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Whose H? (20)
브라운이 입이 헤 벌어졌다.
그는 밴드부의 맞은편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멍한 얼굴로 입을 떡 벌리니 조금 바보 같아 보였다. 옆에 니콜라스가 있었다면 사진을 찍어 두고두고 놀렸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현의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니콜라스는 잘 지내려나.’
니콜라스는 2월 말에 있을 State championship을 준비하느라 굉장히 바빠 보였다. 주에서 여는 이 대회는 아무나 초청되는 게 아니었다. 거의 매주 있는 학교 대항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학교, 학생만이 초청되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작년에도 그곳에 초청받았는데, 올해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은 듯싶었다. 요즈음엔 수영에 완전히 매진하는지 거의 연락이 끊긴 수준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수영이라면 기가 막히게 해내는 애니까.
‘잘하겠지.’
니콜라스는 분명 잘해내고 있을 거다. 그러니 도현도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게, 맡은 일에서 최선의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때, 브라운의 목소리가 도현의 상념을 깨웠다.
“이게 자작곡이라고?”
도현은 그 심정에 공감했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도현도 딱 저런 기분이었으니까.
“진짜야? 아니, 근데 너는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할 줄 알았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브라운은 마지막 촬영에 자리에 없었지. 그렇다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을 거다.
“그냥, 전부터?”
“…뭐가 뭔지.”
브라운은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혼란스러웠다.
‘친구들끼리 하는 밴드부라며?’
그가 예상한 건 취미 수준의 활동이었다. 사촌 동생이 그림을 그렸대서 일그러진 사자 같은 거나 기대했는데 초고화질 실사가 나타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쟤가 저렇게 노래를 잘 부를 줄은.’
브라운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진은 그냥 도현과 니콜라스의 친구였다.
활달한 성격이라 대화하면 즐거운데 기는 좀 빨리는.
‘그러고 보니 쟤도 좀 달라졌나.’
도현의 변화가 너무 충격적이라 인식하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진도 이전과는 많이 변했다. 일단 이목구비가 조금 더 성숙해진 태가 났다.
게다가 노래의 영향인가, 이전보다 조금 더 예뻐 보이는 거 같기도….
“야. 내 여자 친구 뚫리겠다.”
“…….”
말투는 시큰둥했지만, 눈빛은 사나웠다. 짧게 잘라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이나, 또래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키는 약간 위압감이 있었다. 브라운은 생기려던 흥미를 곧바로 접었다.
움트려던 새싹은 햇빛을 보기도 전에 다시 씨앗으로 되돌아갔다. 단단한 땅에 덮여 앞으로 햇빛을 볼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브라운은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너희 연주하는 거 찍어주면 돼?”
“응. 라이브 퍼포먼스로 올릴 영상이랑 뮤직비디오에 삽입할 영상 해서 두 개.”
“어떤 식으로 삽입할 건데?”
브라운의 질문에 진이 나섰다. 그녀는 주방에 있는 테이블에서 파일 하나를 가져와 브라운에게 내밀었다. 브라운이 의아해하며 받아들었다.
“뮤직비디오 콘티야.”
도현이 음반에 매진한 지난 일주일간, 밴드부라고 놀고 있지는 않았다. 주로 연습에 매진했지만 그 와중에 유튜브에 올릴 영상들을 계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브라운은 눈을 깜빡이며 콘티를 읽어 내려갔다. 끝장에 다다라서는 그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자작곡이라 밝힌 곡도 그렇고, 밴드의 실력도 그렇고,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하나같이 브라운이 예상한 수준을 벗어나고 있었다.
“보기 어렵진 않지?”
진이 자랑스레 말했다.
“도리한테 많이 물어봤거든. 그게 열다섯 번째 최종본이야!”
이곳에서 이런 콘티에 가장 익숙한 건 도현이었다. 직접 그 콘티를 보고 연기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진은 틈틈이 도현에게 콘티를 확인받았다.
브라운은 시선을 내렸다.
지웠다 다시 쓴 흔적이 가득한 종이가 눈에 담겼다.
아,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낫지 않겠어?”
“다른 사람?”
“난 외부인이고, 전문가도 아니니까. 카메라도 취미로 조금 만져본 게 전부고.”
게임까지 접고 여기까지 온 게 허사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괜히 다 만들어진 수프에 숟가락을 얹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둘이 왜 친구인지 알 것 같아서.”
진의 말에 도현을 제외한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브라운만 어리둥절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우리도 전문가가 아닌걸. 성공적인 데뷔도 중요한데,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재밌게 하는 거야!”
환하게 웃는 진은 정말 진심처럼 보였다. 정말 즐기고 있구나, 즐거워서 하는 일이구나, 확 와닿았다.
‘저 자식이 눈을 부리부리 뜨는 게 이해되는 것 같기도….’
옆에 생태계 파괴종이 있어서 그렇지, 진도 따로 놓고 보면 얼굴도 예쁜 편이었다. 하지만 예쁘장함보다는 보는 사람까지 즐겁게 만드는 기운이 매력적인 여자애였다.
브라운은 따지자면 무기력한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저런 부류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인 할리가 딱 저런 느낌이니까.
브라운은 진의 양옆에 선 두 남자애를 보았다. 한쪽은 대놓고 뚱한 인상이었고, 한쪽은 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쉬운 인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런 애 둘이 붙어 있는 거겠지.’
브라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 나중에 딴말하지만 마.”
브라운은 분명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걸 거절한 건 진이었다. 나중에 이걸 손으로 찍은 거 맞냐고, 몰래 발로 찍은 거 아니냐 하면 브라운은 중지를 치켜올려 줄 자신이 있었다.
진이 시원하게 웃었다.
“안 그래!”
* * *
“나 다녀 왔….”
현관에 들어선 밀턴은 멈칫했다.
집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밀턴이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로테는 아직 안 들어온 것 같고….
그럼 진은?
밀턴이 익숙하게 일 층 끝 방, 도현이 머무는 방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
위층에 있나?
밀턴이 이번엔 발을 돌려 진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활짝 열린 방문과 텅 빈 방만이 밀턴을 반길 뿐이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면….
밀턴이 이마를 짚었다.
‘또 창고에 있구나.’
그의 딸은 이 시간에 종종 창고에 가 있곤 했다. 밤에는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들었다. 방에 도현이 없는 걸 보니 도현도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밀턴은 벗었던 겉옷을 다시금 걸쳤다. 그리고 집을 나와 창고 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고의 닫힌 문 아래, 은은한 주홍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더 가까워지니 말소리가 들렸다.
똑똑.
“진, 안에 있니?”
“…….”
몇 초가 흘렀을까.
벌컥!
창고 문이 열렸다. 늦은 시간까지 창고에 있는 진을 꾸중하려던 밀턴은 문득, 머릿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달았다.
“……?”
“아빠! 언제 왔어?”
“방금…. 그런데 진, 설마 아직까지 밴드 모임을 하고 있었던 거니?”
심지어 그가 처음 보는 얼굴도 보였다. 밀턴의 표정이 엄해지자, 진이 시선을 피했다. 밀턴은 이번에는 도현을 쳐다봤다. 안 말리고 뭐 했냐는 타박의 시선이었다.
도현이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앞에 있는 아이에게 가려지는 위치였다.
“…….”
밀턴은 골이 당겼다.
도현만은 믿었는데….
거기다.
‘이럴 시간이 있나?’
예정일까지 크로이처 소나타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하루하루가 부족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간을 쏟고 있는 도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똘망한 눈을 한 아이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음반을 잊은 거냐 물을 수도 없는 일이라, 밀턴은 그저 눈으로 말을 걸었다.
괜, 찮, 아, 요. 입 모양으로 돌아온 대답에 밀턴은 어이없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당장에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시급한 일이 눈앞에 있었다.
한숨을 내쉰 밀턴이 진을 불렀다.
“지니 레이시.”
그건 그 어떤 꾸중보다 효과적이었다.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진이 항변했다.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어쩔 수 없는데?”
“오늘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촬영했단 말이야.”
“그건 주말에 한다고… 아니, 그래서?”
“근데 한 번만 더 찍으면 더 잘 나올 거 같아서….”
“그래서 지금까지 모여 있었다고?”
“으응.”
당당하던 진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밀턴은 어이없다는 듯이 숨을 내쉬다가, 결국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래, 내 딸이지. 쟤는.
뭐 하나에 꽂히면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신경 안 쓰고 파고드는 건 밀턴에게서 물려받은 성향이 분명했다. 밀턴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부모님들껜 연락드렸어?”
“당연하지!”
그나마 다행인가.
진은 불안한 눈으로 밀턴을 보았다. 이대로 해산시킬까 봐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밀턴은 다시금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도로 삼키며 물었다.
“언제까지 할 건데?”
“음….”
“…….”
“내일…?”
“…맙소사.”
밀턴은 진심이냐는 듯한 눈으로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밀턴의 시선을 받은 이들은 쭈뼛거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밀턴은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 그렇단 거지.”
밀턴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여러 쌍의 간절한 눈빛이 밀턴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도현이었다는 건 밀턴을 기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밀턴은 포기했다.
“그래, 마음대로 하렴. 대신에 너희 다, 지금 부모님께 연락드려. 안 된다고 하시면 당장 돌아가는 거야.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네!”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저마다 부모님께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는 아이들 속에서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도현이었다.
밀턴이 싱긋 웃었다.
“얘야. 너도 예외가 아니란다.”
“…네.”
조금 풀 죽은 도현이 핸드폰을 꺼냈다. 밀턴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 * *
뚜르르-
벨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연결 중을 띄우는 화면을 조금 긴장된 눈으로 보았다.
달칵, 전화가 연결됐다.
- …아들?
조금 놀란 목소리.
- 이 시간에 왜… 아니, 아직 안 잤니?
“주무시는데 깨운 건 아니죠?”
- 아니야. 아직 잠 안 들었어.
거짓말은 아닌 듯 서혜나의 목소리는 졸음기가 없었다. 옆에서 이장혁의 목소리도 들렸다. 무슨 일인지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건 아니고….”
- 응.
“밴드부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응, 기억해.
도현은 미국에 오기 전에 했던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매일 일곱 시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는데, 초반에는 그래도 서로 걱정 어린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일주일을 넘어가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잘 있어요’ 한마디 하고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현은 자연스레 자신의 일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먼저 묻지 않으면 제 얘기를 한 적 없던 도현이라 그것이 무척 어색하면서도, 점점 익숙해졌다.
“오늘 밴드부 애들이랑 모였는데 그게 좀 길어져서 아마 자정을 넘길 거 같거든요. 어쩌면 밤새울 수도 있고요.”
그래도 여전히 어색하긴 했다. 도현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밀턴 씨가 부모님께 허락받으라고 하셔서요.”
- 아아.
이해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피곤하진 않겠어? 요즘 많이 바쁘다며.
“그래도 다 같이 할 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빠지면 곤란해지기도 하고요.”
- 음….
도현은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 그래, 그렇게 해.
“괜찮아요?”
- 응, 엄마 아빠는 우리 아들 믿으니까.
믿음.
그 단어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렇게 할게요.”
- 그래. 이왕 하는 거, 애들이랑 재밌게 놀아.
“…네.”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간 후 전화가 끊겼다. 검은 눈동자가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믿음. 도현을 믿지 못해 미국에 보내지 않으려 했던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기엔 이상한 단어다. 동시에, 요즘 그들 사이에서 적절한 단어기도 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점점 평온해진 건 도현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화로도 걱정과 염려, 불안이 느껴지던 부모님도 어느 순간부터 잔잔해졌다. 정말 도현을 믿기에 마음이 평온해진 것처럼.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내게도, 그들에게도 필요했던 건 시간이 아니었을까.
“…도리! 전화 안 끝났어?”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진에 도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냐, 다 했어. 허락받았어.”
“다행이다! 다른 애들도 다 허락받았거든!”
그래서 저렇게 신난 얼굴이었구나.
“얼른 들어와!”
진의 재촉에 도현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발걸음을 뗐다. 주홍빛 조명이 새어 나오는 창고 속으로 소년의 인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