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8화. Whose H? (22)
왁자지껄한 아침 식사가 끝난 후.
가벼운 티타임이 이어졌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기로 한 밀턴이 씻으러 간 사이, 캐서린이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주말에 시간 돼?”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특히 조니가 크게 경악했다.
“캣이 도현을…?”
“아니거든!”
“하지만, 방금 데이트 신청한 거 아니에요?”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캐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클라인의 가느스름하게 뜬 눈과 딱 마주쳤다. 그 오묘하고도 의미심장한 시선에 캐서린이 버럭 성을 냈다.
“아니라고!”
“그럼 뭔데?”
오랜만에 흥미로운 눈빛을 한 다비드가 물었다. 잘못 대답하면 몰아갈 심산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 어이없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비디오 때문이거든? 연기 좀 배우고 싶어서!”
“아….”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렸다.
누가 봐도 아쉬워하는 기색에 캐서린이 황당해했다. 그 모든 상황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던 도현이 물었다.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응. 너 일단 배우니까….”
“일단 배우는 뭐야.”
“아니, 그. 아무튼 맞잖아.”
대충 대답한 캐서린은 도현을 보고 강조하듯 말했다.
“너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 아니야. 알았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는데.
도현은 속마음을 굳이 꺼내 말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맘때 아이라면 예민할 수 있는 문제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그래서 시간 돼?”
“주말….”
작게 중얼거린 도현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왜?”
“잘 모르겠으니까?”
“그게 뭐야. 그냥 싫은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도현이 모르겠다고 한 건 주말에 세 번째 곡 녹음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캐서린은 실망스러워 보였다.
“그래. 너도 귀찮을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오해가 깊어지는 거 같은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도현이 어쩔 줄 모르는 낯으로 침묵하고 있자 다비드가 혀를 찼다.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에 목소리를 낸 건 로테였다.
“그러고 보니, 영상은 다 찍은 거니?”
누가 봐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의도였다. 거기에 응해준 건 의외로 다비드였다.
“그건 진즉 찍었어요.”
도현이 이 집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다비드의 가족과 진의 가족이 생각보다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둘 다 사귀는 걸 숨기지 않고 양측 부모님도 자식들의 이성 관계를 통제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서로서로 친밀하게 알고 지냈다.
“뭐? 늦게까지 깨어 있던 거 같던데?”
“그건….”
“그건 클라인 때문이에요.”
불쑥 끼어든 조니에 클라인이 성을 냈다. 내가 뭘 했다고! 그의 항변에 조니가 태연히 말했다.
“클라인이 보드게임을 가져왔잖아요.”
“야, 너는! 너도 비하인드 비디오를 찍어야 한다면서 장난쳤잖아! 쟤도 껌딱지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제가 언제요?”
“너 거짓말을…!”
“엄밀히 말하면 전 도현의 팬들을 위해 기록을 남긴 것뿐이라고요! 이건 절대 사적인 일이 아니고, 공적인 일이었어요! 클라인의 보드게임처럼 사심이 넘치지 않는다고요!”
둘의 대화에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로테가 다비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냥 논 거였니?”
“…그, 내내 논 건 아니고요.”
퍽 믿음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저마다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에 조용히 차를 마시던 도현이 입매를 휘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의 집중력을 과대평가하곤 한다.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을,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도현은 그런 아이들을 답답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현이 그들을 돕기로 한 것도 그들이 성공하길 바라서가 아니었다. 더 즐겁고, 더 만족스럽길 원해서였지.
“그래도 할 건 다 했어요! 이제 뮤직비디오만 찍으면 되니까!”
클라인이 급히 수습했다.
그 한심한 분위기 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브라운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시선의 방향을 쳐다보니 이곳에서 제일 하얗고 까만 애가 보였다.
“들었지, 브라운?”
“뭘 들어?”
“이제 뮤직비디오만 찍으면 돼.”
“…그래서?”
“왜 남 일처럼 대답해?”
도현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와야 하는데.”
“…….”
“아, 드론도 챙겨 오면 좋을 거 같아. 도움 될 것 같아서.”
“혹시 내 의견은 안 궁금하냐?”
“그야, 올 거잖아?”
도현의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브라운에게 쏠렸다. 하나같이 ‘그럼 안 올 거야?’ 하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브라운은 하룻밤 사이에 옆집 브로콜리처럼 편해진 이들 속에서, 자신이 이곳에 발이 묶였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뭐가 뭔지.”
브라운은 한숨 같은 말을 뱉었다.
항복의 표현이었다.
* * *
“잘 가.”
“응, 다음 주에 보자!”
원래라면 주말까지 매일 연습해야 했지만, 그 이유였던 영상 촬영이 끝나버렸다. 그런 이유로 다음 모임은 내일이 아니라 다음 주로 잡혔다.
밀턴은 아이들을 차에 태우다 말고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으로 걸어갔다.
“크로이처는?”
“아.”
밀턴의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
“…도리토스. 물론 네가 알아서 잘할 건 알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말하마. 헨리는 까다로운 연주자야.”
내가 미덥지 않은 걸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봐온 것은 세계적인 연주자거나, 그에 버금가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음악에 모든 걸 건 이들이었겠지.
도현은 밀턴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의 연주회 영상을 봤어요. 확실히 그래 보이던걸요.”
“얘야, 네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저 걱정돼. 네 말처럼 너는 다른 사람과 합주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합주는 둘이서, 혹은 여럿이서 연주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건 경험을 통해 숙련되는 거였다.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무대에서 다양한 곡을 올려보면서. 하지만 도현에겐 그런 경험이 전무했다.
도현이 아무리 천재라 한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걸 잘할 수는 없다. 경험한 적 없는 일을 능수능란하게 해내면 애초에 그게 사람이겠는가? 신이겠지.
그때, 도현이 되물었다.
“왜 없어요?”
“음? 해 본 적 있는 거니? 아니지. 분명 저번에 스튜디오에서는 없다고….”
“네, 제가 그랬죠.”
순순한 인정에 밀턴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해석하자면 대략 ‘얘가 너무 힘들어서 맛이 갔나?’ 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잠을 별로 못 잤니?”
“그렇긴 한데, 졸려서 헛소리하는 건 아니에요.”
“음….”
안 믿는 얼굴이다.
도현은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그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도현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밤새, 음악과 바이올린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들의 숨소리는 생각보다 진정 효과가 커서, 도현은 꽤 오랜만에 아무런 불안도 근심도 걱정도 없이 그의 내면에 파고들었다.
생각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뻗어나갔다. 바이올린과 다른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내 음악이라는 하나의 요소만이 남았을 때.
도현은 이 모든 게 음악이란 것을 깨달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깨달음이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 이 공간과 아이들의 심박 소리, 그 모든 게 그저 음악이었다.
그러고 나니 구분했던 모든 게 의미 없어졌다.
왜 꼭 실력 있는 연주자여야 할까? 왜 꼭 클래식이어야만 할까? 결국 형식일 뿐이고, 음악은 하나로 통하는데.
“오늘이랑 어제 내내 했잖아요.”
“……!”
밀턴의 눈이 커졌다.
사실, 도현은 밴드부에 관해서 시혜적인 입장이었다. 내심 진을, 그리고 밴드부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여겼던 거다.
하지만 형식의 벽을 허물고 나니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일방적으로 도움을 준 걸까?
다비드의 드럼, 조니의 키보드, 캐서린과 클라인의 베이스, 진의 보컬. 그 모든 게 조각조각 맞춰진다. 도현은 실이 되어 드럼과 키보드를, 베이스를, 그리고 보컬을 엮었다.
무엇 하나 튀어 나가지 않고, 그렇다고 무엇 하나 죽지 않게. 그렇게 가지각색의 개성을 엮고 조화시키는 것. 그건 무척이나 새로운 경험이었고 동시에….
지금 도현에게 가장 필요한 경험이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더라고요. 개성 있는 연주자들이 이미 제 주변에 있었는데.”
“…장르가 다르지 않냐고 물어도 소용없겠군. 그렇지?”
“네. 바로 맞히셨어요.”
장난스레 웃는 도현에 밀턴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충분하진 않겠죠. 하지만 적어도 해 본 적 없다는 말을 정정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이럴 때면 나보다 더 통달한 거 같다니까.”
밀턴이 졌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헨리와 그런 약속까지 해놓고 밤늦게까지 무얼 하는 거냐, 추궁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그럴 수도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밀턴 씨. 크로이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감이 왔거든요.”
“그건 희소식이구나.”
허탈하게 웃은 밀턴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한번 바라본 후, 도현에게 말했다.
“도중에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그리고 스테파노스가 그러더구나. 세 번째 곡이 준비되면 연락해 달라고 말이야.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괜찮다고.”
“새벽에는 주무셔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같은 인간들은 원래 규칙적인 생활이랑 담을 쌓았어. 그걸 신경 쓸 인사는 아니지만, 네가 신경 쓰인다면 적당히 낮에 연락하도록 하렴.”
“하하, 그럴게요.”
웃으며 답한 도현은 그에게 이만 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에 밀턴이 가볍게 권유했다.
“지금 집에 가려는 거면 너도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왜? 차가 더 편할 텐데. 산책하려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도현이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약간 머쓱한 기색으로 말했다.
“두 시까지만 자려고요.”
“…….”
“자고 일어나서 걸어갈게요. 제안은 고마워요.”
“그래, 난 네가 이렇게 애 같을 때가 좋더라. 인간미 있잖니.”
도현이 눈매를 찡그렸다.
“평소엔 인간 같지 않았단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렴. 나는 이만 가보마.”
“…….”
홀로 남은 도현은 어이없는 낯으로 밀턴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어져가는 등을 보다가 헛숨을 터트린 도현은, 곧 고개를 흔들며 집 안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애들이랑 밀턴 앞에서 멀쩡한 척하는 것만으로도 도현은 기력을 다 썼다. 이젠 어젯밤 이별했던 이불과 재회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