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00화 (501/582)

제500화. Whose H? (14)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헨리 씨.”

두 사람은 짧게 악수했다.

스테파노스 미너르와 헨리 루빈스타인은 인연이 있었다. 스테파노스가 헨리의 음반 작업을 도와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벌써 육 년 전의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다시 인연이 닿아 기쁜 일이죠.”

스테파노스의 대답에 헨리가 말했다.

“절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어떻게 그 라벨을 잊겠습니까.”

<라벨>. 그건 헨리의 두 번째 음반이자, 헨리 루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콩쿠르의 우승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단단히 새긴 음반이었다.

“영광이군요.”

“하하, 저야말로. 그나저나 밀턴이 말한 사람이 헨리 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종소리에 밀턴과 그가 말한 그 비밀스러운 ‘H’가 왔나 했던 스테파노스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방문에 무척 놀랐다. 그리고 헨리의 방문 목적 또한 ‘H’의 음반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참관할 사람이 한 명 올 거란 말은 전해 듣긴 했다. 하지만 그게 설마하니 ‘그’ 헨리 루빈스타인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헨리 루빈스타인.

젊은 피아니스트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그 세련된 연주와 풍부한 감성으로 수많은 팬을 보유한, 그야말로 스타 연주자가 아닌가?

“밀턴과는 인연이 있어서요. 그가 과거에 저를 여러 번 도와줬죠. 좋은 친구기도 하고요. 흠, 마침 휴식기였다는 점도 빠트릴 순 없겠네요.”

밀턴이 평론 외에 가장 주력하는 활동은 인재 발굴 및 양성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았겠거니 이해한 스테파노스가 고개를 주억였다.

“재밌는 인연이군요. 자, 편하게 앉으세요. 마실 건 커피가 좋습니까? 아니면 차?”

“카페인에 예민한 편이라, 차로 부탁드리죠.”

“마침 딱 좋은 게 있습니다.”

스테파노스는 스튜디오 안, 메인컨트롤 룸에 있는 응접실로 헨리를 안내했다. 헨리가 소파에 앉는 사이 스테파노스가 차를 우렸다. 상쾌한 페퍼민트 향이 응접실 안에 퍼졌다.

차가 주전자 안에서 우려지는 사이, 스테파노스가 헨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헨리 씨는 H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프로듀서도 모르나 보군요.”

오고 간 질문과 대답에 두 사람은 서로가 H의 정체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헨리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참 비밀스러운 사람이네요.”

스테파노스는 그 말에 동의했다.

어찌나 꽁꽁 숨기는지. 그 영화가 나온 지 벌써 몇 년 가까이 지났건만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H의 녹음 건으로 모이는 오늘까지도 두 사람은 H가 누군지 몰랐다.

헨리가 오늘 약속 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숨기나 궁금해서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개인적으로 헨리는 다닐 만나리노라는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를 유력하게 보고 있었다.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풍부한 표현력과 결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재밌는 일이죠. 아직도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다니. 얼마나 비밀스러웠으면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이 연주자라는 말까지 돌았을까요.”

스테파노스의 말에 헨리가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들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죠.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가 실은 바이올린 천재였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이에요.”

기삿거리만 된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는 기자들이 한 트럭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 가십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 화제를 금방 잊었다.

이후,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소리와 간간 이어지는 대화가 응접실 안을 채웠다.

그렇게 오후 한 시가 되기 십 분 전.

밖에서부터 들리는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에 스테파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도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왔나 보군요.”

스테파노스의 말에 헨리는 입 안에 잔류한 상쾌한 페퍼민트 향을 느끼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바깥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로비에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퍼지자 스테파노스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스테파노스!”

밀턴이 반가운 낯으로 스테파노스를 반겼다. 그와 짧게 포옹한 스테파노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연주자는?”

진심으로 의아해 보이는 모습에 밀턴이 웃음을 삼켰다.

“여기 있지 않나?”

“여기 있다고?”

스테파노스는 어리둥절했다.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밀턴이 이런 일로 사람을 가지고 놀 인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스테파노스 본인과 헨리, 그리고 밀턴을 제외하면….

스테파노스의 시선이 아까부터 밀턴의 옆에 멀거니 서 있던 소년에게로 닿았다. 딱 봐도 열두엇 정도 되었을까.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동양인 소년이 포크 드는 데나 썼을 거 같은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스테파노스는 그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다만, 외계인이 영어로 말하는 걸 본 사람처럼 괴이쩍은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도현은 그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도현 리입니다. 리보다는 도현이라고 불러주시는 편을 좋아해요. 발음이 어렵다면 H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그 말은 마치 확인 사살과 가까웠다.

…정말이라고?

정말 저 열두엇 되었을까 한 소년이, 그 H라고?

일단 공중에 떠 있는 흰 손을 계속 외면할 수는 없던 스테파노스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손아귀 힘을 풀지 않은 채로 물었다.

“…몇 살이지?”

“열셋이요.”

“오, 신이시여.”

생각했던 것보다 한 살 더 많았지만, 그건 스테파노스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열셋! 고작 열셋이라고!

H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도현의 나이를 계산해낸 스테파노스는 더욱 황당해졌다. 그는 보기만 해도 머릿속이 아파지는 원인에게서 시선을 떼곤 그 옆을 쳐다보았다.

“밀턴, 이 친구야. 지금 이 애가 여덟 살에 그런 연주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밀턴은 즐거이 말했다. 어찌 즐겁지 않을까? 그 혼자만 이 존재를 알고 산 게 몇 년이었다. 몇 년간 말하고 싶어도 어디에 말도 못 하고 혼자 알았다. 그 답답함을 누가 이해할쏘냐.

생맥주를 원샷한 것처럼 속이 시원해진 밀턴과 달리 스테파노스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가 얼이 나가버림에 따라 도현의 손을 잡고 있던 힘도 스르르 풀렸다.

그때, 응접실 뒤편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을 향했다. 도현은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앞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훤칠한 남자의 등장에 밀턴이 반가워했다.

“헨리! 먼저 와 있었군, 그래.”

“오랜만이에요, 밀턴. 그리고….”

헨리의 눈이 도현에게 닿았다.

스테파노스는 소년의 앳된 외양에 놀라 알아보지 못했지만, 뒤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헨리는 알아챘다. 지금 자신이 H라고 말하고 있는 아이는 헨리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쪽은 영화배우 같은데.”

“제 작품을 보셨나요?”

“를 말하는 거라면 물론, 당연히 봤지. 그리고 도 본 적이 있어. 조금 오래전이지만.”

도현이 수긍했다.

“그게 오래되긴 했죠.”

헨리는 살짝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래서 정말 네가 H라는 거야? 그게 연기가 아니라 진짜 연주였다고?”

헨리의 질문에 스테파노스도 집중했다. 도현은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한번 옆을 돌아보았다. 밀턴이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생각했다. 이미 되돌릴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인 도현은 밀턴을, 밀턴이 소개한 이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영화에서 유가 한 연주 중에 대리는 없었어요. 전부 저였죠.”

시원하게 나온 인정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 오묘한 침묵이 깨진 건 헨리가 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하, 이래서 숨겼나.”

그는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기분. 불가능하다 단정 지었던 게 실현된 기분이 이러할까.

헨리는 자기 자신을 무척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순간, 착각이었다는 듯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가 튀어나왔다.

어이없으면서도 유쾌했다. 그는 새로운 영감은 언제나 환영하는 인물이었으니. 그런 이이기 때문에 밀턴이 연락한 상대였으니. 결국엔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이거 재밌는 일에 낀 기분이네.”

정체불명의 연주자 H,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한참 떠오르는 유망한 배우. 둘이 동일인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 애가 이렇게 몰래 음반을 내리라고는?

헨리의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마치 비밀 작전에 낀 기분이었다. 이 나이 먹고 친구들과 옆 동네를 모험하던 기분을 다시 느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헨리가 새로운 자극에 한껏 들뜬 사이, 스테파노스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한 차례 현실 부정을 마치고 수용 단계에 들어선 참이었다.

“…손님을 너무 세워뒀군. 안으로 들어와. 앉아서 얘기하지.”

아까보다 조금 진정된 기색의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밀턴과 도현은 서로를 한번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두꺼운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둔 도현은 적당한 두께의 검은 카디건을 걸친 채였다. 도현이 찻잔을 들어 올리자 소매가 흘러내리며 흰 팔목이 드러났다.

교육을 잘 받았는지 차를 마시는 동작은 무척 깔끔하고 조용했다. 언뜻 품위까지 느껴졌으나, 그런 단정함에도 얼굴에 붙은 앳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스테파노스는 착잡하게 생각했다.

‘설마 그 가십이 진짜였을 줄은.’

방금까지 가십에 눈이 먼 기자들을 비웃었건만, 그게 진실이었다는 증거가 눈앞에 떡하니 있다. 복잡한 마음을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이제 스테파노스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후였다. 밀턴이 여기까지 와서, 헨리 루빈스타인까지 불러 놓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평론가에서 사기꾼으로 전직한 게 아닌 이상에야.

하지만 인정한 것과 별개로 앳된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면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스테파노스의 상식에서 여덟 살의, 그것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가, 그런 연주를 해내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이해하기 어렵다며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테파노스는 자신의 이해를 잠시 미뤄두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고르다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떤 스승에게 사사 받고 있지?”

그런 실력이라면 누군가 정성 들여 키운 게 틀림없었다. 분명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들여서 키워냈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쳐주신 분은 없어요.”

“얘야, 거짓말은 좋지 않단다. 네가 누구에게서 배웠든, 네 대단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야.”

스테파노스는 도현이 치기 어린 마음에 하는 말인 줄 알고 타일렀다. 그 나이대 애들은 무릇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법이니.

스테파노스가 모르는 게 있다면, 도현은 치기에 눈이 멀어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도현은 사실을 말했음에도 믿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스테파노스는 그걸 다르게 해석했다.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냐?”

본인의 정체도 숨겼으니 스승의 정체도 숨길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도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알려준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형의 기억과 경험으로 배웠으니, 그를 스승으로 칭해도 부족함은 없을 터. 그러나 형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스테파노스가 만들어준 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네, 조금 곤란하네요.”

“아쉽구나.”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도현은 자신도 말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밀턴만 그 촌극에 어이없어했을 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