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화. Whose H? (17)
헨리는 이 상황이 무척 신기했다.
실상 이 스튜디오에 도착한 이후로 그는 계속 그랬다.
누군들 안 그럴까?
H의 정체가 어린 소년인 데다가 유망한 할리우드 스타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 그 천재성이 전혀 녹슬지 않고 오히려 첨예하고 갈고닦아진 것까지 확인했는데.
비밀 유지 조항을 깨고 어디 가서 나불거린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헨리는 시선을 내려 도현이 정리한 작곡가 목록을 보았다. 레퍼토리를 위한 회의를 시작하면서 도현이 꺼낸 파일이었다. 거기엔 모두가 알 법한 대중적인 이름부터 그조차 처음 들어보는 이름까지 존재했다.
헨리는 또다시 의문에 젖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작곡가를 섭렵한 걸까?
아니, 나이를 댈 필요도 없다. 이건 그냥 헨리가 아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비교해도 풍부한 레퍼토리였다.
“…….”
말이 되나?
문득, 단순한 경악을 넘어서 이 모든 게 너무나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재는 범인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기에 천재다. 하지만 헨리 또한 천재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그런 헨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독한 현실감이 오히려 비현실감을 불러왔다. 그 사이에서 헨리가 이상함을 서서히 깨닫고 있을 때였다.
손가락 사이로 펜을 굴리던 스테파노스가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바흐도 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데….”
“바흐는 안 돼요.”
도현이 단호히 잘라 말했다.
회의 시작 초반, 도현이 그들에게 말한 것은 연주할 수 있는 곡뿐만이 아니었다. 연주할 수 없는 곡도 밝혔다.
그리고 바흐가 그랬다.
바흐도, 생상스도, 파가니니도 그랬다.
“그건 담지 않기로 했어요. 아직은 제가 연주할 수 없는 곡이기도 하고요.”
그걸 연주하면 도현은 ‘도현’의 연주가 아닌, ‘정희성’의 연주를 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형의 색이 짙게 물들어 있는 곡들은 이 음반에 넣을 수 없었다.
물론 색뿐만은 아니었다.
그 곡들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너무 잘 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그걸 따라갈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아니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요.”
스테파노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저 연주자가 정말 연주할 줄 몰라서 저리 말한 건 아닐 테다.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연주자 본인이 할 수 없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럼 다음 곡은….”
스테파노스가 태블릿을 옆으로 넘겨 다른 곡을 들어보려던 때였다. 도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망설이는 눈치에 스테파노스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
“사실 반주자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해서.”
도현의 시선이 작곡가 일람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은 이해했다. 저기 적힌 곡들이, 오로지 혼자 녹음할 경우를 상정하고 작성된 목록임을.
“헨리 씨.”
호명 당한 헨리가 눈을 깜빡였다.
“염치 불고하고 물을게요. 제 반주를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오.”
“물론 헨리 씨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란 거 알아요. 하지만 제게는 실력 있는 반주자가 무척 귀한 존재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도현이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 해도 헨리가 도현을 도와 이득 볼 일은 없었다. 그는 이미 최정상에 선 피아니스트였고, 도현은 연주자로서 경력이라곤 영화에 삽입된 연주가 전부였으니.
콩쿠르 실적도, 연주회도 가져본 적 없는 도현에게 헨리 루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솔직히… 과분했다. 이런 기회를 이렇게 냉큼 가져도 되는지 의아할 정도로.
진지한 눈빛을 받은 헨리가 턱을 문질렀다.
“내가 아직 대답을 안 했던가?”
“네.”
정신이 없긴 했나 보네.
짧게 중얼거린 헨리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반주는 물론, 맡아줄 수 있어. 나도 네게 제법 흥미가 생겨서 말이야.”
도현은 그 뉘앙스에 미묘함을 느꼈다. 그러나 부탁하는 위치에서 그런 사소한 점을 붙잡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헨리 씨.”
“연주가 형편없었으면 바로 뒤돌아서 나가려고 했어. 굳이 따지자면 내가 준 기회가 아니라 네가 만들어낸 기회지.”
“그런가요?”
도현은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헨리는 과도하게 겸손해지지 않고 적당히 배짱 있게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실력 있는 연주자는 그만한 프라이드를 지니는 법이니까.
“그럼, 제가 만들어낸 그 기회… 후회하지 않도록 써보고 싶은데요.”
“흠?”
눈썹을 치켜올린 헨리가 흥미로운 낯빛을 했다.
“생각해둔 게 있는 거 같은데.”
“네, 좋은 반주자가 있다면 하고 싶은 곡이 있었어요.”
“그게 무엇이죠?”
스테파노스의 물음에 도현이 잠깐 텀을 두고 말했다.
“베토벤이요.”
“베토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도현이 꺼낸 말에 세 사람이 놀란 눈을 했다. 특히, 도현과 가장 오래 알아 왔던 밀턴이 제일 놀란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하고 싶어요.”
“하!”
헨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딘가 기가 차기까지 한 음성이었다.
짧게 숨을 토해낸 그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내 의견을 묻더라니.”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은 자신의 곡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협주곡과 유사한, 협주적 스타일로 쓰인 작품’이라고.
베토벤 이전의 기악 소나타는 피아노 중심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형식을 벗어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의 대등하게 대립하는 구도를 시도했다. 그 끝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였다.
이 소나타에서 바이올린은 확실하게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과거의 형식을 벗고 독주자의 지위를 얻었다. 그리하여 때론 피아노와 대등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때론 격렬하게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곡을 이끌어나간다.
크로이처 소나타가 음악사상 위대한 기악 소나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 곡은 낭만주의 시대 기악 소나타의 모범이기도 한, 뛰어난 곡이니까.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헛웃음이 났다.
헨리는 짧게 평가했다.
“건방지네.”
그의 말에 밀턴이 주춤했다.
그는 상당히 난감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얌전히 있는 도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 도현도 생각이 있겠지.’
있어야 할 거다. 힘들게 구한 반주자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밀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도현을 염려 어린 눈으로 보았다.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
그래, 곡은 좋다. 무척 훌륭하다.
문제는 곡이 아니라 연주자였다.
대등하게, 또 격렬하게. 그렇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얽히고 엉겨서 만들어가는 9번 소나타는 무척 드라마틱한 곡으로도 유명했다.
그 소린즉슨, 피아노 연주자와 바이올린 연주자의 역량이 맞부딪친다는 뜻이었다.
헨리가 생각한 건, 그리고 밀턴이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도현의 바이올린 연주에 잔잔한 반주를 깔아주는 거였다.
이렇게 서로의 역량을 겨루는 게 아니라.
헨리가 입을 뗐다.
“지도 연주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두 악기가 대등하게 이어가는 이 곡은 연주자의 실력 차이가 극명할수록 끌고, 끌려가는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도현이 이 곡을 연주하는 건 음반 때문이었고, 자신의 음반에서 다른 연주자에게 끌려가길 원하는 이는 없다.
“네.”
“…하.”
헨리가 다시금 헛숨을 토했다.
그는 몇 번 그렇게 숨을 내쉬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뺨을 쓸어내렸다. 한쪽으로 꼬았던 다리는 내린 채였다.
내내 흥미를 띄우던 준수한 얼굴에 약간의 불쾌함이 번졌다.
“그러니까 네가 나랑 대등할 자신이 있다고?”
프라이드가 있는 것과 건방진 것은 다르다. 헨리가 보기에 지금 도현은 건방지게 굴고 있었다.
천재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도현은 열셋이고 헨리는 삼십 대였다. 도현의 본업은 배우였으며, 헨리는 한평생 피아노 의자에 붙어살았다.
이건 그가 쌓아온 기간의, 그리고 경력에 대한 모독이었다.
“대등하길 바라진 않아요. 끌려가지만 않으면 돼요.”
“그건 자신 있고?”
절로 빈정대는 투가 나왔다.
성인 남성이 불쾌감을 표출하면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도현은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말을 꺼냈을 때와 한 치의 다름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 침착함에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속에서 치솟던 불쾌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헨리 씨. 저는 당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후회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게 뭐가 다르지?”
“저를 아는 사람, 그러니까 음악과 관련된 사람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 전부예요.”
“…….”
“전 늘 혼자 연주했어요. 누군가에게 들려준 적도 없고, 평가받은 적도 없죠. 당연히 뛰어난 다른 연주자와 합을 맞춰본 적도 없어요.”
헨리와 스테파노스는 도현의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정말 모든 걸 혼자 해 온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아서 ‘스승을 제외하고 들려준 적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헨리 씨, 당신이라면 아시겠죠.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또 외로운 일일지.”
“…….”
“전 그냥 제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뿐이에요.”
그제야 헨리는 도현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비단 음반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을, 헨리와 연주하는 기회를,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도현의 속내를 듣는 건 밀턴도 처음이었다. 밀턴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화내지도 못하게 만드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헨리가 다시금 다리를 꼬았다. 이전의 여유롭고 느긋한 기색으로 다시 돌아간 그의 모습은 대답과도 같았다.
얼추 정리된 분위기에 스테파노스가 큼, 헛기침했다.
“두 번째 곡이 결정이 난 것 같군요.”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