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2화. Whose H? (16)
4악장으로 구성된 악마의 트릴 중 1악장은 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혼곤하게 잠이 든 타르티니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 걸쳐 있다가 결국 비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몽환적인 선율에 스테파노스는 그저 도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곳에서 만날 존재가 악마임을 앎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들은 저마다 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타르티니의 음악이 가진 가장 특별한 색은 파토스이다.
파토스.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고통과 슬픔, 비애와 같은 감정에 깊이 호소하는 것.
이는 베토벤 이후 낭만 시대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타르티니는 그 이전인 바로크 시대부터 이미 청중의 감정을 건드리는 음악을 하였다.
그리고 저 어린 소년은 그 파토스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청중을 자극하는지, 그 깊은 내면에 호소하는지. 놀랍게도 그것을 이해하고 연주로 승화하고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소리 없이 경악하던 중 무언가를 떠올렸다.
달빛.
그래, 그랬다. 그때도 소년은 그랬다. 그때도 영화를 보던 이들의 감정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었다.
그것이 육 년이 흐른 지금, 더욱 찬란히 개화한 것이다.
“…….”
3분여간의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으로 넘어가는 순간, 완벽하게 가라앉았던 연주가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고요한 애수에 젖었던 1악장과 달리 단번에 쏟아지는 연주는 이제 그 누구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을 아는 것처럼 힘차고 정열적이었다.
인간을 완전히 제 영역에 붙들어 놓은 악마가 유혹한다. 영혼을 주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겠다고. 너의 시종이 되어 네 모든 욕망을 들어주겠노라고.
단지, 지금 당장 그러겠노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아, 저 유혹을 어떻게 거부할까?
욕망에 흔들리는 인간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풍자적인 트릴이 이어졌다. 악마의 비웃음에도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버린 인간은 손을 뻗었다.
악마의 트릴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2악장과 3악장이 이어져 있어 실제로는 3악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중 1악장이 꿈의 시작, 2악장이 악마의 유혹이었다면, 3악장은 악마의 연주였다.
마지막 악장에 들어선 바이올린이 7마디의 유려한 선율을 읊조린다.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넘나드는 도현에 스테파노스는 감탄했다.
이미 이 연주를 한 차례 들어본 적 있던 밀턴 또한 충격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 고작 며칠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도현은 또다시 한 단계 나아가 있었다.
저 아이에게 한계란 게 존재할까?
문득, 밀턴은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티니의 꿈에 나왔던 악마가 현실에 존재했다면, 저러한 모습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리고.
스타카토가 날카롭게 튀겼다.
“……!”
급격하게 빠르고 격렬한 패시지로 돌입하며, 3화음 더블 스톱이 현을 거칠게 긁어내린다. 단숨에 고조되어 가는 연주에 뒷덜미가 쭈뼛 섰다.
스테파노스는 축축해진 손을 말아 쥐었다. 컨트롤 룸에서는 이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낮은 음역에서 휘몰아친 연주가 잠시 잦아들 무렵.
악마의 트릴이 등장했다.
더블 스톱과 트릴이 얽히고 엮이며 몰아친다. 이미 말도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았던 연주가 한층 더 경이로운 경지로 뛰어오른다. 그것을 귀로 잡아내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악마는 제 음악을 탐낸 인간을 조롱하듯, 쾌활히 연주를 이어갔다. 그가 평생토록 따라오지 못할 연주를, 꿈에서 깨어나도 결코 닿지 못할 연주를, 결국 평생 갈증에 시달리게 할 연주를.
“…….”
스테파노스는 이제 도현의 선곡을 완벽히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 곡을 넣지 않겠다고 하면 짐을 싸 들고 따라다니며 말리고 싶은 심정이니.
그의 머리는 이미 이것이 제대로 녹음되고 있는지에 대한 걱정으로 물들었다.
이 섬세한 음이, 표현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담기고 있는지 당장 확인하고 싶었으나 아직 연주가 남았다. 스테파노스는 고민은 뒤로 밀어놓고 이어질 카덴차를 기대했다.
도현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타르티니가 지시한 2마디의 카덴차. 그 안에 도현은 모든 역량을 쏟아 넣었다. 강렬하고 화려한 피날레가 그들을 뒤흔든다.
그 경이로운 실력에 스테파노스는 넋을 잃었다. 악마에게 혼이 빼앗긴 인간처럼. 영혼마저 사로잡힌 인간은 점점 멀어지는 악마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애초에 붙잡을 수 없던 욕망이었다는 듯이 잿빛 안개가 손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카덴차는 아다지오로 전환되며 풍부한 울림을 남긴 채 잦아들었다. 깊은 선율이 여운을 남기듯 주변을 맴돌다, 완전히 사라졌다.
믿지 못할 연주를 해낸 소년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부스 안에 있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와 바깥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스테파노스는 저도 모르게 악마란 단어를 떠올렸다.
스르르. 도현이 바이올린을 내렸다.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던 카디건 소매도 몸짓에 따라 팔목을 덮으며 내려왔다.
“…이건, 이대로 담죠.”
“네?”
스테파노스의 말에 도현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이 곡으로 하자는 게 아니라 이대로 담자고?
“녹음은 다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러 번 한다고 해서 꼭 더 좋은 연주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연주한 게 제일 괜찮은 경우가 더 많죠.”
열 번, 스무 번, 그 이상 녹음을 반복하고, 결국엔 첫 번째 녹음본을 고르는 케이스는 꽤 흔했다.
“하지만 반주도 없었고….”
“이걸 첫 번째 순서로 넣을 생각이었죠?”
“아, 네.”
도현이 어떻게 알았느냐란 얼굴로 스테파노스를 보았다.
스테파노스는 유쾌히 웃었다.
안 게 아니었다. 그보단 이 곡이 들어갈 자리가 거기밖에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첫 곡은 반주 없이 H의 연주만 들어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도현은 헨리를 보았다.
헨리가 반주를 맡아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도현의 예비 반주자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건 맞으니까. 그의 의견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도현의 시선을 받은 헨리가 입술을 뗐다.
“날 쳐다볼 필요 없어. 나도 프로듀서와 같은 생각이니까. 방금 그 연주는… 내가 딱히 들어갈 곳이 없더군.”
말하면서도 놀라웠다.
헨리는 이 연주를 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반주로 인해 연주의 격을 낮추지 않고, 풍부하게 만들 자신이 존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연주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헨리가 턱을 쓸었다.
‘자존심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작 열셋의 소년의 연주에 압도되어, 그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할 자신이 없다니.
물론 헨리는 무척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기도 했다.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현의 수준을 뛰어넘어 더 나은 연주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연주자는 주어진 시간 내로 최고의 연주를 무대에 올려야 하는 존재였다. 헨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달 남짓한 시간 안에 그러한 수준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만큼 도현의 연주는 완성도 있었다.
한편 도현은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날치기로 해도 되는 건가?’
물론 방금 연주가 마음에 들었냐, 아니냐 묻는다면 전자긴 했다. 그가 생각해도 근래에 했던 연주 중에서 제일 괜찮았다. 아마도, 청중 앞에서 H로서 연주한다는 게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밀턴 앞에서 연주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에게 도현은 완벽한 H가 아닌 진의 친구기도 했으니까. 이번 연주는 도현에게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도현은 일단 부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를 잡아먹을 듯이 보는 세 쌍의 눈에 도현이 멈칫했다.
이상한 대치가 이어졌다.
스테파노스는 제 시선에 도현이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걸 알았지만,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부스 안에서는 그나마 거리감 있던 소년이 눈앞에 들이닥치자, 비현실적인 감각이 더욱 밀려온 것이다.
저 애가 그런 연주를 했다고.
“밀턴.”
“음?”
“내 쪽에서 고맙단 말을 해야 할 것 같네. 덕분에 이런 연주자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었어.”
연주자가 최고의 연주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듯이, 프로듀서는 최고의 연주를 담아내고 싶은 욕구가 존재했다. 그것이 실력 있는 연주자의 첫 번째 음반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스테파노스는 이전까지는 도현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밀턴이라는 거물을 안 덕분에 그런 이상한 조건으로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운이 좋은 건 도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스테파노스 미너르입니다.”
스테파노스는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전에 도현이 내민 손을 가까스로 잡아 흔들었던 것과 달리 굳건히 내민 손이었다.
스테파노스는 눈앞의 소년이 지인의 부탁으로 도와주기로 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가 맡아 성심껏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연주자임을 인정했다.
이 연주자는 존중받아 마땅했다.
도현은 물끄러미 그 손을 보다가 마주 잡았다. 허공에서 두 손이 짧게 흔들렸다.
그들은 다시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아까와 같은 풍경이었으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 후였다.
세 사람은 도현을 열렬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든 ‘네가?’ 하는 의심 어린 눈을 하던 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자리에서 사실 손을 대지 않고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안다고 해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일 기세였다.
‘…인정받은 거 같긴 한데.’
너무 변화가 극렬하니 적응하기 어려웠다.
도현은 스테파노스가 다시 따뜻하게 우려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까 마셨던 페퍼민트가 아닌 캐모마일의 부드러운 향이 그의 긴장된 몸을 녹였다.
“아까 너무 흥분해서 말하긴 했지만, 원한다면 재녹음해도 됩니다. 하지만 재녹음 시기는 다른 곡들을 모두 녹음한 후가 좋겠군요.”
“…….”
“모든 녹음을 끝낸 후에, 그때도 다시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재녹음하죠.”
도현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스테파노스를 보았다. 그는 뭔가를 느낀 걸까? 내가 이 곡에 무엇을 담고 싶어 했는지, 무엇을 위해 음반을 만들려고 한 건지?
타르티니, 악마의 트릴.
그 곡을 들었을 때, 도현은 생각했다. 영혼을 대가로 원하는 걸 내어주었다면, 평생토록 바라고 갈망했던 걸 내어주었다면, 그렇다면 그는 악마가 아니라 신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도현은 음반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기록하기로 했다.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나를.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만들어낸 기록을.
혹자는 악마의 트릴이 루시퍼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한다. 천사였다가 타락한 악마. 추방당하여 방황하는 악마. 그 증오와 고통을, 부러움과 시기를, 음울함과 슬픔을….
타르티니가 정말 악마를 만났는지, 아니면 단순히 정신 착란이 일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존재가 타르티니의 말처럼 악마였는지, 혹은 계시를 내리러 온 신이었는지, 아니면 타락한 천사였는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도현의 삶이 그러했다.
형은 도현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도현은 때론 그를 존경하고 경애하며, 때론 원망하고 증오하며, 때론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도현은 이 곡을 선택했다.
도현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노란빛 수색 위로 어렴풋이 비친 소년의 형체가 이지러졌다.
“…네, 그게 좋겠어요.”
그저 그뿐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