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07화 (508/582)

제507화. Whose H? (21)

“진, 이거….”

고개를 돌리던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

방금까지 캐서린과 대화를 나누던 진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캐서린도 진의 어깨에 고개를 떨군 채 색색 숨을 내쉬었다.

“엉…?”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던 브라운이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도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브라운은 ‘엉….’ 하더니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조니는 아까 바닥에서 잠들었길래 소파 위로 옮겨줬고, 클라인이랑 다비드는….

‘…잠들었네.’

언제 저렇게 잠든 걸까.

식탁에 앉아 영상에 집중하느라 잠든 줄도 몰랐다. 도현은 조금 곤란한 심정이 되었다. 나도 여기서 자야 하나?

도현은 노트북 화면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 반. 확실히 애들이 졸려 할 시간이긴 했다. 이렇게 약속한 듯이 곯아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도현은 일단 조심조심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과자 봉지를 치웠다. 중간에 다비드가 깰 뻔한 위험이 있었지만, 다행히 깨지 않고 넘어갔다. 검은 봉지에 쓰레기를 모두 넣은 도현은 고민했다.

방에 갈까?

바로 옆에 방이 있는데 굳이 창고에서 잠들 이유가 없었다. 클라인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도현은 잠귀가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나 곧 도현은 그 생각을 접었다. 다 같이 고생하고, 다 같이 모였는데, 홀로 푹신한 침대에서 잔다는 게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랬다간 저 애들한테 두고두고 구박받을 게 뻔했다. 도현은 잠깐의 편안함으로 남은 한 달을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무언가 결심한 듯, 한 소년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조용히 방에 들어온 도현은 침대를 애써 외면했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이불이 저를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유혹에 넘어갈 수 없었다.

도현은 침대가 아니라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적당한 두께의 노트와 볼펜까지 챙긴 도현은 마지막으로 침대를 안타까이 쳐다본 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살금살금, 집을 나선 도현은 다시금 창고로 향했다. 오래된 경첩의 마찰 소리가 아이들을 깨울세라, 개미가 기지개하는 속도로 문을 연 도현은 다시 식탁에 자리 잡았다.

막 책을 펼쳤을 때였다. 조니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

잠자리가 불편한가?

걱정스레 조니를 보던 도현은 조니의 눈썹이 찌푸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전등이 조니가 있는 소파의 위쪽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아.”

깨달음을 얻은 도현이 불을 껐다.

세상이 암전되며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정답이었는지 앓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도현은 안도하며 식탁으로 돌아갔다. 불빛은 노트북을 열어 화면에서 나오는 빛으로 대신했다.

시력에 좋지 않은 행위란 건 알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니 괜찮으리라. 그리 판단한 도현은 가져온 책을 펼쳤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이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를 작곡한 것은 1803년. 그리고 톨스토이가 이 크로이처 소나타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발표한 건 1890년이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음반에 담겠다고 결정하면서, 도현은 시간이 난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소나타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니까.

그리고 도현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늦은 밤이라 바이올린을 연습할 수도 없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두 눈을 감고 있기도 싫다. 그렇다고 치사하게 혼자 방에 가기도 싫으니, 그야말로 적기였다.

도현은 노트북의 은은한 빛에 의지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씩 읽어 내려갔다.

“…음.”

마지막까지 읽은 도현이 애매한 탄성을 뱉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퍽 비극적인 내용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포즈도누이셰프라는 남자로, 기차에서 만난 화자에게 자신의 죄를, 자신이 아내를 살해한 이유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가 아내를 살해한 이유는 질투심 때문이다.

포즈도누이셰프는 그의 아내와 젊은 남자 바이올리니스트가 함께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는 걸 보고 망상을 키운다. 그리하여 의심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아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한 바는, 글쎄, 타락한 현대의 결혼 생활과 성애에 대한 비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금욕… 그런 것일까. 그의 관점도 나름 흥미로웠지만, 도현이 집중한 대목은 그가 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었다.

흔히들 음악은 정신을 고양해 준다고 합니다만, 다 헛소리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포즈도누이셰프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베토벤의 음악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의 악마적인, 섬뜩한, 최면적인 힘을 두려워했다.

포즈도누이셰프가 진심으로 두려워한 상대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음악, 그리고 음악이 가진 힘이었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주인공, 포즈도누이셰프의 입을 빌려 이런 위험한 무기를 세상에 내놓은 베토벤을 비판한 것이다.

“…….”

아이들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정적 속에서 도현은 차분히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왜 이 곡을 골랐을까.

베토벤이 만들어낸 이 위험한 무기를 누군가에게 휘두르고 싶었던 걸까?

포즈도누이셰프의 주장처럼,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그의 아내에게 그러했듯 누군가의 정신을 지배하고 싶은 걸까?

바이올린은, 음악은 내게 무기인가?

“…….”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휘두르는 무기가 아닌 내게 휘두르는 무기.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뒤흔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내 정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기 위한 것.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야.’

따지자면, 도현의 사상은 톨스토이보다는 쇼펜하우어와 더 비슷했다. 그는 음악을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말했으니까.

도현은 이 곡으로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뒤흔들고 싶지 않다. 그런 음악을 하고 싶지 않다. 도현이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내가 원하는 건….

* * *

시야가 희끄무레했다.

멍한 눈이 여러 번 깜빡였다. 점점 초점이 돌아오면서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벽에 붙은 록 밴드 포스터와 주방 테이블에 널린 음료수병과 감자튀김의 흔적, 그리고 발가락.

…발가락?

“아씨!”

브라운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제가 무슨 자세로 잠들었는지 깨달았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영상을 좀 만진다는 게 그대로 잠들었고, 소파에서 잠이 든 조니의 발이 그의 뺨을 향해 삐죽 나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볼을 찌르진 않은 것 같았다.

벅벅, 브라운이 제 뒷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뒷머리가 붕 뜨며 까치집이 생겼다.

“…언제 잠든 거지.”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렸다.

브라운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있는 건 클라인, 옆에는 캐서린이랑 진, 저쪽에는 다비드…. 한명 한명 살피던 브라운은 머리가 한 개 빈다는 걸 깨달았다.

이도현은?

그때였다.

“일찍 일어났네?”

브라운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아침의 햇살과 함께 검은 머리의 소년이 들어왔다. 역광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방에. 씻고 왔어.”

그 말처럼 브라운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도현의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조금 촉촉해 보였다. 브라운은 바닥에 과자 봉지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아이들과 이른 아침에도 변함없이 멀쩡한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너 좀 질린다.”

“갑자기?”

도현이 황당해했다.

아침부터 질린다는 말을 들은 도현이 황당해하든 말든, 브라운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브라운이 읊조리며 생각했다. 왠지 머리가 아프더라.

그의 기억이 또렷할 때까지만 해도 새벽 네 시가 넘어갔는데, 오전 10시에 깼다면 머리가 아픈 게 당연했다. 그는 본래 하루에 아홉 시간은 수면에 쏟는 사람이었다.

‘그럼 쟤는 몇 시에 일어난 거지.’

잠은 잔 건가?

분명 브라운이 제정신을 잃어갈 때도 도현은 멀쩡했다. 바닥에서 잠든 조니를 잘 거면 소파에서 자라며 들어서 옮긴 게 기억나니까 확실할 거다.

그사이, 주방에서 물병을 꺼낸 도현이 브라운에게 주었다.

“깬 김에 일어나. 어차피 다 지금 깨워야 해.”

“왜?”

“로테, 아, 진의 엄마가 아침 준비를 끝내셨거든.”

가볍게 대답한 도현은 브라운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조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조니가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조니. 일어날 시간이야.”

“엄마, 오 분만….”

그 잠꼬대에 도현이 픽 웃었다.

“나 네 엄마 아닌데.”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지 조용해졌다. 이내 조니의 눈꺼풀이 스르륵 떠졌다. 조니는 깨자마자 보이는 얼굴이 도현이란 것에 의아해하다가, 곧장 경악했다.

“악!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음….”

“도현!”

“지금 일어나면 생각해보고.”

“일어났어요! 일어났다고요!”

“오 분 더 안 자도 돼?”

조니의 토끼 같은 눈망울이 댕그래졌다.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는 눈빛이었다. 도현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일어나.”

“정말 안 거죠?”

“응, 정말.”

애초에 아침마다 진을 깨우는 도현은 이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반응이 재밌어서 조금 놀린 거지.

조니의 목소리가 컸던 건지, 다른 아이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품하며 몸을 일으킨 캐서린은 도현의 시선에 황급히 입가를 훑었다.

“침 안 흘렸어.”

“…그래, 알려줘서 고맙네.”

캐서린이 떨떠름히 답했다.

캐서린을 필두로 클라인과 다비드도 잠에서 깨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깬 건 진이었다. 보통 이 정도 소음으로는 깨지 않는 진이었는데, 알아서 일어난 걸 보면 아마 진도 잠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비몽사몽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가자 로테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밀턴은 안경을 쓴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도현에게 익숙한 아침 풍경이었다.

“와, 이걸 다 만드신 거예요?”

갓 구운 빵과 스프,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컨, 팬케이크. 그리고 상큼한 과일 몇 조각. 아침상이라기엔 꽤 화려한 테이블에 캐서린이 놀라며 물었다.

로테가 아이들의 접시에 스크램블드에그를 조금씩 덜어주며 말했다.

“남편이랑 도현이 도와줬지.”

“도현이요?”

캐서린의 물음에 잠이 덜 깬 진이 답했다.

“맨날 그래. 솔직히 이제 내가 딸인지 쟤가 아들인지 모르겠어.”

“둘 다 내 딸 아들 하지 뭐.”

로테의 대답에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조금 피곤하게 눈을 깜빡이던 도현도 그들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클라인의 팬케이크를 탐내는 조니, 조는 건지 먹는 건지 알 수 없는 진, 그런 진이 음식을 흘릴 때마다 테이블을 닦아주는 다비드, 로테와 수다를 떨며 과일을 집어 먹는 캐서린, 그리고 남들이 무얼 하든 신경 안 쓰고 접시에 집중한 브라운.

그래, 나는 역시 이런 이들을 지배하거나 휘두르고 싶지 않다.

조금 더 또렷해진 눈을 한 도현이 수프를 떠먹었다. 잘 익은 감자가 입 안에서 포슬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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