까. 그렇게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돌아와 씻고 나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그리고 저녁 여덟 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진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도현과 진은 방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악보를 이리저리 고쳤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면 진은 벌떡 일어나 도현의 손을 끌고 창고로 향했다. 도현은 그곳에서 진이 만족할 만큼 연주를 해줘야 했다.
음악, 음악, 음악.
음악에 파묻힌 생활이었다.
도현은 그게 낯설다, 아니다 느낄 새도 없었다. 눈 감았다 뜨면 저녁이고, 다시 깜빡하면 다음 날이라서 그런 감상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화요일과 목요일, 토요일에 있는 클럽 정규 모임에는 빠질 수 없었다. 도현은 오늘도 제 음반 연습 시간을 줄이고, 모임에 참여한 참이었다.
그게 힘드냐 묻는다면….
아니.
지잉-, 일렉 기타가 강한 진동을 퍼트렸다. 진은 그것을 멘 채로 도현을 불렀다. 그녀의 뒤에는 밴드 멤버들이 저마다의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리 와! 맞춰 보자!”
“응. 갈게.”
도현은 즐거웠다.
“-후아, 힘들다.”
클라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한 시간이나 쉬지 않고 반복해서 연주한 그는 거의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난 더 못 해. 차라리 죽여….”
“그럴까?”
“…너 그거 뭐야? 내려놔!”
진이 슬쩍 든 공구에 클라인이 기겁했다. 진이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으며 공구를 내려놨다. 도현은 식겁한 클라인을 보다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우악.”
도현이 던진 음료수를 받은 클라인이 고맙다고 눈짓한 후 뚜껑을 땄다. 시원한 탄산이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도현, 도현은 안 힘들어요?”
옆에 조르륵 다가온 조니가 물었다. 도현은 이제 익숙하게 그런 조니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조니는 이젠 익숙해진 듯 태연한 표정으로 도현과 눈을 맞췄다.
“응, 난 괜찮아.”
“도현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연기도 잘하는데 바이올린도 잘하고, 작곡도 잘하고, 게다가 체력도 좋잖아요!”
“네가 좋게 봐주는 거겠지.”
“아니에요! 도현이 대단한 거라고요! 그렇죠, 캣?”
“나?”
지목받은 캐서린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토스가 대단하긴 하지. 솔직히 저 정도면 이기적인 수준 아닌가.”
어느새 진에게 물들어 도현을 도리토스라고 부르게 된 캐서린이었다. 도현은 그 별명이 저를 떠날 일은 영영 없으리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말했다.
“난 너희가 더 대단한데.”
“봐, 성격까지 좋잖아. 이기적이라니까?”
캐서린의 말에 다비드가 코웃음을 쳤다.
잠시 후. 그들은 피자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이 다시 연습하자고 말하자, 클라인이 죽는 소리를 내었다. 희게 질린 낯으로 애원하는 클라인은 정말 불쌍해 보여서, 혀를 한 번 찬 진은 휴식을 선언했다.
배고프다는 조니의 의견을 따라 그들은 피자를 주문해놓고 아지트 여기저기 늘어져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Freaky Child는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대화를 나누면 무척 즐거웠다.
피자까지 도착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화기애애해졌다. 다들 어린애는 어린애라서, 맛있는 탄수화물과 지방 앞에서는 속절없이 흐물흐물해졌다.
도현은 행복한 얼굴로 피자를 흡입하는 클라인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그는 이제 완벽히 부활한 거 같았다.
“야, 도리토스. 너 그거 안 먹냐?”
부름에 고개를 돌린 도현은 제 앞의 피자를 응시하는 다비드를 보았다.
“배불러서. 너 먹을래?”
“준다면 먹어주지.”
픽 웃은 도현이 고맙다고 말하자 다비드가 냉큼 피자 조각을 가져갔다. 피클을 우물거리며 그 모습을 보던 진이 말했다.
“완전히 적응했네.”
“그런가?”
“응, 완전.”
그렇게 답한 진은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악보도 사실상 완성했다. 더 고쳐봤자, 취향의 차이일 뿐인 상태였다. 진이 판단하기론 그랬다.
연주도 일정한 궤도에 올랐다.
그건 도현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이 컸다.
진은 도현의 천재성을 익히 알았다. 도현이 원했다면 그는 밴드의 누구보다 튈 수 있었다. 튀었다 뿐이야? 이걸 자기 곡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걸. 진이 아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충분히 그런 일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 이건 밴드 곡이잖아?
그리 말한 도현은 제 존재를 죽이고 밴드와 어우러지는 걸 택했다.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착하기는.’
그녀의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태도를 보이는 도현에게 미안하면서도, 몹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진은 씩 웃고는 말했다.
“슬슬 비디오도 찍어야 하는데.”
“!”
그녀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창고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특히 캐서린의 반응이 극적이었다.
“진짜? 이제 하는 거야?”
“당장은 아니고. 다음 주 토요일에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부터 찍으려는데…. 저녁에 스튜디오 빌려서 녹음도 하고. 어때?”
그들이 계획한 뮤직비디오는 창고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모습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적절히 번갈아 가면서 등장했다. 진은 거기서 쓰일, 밴드의 연주 영상을 다음 주에 찍자고 말하고 있었다.
“좋아! 난 찬성!”
클라인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다음에 조니와 캐서린도 줄줄이 좋다고 했다. 다비드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진이 하자면 해야지.”
진지하게 말하는 다비드에 아이들의 눈이 조금 식었다. 오늘 치 커플 염장을 떤 다비드는 ‘우웩’ 하는 조니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조니가 조용해졌다.
“도리, 넌?”
도현은 제 일정을 생각해 보았다.
다음 주 토요일.
도현은 다음 주에 레코딩 스튜디오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고른 건 아니지만, 일주일간 밀턴과 함께 적당히 후보는 추려 놓았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화요일이었지.’
고맙게도 밀턴이 도현을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당장 녹음하러 가는 건 아니고.
- 녹음할 스튜디오는 미리 봐 두는 게 좋지. 필 보게스 프로듀서는 네 레퍼토리를 고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리고 소개해줄 사람도 있고.
그의 음반을 맡아 줄 프로듀서와 인사도 나누고, 스튜디오의 울림이 어떤지 확인도 하고, 어떤 식으로 제작할지 의견도 나누고. 녹음 말고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소개해줄 사람은 누굴까.’
밀턴은 테스트 날 했던 위험한 발언과 달리 도현에게 퍽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런 그이니 스튜디오에 도착했더니 어느 일보 기자가 있거나, 어느 대학 교수가 있거나 하진 않을 거다.
…않겠지?
도현의 믿음이 흔들렸다.
“도리?”
“아, 응.”
도현은 그를 부르는 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현이 침묵에 빠진 사이 아이들은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어색한 웃음으로 수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괜찮을 거 같아.”
“그 영상 나중에 통째로 올리기도 할 거라서 잘 찍어야 해. 물론 도리 너는 별로 걱정은 안 되는데…. 그래도 연습을 조금 더 하면 좋겠거든. 다음 주에는 매일 모일까 하는데, 가능해?”
매일이라고? 도현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그건 좀. 그… 개인적인 일 때문에. 사실 다음 주 화요일에도 못 할 것 같아서 말하려고 했거든.”
개인적인 일이란 말에 조니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지만, 도현은 말해줄 수 없었다.
“그래?”
“응, 그래도 수요일부터는 다 참여할 수 있어.”
조금 죽어 나가는 것뿐이다.
“정말? 괜찮아?”
“그 정도는 괜찮아.”
도현은 티 내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던 진은 곧 방긋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다.”
그렇게 일정이 잡혔다.
밴드 모임이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창고를 빠져나왔다. 클라인, 조니, 캐서린을 배웅했을 때였다.
“야.”
다비드가 도현을 불렀다.
“개인적인 일이 그거냐? 그, H인가 뭔가.”
“응, 맞아.”
미국에 온 이유도 H 음반 때문인 걸 알고 있는 다비드에게 거짓말을 해봤자 씨알도 안 통할 걸 알았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다비드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첫 번째 우선순위가 그거고, 두 번째가 밴드?”
도현은 다비드가 그를 불러 세운 이유를 깨달았다.
“너한테는 두 번째일지 몰라도 다른 애들한테는 첫 번째야.”
“너한테도?”
“말이라고 해?”
단순히 진이 좋아서 함께하는 줄 알았는데. 다비드 본인도 이 밴드에 애착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현은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둘 다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니까.”
“…지켜본다.”
“그러든지.”
정말로 밴드를 가볍게 본 적 없는 도현은 태연히 답했다. 다비드는 그런 도현을 훑어보다가, ‘뭐, 그래. 네가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중얼거렸다.
아주 작게 말해서 못 들을 줄 알았나 본데, 도현은 귀가 무척 좋았다. 그의 말을 들은 도현은 웃음을 삼켰다.
다비드가 진과 함께 산책하러 사라지고, 홀로 남은 도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 진 하늘이 붉게 일렁였다. 깊게 숨을 들이켠 도현은 한 발짝 내밀었다.
할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