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1화. Whose H? (15)
밀턴의 심정이 어찌하든,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소년의 낯과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는 스테파노스의 상상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럼 정체를 숨긴 이유도….’
그의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은퇴한 거장 밑에서 사사하는 천재 소년. 그런 소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 천재성이 세상의 관심 속에서 일찍 져 버릴 걸 걱정한 스승….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이 각광받는 시대다.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앎에도, 검은 카디건에 대비되어 더욱 창백해 보이는 손목 따위를 보고 있다 보면 저 소년이 겪었을 이런저런 사연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스테파노스가 침묵에 잠기자 도현은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리를 꼬고 앉은 젊은 남자와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밀턴 씨. 제가 저분을 아직 소개받지 못한 거 같은데요.”
대화는 나누었지만, 정식으로 소개받지는 못했다.
“아, 이런.”
밀턴이 짧게 탄식한 후 말했다.
“경황이 없어서 소개도 깜빡해 버렸어. 헨리, 들었다시피 이쪽은 내가 말한 H. 영화배우기도 하지만 오늘은 연주자로서 온 거니 그렇게 봐주면 좋겠군. 그리고 도현, 여긴 헨리 루빈스타인. 내 친우이자, 대단한 피아니스트지.”
“반가워요, 루빈스타인.”
“헨리라고 불러.”
꼰 다리를 푼 헨리가 몸을 살짝 일으켜 도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짧은 악수 이후, 도현이 자연스레 손을 내리려던 때였다.
헨리가 늘어져 있던 도현의 왼 손목을 덥썩 쥐고 뒤집었다.
응접실의 조명 아래서 도현의 손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현을 수없이 짚은 손가락 끝엔 피부가 터지고 다시 아물기를 반복한 자국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익숙한, 연주자의 손이었다.
헨리가 도현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가볍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네.”
H가 이렇게 어린 소년, 그것도 영화의 주인공이었단 진실은 확실히 유쾌했다. 그것만으로 밀턴의 부탁을 받아들여 스튜디오에 온 보람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헨리는 이 소년의 취미 생활을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장 직관적인 것을 확인했다.
도현은 제 손을 추스르며 말했다.
“제 직업이 배우이긴 하지만 바이올린을 가볍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너무 무거워서 문제지.
그런 말까지 이들 앞에서 할 필요는 없으므로 도현은 뒷말을 삼켰다.
“그럼 헨리 씨는 제 반주자로 오신 건가요?”
“그런 부탁을 받긴 했어.”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정확해.”
헨리가 웃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 지금까진 무척 마음에 드니까. 개인적으로 너를 숨긴 판단도 현명했다고 생각하거든.”
음악이란 무엇보다 순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런 순수성은 때론 독이 되었다. 여덟 살의 소년. 그것도 동양인인 데다가 배우이기도 한 연주자? 고지식한 양반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
물론 연주의 수준이 있으니 함부로 평가 절하 하지는 못했겠지. 다만 장담하건대, 지금의 평가와는 많이 달랐을 거다. 멀쩡한 귀를 달고도 눈과 이성으로 음악을 듣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순수성에 대한 강박은 고질병이다. 그걸 피하고자 한 거라면, 헨리는 일어나서 저 레지스탕스를 향해 박수를 보낼 생각도 있었다.
“…….”
도현은 직감했다. 무언가 대단한 오해가 피어나는 중임을.
아까부터 대단히 가련한 것을 보는 듯한 스테파노스도 그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헨리도 그랬다.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걸까? 의문이 일었지만, 묻진 않았다. 긁어 부스럼 만들 생각은 없었다. 도현은 떨떠름함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말하고 보니 조금 늦었단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자세를 바로 한 채 스테파노스와 헨리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두 분 다, 제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이 인사가 제일 먼저였는데 늦어버렸네요.”
저 두 사람은 밀턴에게 H의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온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도현의 감사 인사를 받을 이유가 있다.
“밀턴 씨도요. 두 분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밀턴이 도현에게 준 도움은 가볍지 않았다. 도현은 자신이 진의 친구란 이유로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쥐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시험을 치렀다 하나, 그 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 중간 다리를 놓아준 것뿐이란다. 저들을 설득하는 건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지.”
“그럴 생각이었어요.”
스테파노스는 먼저 어떤 레퍼토리를 생각 중인지 회의를 할 생각이었다. 도현이 레퍼토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걸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혹시 밀턴에게서 어떤 후보가 있는지 들었나요?”
“방대하더군. 정말 그걸 다 연주할 수 있다면 고르기 어려워하는 게 이해될 정도로 말이야.”
정체를 숨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라 생각했을 때도 그 방대한 레퍼토리에 놀랐건만, 도현의 나이까지 알게 된 지금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그 곡들을 전부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게 맞나?
H의 천재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게 여덟 살 때 한 연주임을 안 이상, 언급하는 건 입 아픈 행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여도 고작 열셋이었다. 바이올린을 쥘 수 있는 나이부터 연주만 해왔다고 해도 말이 될까, 말까인데, 상대는 심지어 할리우드 배우였다.
의심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레퍼토리에 넣을 곡을 하나 골랐거든요. 괜찮다면 들어보시겠어요?”
“지금 말이냐?”
“네.”
“난 괜찮다만….”
시선을 받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도현을 본 스테파노스가 물었다.
“무슨 곡이지?”
도현이 곡명을 말하자 스테파노스와 헨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그걸로 하겠다고?”
“네.”
스테파노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밀턴을 보았다. 그 노골적인 눈빛에도 밀턴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였다.
스테파노스가 한숨을 삼켰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자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구나.”
주세페 타르티니, 바이올린 소나타 사단조.
더 유명한 이름으로는 <악마의 트릴 Les trilles du diable>.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주세페 타르티니의 대표곡과도 같은 이 곡은 수많은 거장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그만큼 명반도 많았다.
가장 대단한 음반을 꼽으라면 1956년에 만들어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녹음과 1959년, 나탄 밀스타인의 녹음이 있었다.
그 외에도 이 곡에 도전한 연주자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호평받은 건 아니다.
악마의 트릴이라는 부제처럼 악마 같은 트릴이 등장하는 이 기교 곡은 자칫하면 너무 과장되거나 형편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조차 어려워하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린다고 들을 얼굴이 아니군.’
스테파노스는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수없이 많은 연주자의 음반을 만들어냈다. 저런 표정을 한 연주자가 가지는 고집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미 없는 말씨름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답은 말이 아니라 연주에 있었다.
“좋아, 그걸 고른 이유가 있겠지. 연주는 저 부스에 들어가서 하면 돼. 따로 신호 없이, 네가 준비되었을 때 시작하도록 하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옆에 걸쳐 두었던 바이올린 가방을 들고 부스에 들어갔다. 도현이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소리를 확인하는 사이, 스테파노스는 메인 컨트롤 룸의 시스템 앞에 앉았다. 헨리와 밀턴은 그 주변에 섰다.
“바이올린이….”
부스에 설치된 마이크를 확인하던 스테파노스가 도현이 꺼낸 악기를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은퇴한 거장 스승’이라는 설정에 무게감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좋은 걸 쓰는군요.”
저걸 단순히 ‘좋은 거’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은 거기야 하겠지만…. 헨리의 말에 스테파노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도현은 현 하나를 길게 긋고 눈을 감았다. 공기의 파동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울림이 어느 정도로 퍼지는지, 어디까지 나아가다가 막히는지, 귀로, 피부로, 감각으로 느낀 도현은 도로 눈을 떴다.
한 손으로는 바이올린을 들고 한 손으로는 활을 든다. 살짝 기울어진 턱은 너무 낮지 않게 위로 들려 있었고, 반대로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살짝 힘이 들어간 눈썹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
부스 너머, 컨트롤 룸에 있는 이들도 조용해졌다. 그들은 각자의 기대와 염려를 담아 소년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도현이 활을 그었다.
주세페 타르티니.
Giuseppe Tartini.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예술 전당에 비발디와 함께 높이 내걸리는 악성.
타르티니는 1713년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속에서 그는 악마를 만나 영혼을 대가로 계약을 맺었다. 그의 시종이 된 악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악마의 음악이 궁금해진 타르티니는 악마에게 바이올린을 건네며 연주해볼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연주는 그가 평생토록 꿈꿔 왔거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러한 음악이었다. 순간 황홀경에 잠긴 타르티니는 그 충격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즉시 그가 들은 것을 악보에 옮겼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가장 훌륭한 소나타, <악마의 트릴>이었다.
그러나 타르티니는 이 걸작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고 한다. 내가 들었던 것보다 너무 열등하여, 다른 일을 하고 살 수만 있다면 바이올린을 부러트리고 영원토록 음악을 버렸으리라고.
“…….”
소년의 손에서 제1악장, Adagio non troppo presto가 펼쳐진다.
서정감 넘치는 선율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음울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무겁게 발밑을 맴도는 것 같다가도 바로 귀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마치 꿈속에 찾아온 악마처럼….
무거우면서도 단아하게 절제된 연주가 잡힐 듯, 잡히지 않게 그들을 이끌었다.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인 스테파노스는 생각했다.
지금 이 연주를 듣는 이라면,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내걸면서까지 붙잡은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