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4화. Whose H? (18)
스테파노스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데모를 녹음해보길 권유했다. 도현은 잠깐의 고민 후 그 권유를 사양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반주자가 있다면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해놓은 곡이라서 미흡한 부분이 많아요. 그리고….”
도현이 헨리를 보았다.
“그런 연주로는 설득할 수 없는 분이 계셔서요.”
마찬가지로 헨리를 본 스테파노스는 납득했다. 지금 어설프게 연주하느니, 도현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서 가져오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가만히 듣던 헨리가 물었다.
“그 준비가 얼마나 걸릴 예정이지? 미리 말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줘.”
“물론이죠. 저도 시간이 여유롭진 않아요.”
왜냐는 듯한 시선에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학교 가야 해서요. 그 말에 스테파노스와 헨리의 낯이 어처구니없이 변했다.
학생이 학교에 가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선 학교보다 중요한 일들이 있는 법이다. 특히 H의 첫 음반이라거나, 헨리 루빈스타인과 협연할 기회 같은 게 그랬다.
그들의 심정을 읽은 듯 도현이 덧붙였다.
“그리고 음반을 위해서 소속사의 양해를 구해 하던 활동도 취소하고 왔어요. 그렇게 주어진 시간은 이번 겨울 방학까지고요. 약속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아요.”
“…맞아, 너 배우였지.”
머릿속으로는 할리우드 스타, 할리우드 스타 하면서도 상대를 어느새 연주자로 인식해 버렸던 모양이다. 도현의 입에서 소속사니 활동이니 하는 단어가 나오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헨리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도현을 보는 사이, 도현이 탁자에 놓인 달력을 제 앞으로 당겼다. 내리깐 눈으로 달력을 유심히 보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헨리 씨. 혹시 맞추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니, 정정할게요. 맞추는 데 얼마나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세요?”
헨리와 같은 스타 연주자들은 다른 연주자나 필하모닉과 협연하는 일이 잦았다. 오랫동안 서로 합을 맞춘 후에 공연할 때도 있지만, 때론 하루라는 시간 안에 맞춰서 무대 위에 올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시간은 그에게 큰 장애물이 아니며, 지금은 명백히 도현이 도움을 받는 위치다. 헨리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삼 일.”
“삼 일….”
도현이 그 말을 곱씹었다.
삼 일. 생각보다 후하다.
‘이틀 정도로 예상했는데.’
역시 밀턴 씨 덕분인가. 새삼 지연의 대단함을 느낀 도현이 그를 바로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응접실 조명 아래서 또렷하게 빛났다.
“그럼 그 삼 일은 제게 온전히 내어주실 수 있나요?”
“이건 진심인데, 너 볼수록 맹랑한 거 같아.”
감탄스럽게 말한 헨리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대신 이쪽도 조건이 있어. 네 연주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언제든 그만두고 돌아가겠어.”
일종의 심술이었다. 이래도 겁을 먹지 않을 거냐는. 그런 헨리의 심술이 무색하게도 도현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편이 좋아요. 제게 필요한 건 반주자지 봉사자가 아니니까요.”
무던하게 나온 말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밀턴과 스테파노스 또한 헨리의 ‘맹랑하다’라는 평가에 공감했다. 정말이지 맹랑한 소년이었다. 그게 밉지 않게 보이는 것도 재주였고.
그때, 도현이 그들을 향해 달력을 돌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달력의 한 곳을 짚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는 건 2월 마지막 날이에요.”
손가락이 달력을 스치고 이동했다. 자연히 세 사람의 시선도 도현의 손가락이 향하는 쪽으로 따라갔다.
“이날.”
손가락이 멈춰 선 곳은 달력이 끝나는 부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고작 5일 전인 수요일이었으니까.
“이날부터 연습을 시작해요. 이때부터 금요일까지 연주를 맞춰보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 녹음하면 될 것 같네요.”
잠자코 달력을 보던 헨리가 물었다.
“혹시 제정신이야?”
“…….”
“녹음하는 날을 고작 이틀로 두겠다고? 그것도 다음 주 월요일에 비행기 타고 돌아가면서?”
“따지고 보면 삼 일이죠. 오후 비행기를 타면, 다음날 오전까지는 가능하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헨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헨리뿐이 아니었다.
“도리토, 아니, 도현. 나도 헨리랑 같은 생각이란다. 녹음 일정이 너무 촉박해. 조금만 당기는 게 어떻겠니?”
밀턴의 만류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헨리 씨를, 그리고 저를 만족시키려면 이 시간도 부족해요. 여기서 연습 시간을 더 줄일 수는 없어요.”
“…….”
밀턴은 반박하지 못했다.
도현이 말한 날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6일. 그 시간조차도 세계적인 연주자의 눈에 차는 연주를 만드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한참 모자랐다.
“헨리 씨, 이 일정 괜찮을까요?”
도현의 물음에 헨리가 미간을 좁혔다.
“현명한 건지 무모한 건지….”
조금 미묘한 투로 말한 그는 이마로 몇 가닥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다양한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에 말했다.
“하겠다고 했으니 이건 내 쪽에서 맞추는 게 맞겠지.”
헨리의 수락에 상황을 지켜보던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주말 동안 스튜디오를 비워놓아야겠군요.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아무런 예약도 잡지 않을 예정이니, 그사이에 언제든 오시면 됩니다. 오기 한 시간 전에만 연락해 주시면 좋겠군요.”
전적으로 도현의 편의를 봐주는 말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좋은 음반을 만들어내는 게 제 즐거움이니까요. 그럼 크로이처는 그렇게 하고. 다른 녹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테파노스의 질문에 도현이 약간 망설였다.
“그게, 웬만하면 순서대로 녹음하고 싶은데….”
“순서대로, 말입니까?”
남은 이틀에 모든 녹음을 끝내겠다는 소리란 말인가? 심지어 악마의 트릴을 재녹음하게 되면 그냥 음반 전체를 녹음하는 거였다.
도현이 크로이처 소나타를 말할 때도, 23일에 합주 연습을 시작하겠다고 말할 때도 가만히 있었던 스테파노스도 이번만큼은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너무 일정이 촉박하면 좋은 연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적당한 긴장은 좋아도, 정도 이상의 부담감은 연주를 방해하니까요.”
스테파노스는 말하면서 도현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도현이 보여준 연주와 발언은 그의 성미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스테파노스가 보기에 도현은 아주 고집이 센 타입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결정한 부분에 한해서는 양보도 물러섬도 없는.
그런 스테파노스의 걱정과 달리 도현은 순순히 물러섰다.
“프로듀서님의 말이 맞아요. 그럼 마지막 곡만 그날 같이 녹음할게요.”
아니, 수긍하는 척 타협안을 내놓았다.
“마지막 곡이요?”
“네, 그건 꼭 가장 마지막에 녹음해야 하거든요.”
“곡이 정해졌습니까?”
“아, 네. 원래 밀턴 씨가 권해주셔서 고민 중이었거든요. 회의 전까지만 해도 고민스러웠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확신이 섰어요.”
도현은 곡명을 말했다. 그에 세 사람이 잠깐 놀라워하다가, 곧 수긍했다. 그들 또한 그 곡만큼 마지막에 어울리는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곡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스테파노스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라면….”
“그래도 될까요?”
“음.”
짧게 신음한 스테파노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확인한 도현이 방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스테파노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이걸 바란 거였나?
“허허….”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소년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가 그의 친우, 밀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밀턴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자신도 감당 불가라는 듯이.
스테파노스는 다시금 헛웃음이 새어 나옴을 느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이 튀어나온 건지.
저 정도의 인물이 지금까지 가려진 채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그는 유명한 배우고, 그쪽에선 여러모로 화제의 인물인 모양이니 가려졌다는 말이 적절치는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스테파노스의 눈에 검은 카디건을 걸친 소년이 비쳤다.
‘그리고 이젠 연주자로서도 가려지지 않겠지.’
그 악마의 트릴을 들은 순간 느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닥쳤음을. 아마 밀턴과 헨리도 같은 감상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밀턴이 이 인원을 모으고, 헨리가 반주를 맡아주지 않았겠는가.
“좋습니다. 그럼 두 곡은 마지막 주에 녹음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다른 레퍼토리를 정해보죠. 세 곡으로 끝내진 않을 거 아닙니까?”
“네. 한 곡이나 두 곡 정도 더 들어가면 좋을 거 같아요.”
“원하는 곡이 있습니까?”
“왈츠나 소품도 괜찮을 거 같아요. 앞선 두 곡보단 더 경쾌한 분위기였으면 해서요.”
“흠.”
스테파노스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널브러진 종이와 태블릿, 악보를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크로이처는 아직 안 되더라도 다른 후보들은 연주해볼 수 있겠죠?”
“네, 가능해요.”
그 대답에 스테파노스가 결론이 났다는 듯이 시원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는 간단하게 사 오는 편이 좋겠군요.”
회의가 생각보다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았다.
* * *
“…저, 도리야?”
“응?”
진이 떨떠름히 말했다.
“너 팔이 떨리는데?”
“아.”
도현은 잘게 경련하는 제 손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몇 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거 맞아? 대체 어제 뭘 하고 온 거야?”
“그냥 회의 좀 했어.”
대체 무슨 회의를 하면 멀쩡하던 손이 저렇게 되는 건데? 진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도현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보다 빨리 가자. 애들 먼저 모였다며.”
“아니, 아니. 너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쉴 시간 없어.”
“…오늘 연습 빠질래? 오늘만 특별히 봐줄게.”
“아냐, 할 수 있어.”
몇 번 더 휴식을 권했으나 도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진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도현의 옆에 가서 팔을 붙잡았다.
팔뚝에 가해지는 압력에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가만있어 봐.”
작게 타박한 진이 도현의 팔을 주물렀다. 어깨 부근까지 콩콩 두드려준 후에 그녀는 도현을 놓아주었다.
“어때, 조금 나아?”
“…응.”
빈말이 아니고 아까보다 조금 저림이 덜어졌다. 도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진이 한숨처럼 말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고 나 도와주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몸 신경 써 가면서 해. 걱정되니까.”
“걱정돼?”
“그럼 안 되겠어? 아무래도 내 욕심에 널 무리시키는 거 같아서 양심이 콕콕 찔린단 말이야.”
진의 솔직한 말에 도현이 피식 웃었다.
“네 욕심 아니고 내 욕심이야.”
도현이 부담스럽다고 하면 원망 한번 없이 알겠다고 수긍했을 진이었다. 그러니까 다 안고 가겠다고 한 건 도현의 욕심이 맞았다.
도현의 말에도 진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도현은 그녀의 낯빛을 세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정 미안하면 너도 나 도와줘.”
“내가? 어떻게?”
“나 연습할 때 들어주면 되잖아.”
“그게 도움이 돼?”
“응. 관객이 있고 없고는 다르니까.”
진은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알겠다고, 나만 믿으라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도현이 유쾌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창고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밀턴이 헨리 루빈스타인을 소개해줬다는 대목을 들은 진이 놀라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빠를 따라 헨리의 연주회에 가본 적이 있음을 말해주었다.
“진짜 실력이 엄청나던데. 왜 유명한지 알겠더라.”
진의 증언에 도현은 자신의 행운을 다시금 실감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창고 앞에 도착했다.
끼익. 오래된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클라인이 손을 들며 알은체했다. 냉장고를 뒤적이던 다비드 또한 이쪽을 쳐다보았다.
탁, 도현은 제게 던져진 음료수를 받았다. 도현에게 성의 없이 음료수를 던진 다비드는 조르륵 달려와 진의 손에 예쁘게 음료수를 쥐여 주었다. 오는 길에 힘들진 않았냐는 개소리는 덤이었다. 도현은 어이없이 웃었다.
대략 일주일만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