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09화 (510/582)

제509화. Whose H? (23)

띠리릭!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곤히 잠들었던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두 시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띠리리리릭!

“……”

봐줄 때까지 발광할 기세였다.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깨 위를 덮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피곤해?”

“응, 조금….”

…잠깐.

도현의 눈이 번뜩 떠졌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이 태연하게 알람시계를 끄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알람을 끈 소녀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그럼 더 자는 거 어때?”

도현은 거기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빠가 너 두 시에 일어날 거라고 말해줘서. 깨워줄까 하고 왔는데… 근데 더 자야 하는 거 아니야? 피곤해 보여.”

“너 학원은?”

도현이 기억하기론 진은 다른 아이들이 귀가할 때 함께 밀턴의 차를 탔다.

“갔다 왔지.”

진은 의자에 털썩 앉아서 책상 위를 구경했다. 진의 방과 달리 책상부터 책장까지 어디 하나 어지러운 곳이 없었다. 그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말했다.

“원래 남아서 더 연습하다가 오는데 오늘은 수업 끝나고 바로 왔어.”

“왜?”

빙글, 의자를 돌린 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약속했잖아. 너 도와주기로.”

“아….”

그제야 도현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다. 탄식하던 도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심 당황한 채였다. 그게 이렇게 바로 도와달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진의 행동력을 너무 얕봤나 보다.

“집에 갈 거지? 같이 가자. 나 다음 주까진 시간 많아. 그때까지 너 도와줄게.”

씩씩하게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안 된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도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어야 하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난 진이 사라졌다. 도현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어깨 힘을 풀었다. 덕분에 잠은 확 깼다.

꼼꼼히 세수까지 마치고 나가니 거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소녀가 보였다. 금발을 높게 틀어 묶고 헤드셋을 끼운 채였는데, 도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헤드셋을 내려 목에 걸었다.

“가자!”

진이 먼저 현관으로 걸어갔다. 도현은 그녀의 뒤를 따라서 집을 나섰다.

두 아이는 나란히 걸었다. 드문드문 지나쳐 가는 행인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걷고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니키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은 자연스레 예전 이야기를 꺼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변에서 바다사자들이 도현을 따라왔던 얘기까지 나왔다.

“나중에 한 번 더 가자.”

“거긴 좀.”

도현이 질색하자 진이 키득거렸다.

대화하며 걷다 보니 금방 도현의 집에 도착했다. 진은 여전히 잘 관리된 정원을 보다가 흔들의자에 쏙 들어가 다리를 달랑였다.

“우리 밖에서 하자!”

“밖에서?”

“응! 오늘은 날도 별로 안 춥잖아.”

그래도 밖에 오래 있으면 추울 텐데.

도현은 고민하다가 거실에서 담요 하나를 가져와서 진에게 주었다. 진이 담요를 덮은 채 눈을 빛냈다.

“뭐부터 연주해줄 거야?”

“음…. 이번 주말에 녹음할 수도 있는 곡.”

“뭔데?”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이랑 차이코프스키 멜로디. 멜로디만 넣을지 3악장 다 넣을지는 조금 고민이지만.”

원래는 시벨리우스 소품곡을 생각했다. 그러나 크로이처를 어떻게 연주할지 깨닫고 나자, 그다음 곡으로 생각나는 게 크라이슬러밖에 없었다.

잠들기 전에 스테파노스 프로듀서에게 문자도 보내 놓았다. 그는 조금 의외인 듯 보였으나 도현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도현은 숨을 한번 내쉬고 연주를 시작했다.

* * *

정원에서의 작은 연주회는 한 시간쯤 뒤에 집 안으로 옮겨와서 계속되었다. 연달아 세 시간을 연주한 도현은 진의 체력과 집중력을 고려해 잠깐 쉬자고 제안했다.

“난 괜찮은데!”

그 반색한 얼굴부터 어떻게 하고 말하지.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그도 잠깐 휴식을 취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수면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평소보다 더 힘들기도 하고.

“나도 쉬어야 해서.”

“그래?”

아닌 척 좋아한다.

하긴, 열셋의 청소년에게 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건 제법 힘든 일이겠지.

“그럼 우리 다락방 가자!”

“다락방?”

안 될 것도 없어서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도현은 주방 선단에 있는 과자 몇 개를 챙겨서 다락방으로 향했다.

“역시 난 여기가 제일 좋아.”

다락방에 가자마자 카펫 위에 대자로 누운 진이 행복하게 말했다. 녹은 마시멜로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 도현은 설핏 웃었다.

그대로 뒹굴뒹굴하던 진은 몇 바퀴 구르다가 벽에 부딪히기 전에 딱 멈췄다. 반 바퀴만 더 돌았으면 벽에 놓인 액자에 코를 박았을 거리였다.

얼굴을 박을 뻔했던 건 하등 상관없는지, 진은 흥미로운 눈으로 액자 속 그림을 관찰했다.

저게 흥미로운가? 예전에 많이 봤던 그림일 텐데.

“도리, 이제 그림은 안 그리는 거야?”

“그림?”

“응.”

진은 도현을 보는 대신 벽에 나열된 그림을 구경했다. 도현도 그녀를 따라 제가 그렸던 것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게. 못 그린 지 꽤 됐네.”

“아쉽다. 잘 그리는데.”

진이 부슬부슬 웃었다.

“미술 시간이면 반 애들 다 너한테 몰렸잖아. 검사도 너한테 받고. 기억나?”

“…응.”

어이없었지, 그땐.

멀쩡한 미술 선생님 놔두고 왜 나한테 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즐거운 추억이지만.

그때의 기억이 솟아나자 도현은 감상에 젖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림, 그릴까?”

“응? 아니, 지금 그려달란 건 아니었어. 너 바쁘잖아. 그리고 너랑 놀려고 온 거 아니고 도와주려고 온 거란 말이야.”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언제?”

마침 생각난 게 있었다. 도현은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녹음 다 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음반 재킷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어서.”

“음반 재킷을?”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양 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난 사진을 싣기 어려우니까.”

“…괜찮은데?”

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진짜 괜찮은데!?”

“그래?”

“응! 너 그림도 잘 그리고, 네 음반이니까 네 그림이 들어가면 더 의미 있을 거고. 나도 오랜만에 네 그림 보고!”

떠올리고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하긴 했는데, 진의 반응이 생각보다 더 긍정적이었다. 그녀가 줄줄이 장점을 늘어놓자 도현의 마음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프로듀서한테 그렇게 말해볼게.”

“다 그리면 나 꼭 보여줘야 해!”

도현이 웃으며 답했다.

“제일 먼저 보여줄게.”

“좋아, 약속한 거야?”

“응.”

두 사람은 조금 들뜬 채 음반 재킷에 들어갈 그림에 대해 떠들었다. 카펫에 배를 대고 누워 한참을 얘기하다가, 일곱 시에 가까워질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도현은 진에게 집에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진은 고개를 저었다. 약속을 지킬 거라며 고집을 부리는 진에 도현은 결국 또다시 진을 앞에 두고 연습을 시작했다.

열한 시가 되어, 밀턴이 그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이어진 시간이었다.

* * *

“…피곤하면 가라니까.”

차 시트에 앉고 오 분이 지나자마자 그대로 잠든 진을 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밀턴은 백미러로 뒷자석을 흘끔 본 후 웃음을 흘렸다.

“그 애 고집은 아무도 못 꺾지.”

“정말요.”

도현이 한숨처럼 답했다. 밀턴은 말썽꾸러기 딸을 둔 학부모처럼 말하는 도현에 또다시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은 진의 숨소리와 밀턴의 웃음소리를 바탕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으로 어두운 거리가 휙휙 지나갔다.

샌디에이고에 온 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의 밤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낮과 밤이 더 지나고 주말이 찾아왔다. 소년이 갑작스레 연주를 멈춘 건, 어느 일요일 오후에 다다라서였다.

“응? 쉬려고?”

이제는 익숙해져서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있던 진이 물었다. 그녀의 품에는 도현이 한때 제일 아꼈던 인형이 안긴 채였다.

도현은 아니라고 답하며 바이올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언행 불일치에 진이 물음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바이올린은 왜 넣어?”

지익, 지퍼까지 모두 잠근 도현이 어깨에 가방을 멨다. 그리고선 저를 보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스튜디오에 가려고.”

느지막한 주말 오후. 테라스로 들어오는 햇빛과 소파에 앉은 금발의 소녀. 그리고 몸과 하나가 된 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바이올린.

지금이라는 깨달음은 도화지에 물감 번지듯, 갑작스러우면서도 자연스레 찾아왔다. 이 순간 가장 완벽한 연주를 해내리란 자신감보다는,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가방을 추켜 멘 소년이 소녀를 돌아보며 희게 웃었다.

“같이 가줄래?”

네가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조곤조곤하게 내뱉는 애정 가득한 말에 진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오늘은 숙녀분이랑 같이 오셨군요.”

스테파노스가 도현을 반기며 말했다. 도현은 그와 짧게 악수한 후 한 걸음 물렀다. 진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진 레이시예요. 반가워요,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도현이 그를 부르는 명칭을 따라 한 것이었다. 그 당돌함을 싫어할 사람은 이곳에 없어서, 스테파노스는 귀엽단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익숙함을 깨달았는지 입을 벌렸다.

“진 레이시, 레이시라…. 설마, 밀턴의 딸이냐?”

스테파노스는 대답을 듣지 않고 곧장 확신했다.

“오, 세상에. 정말 많이 컸구나. 혹시 기억나니? 네가 어렸을 때 몇 번 본 적 있는데.”

“저를요?”

“하긴, 많이 어렸을 때니까 기억하기 어렵겠구나. 그때 네가 아마 네 살이었을 거다.”

네 살이면 확실히 기억하기 어려울 나이였다. 물론 도현은 많은 것을 기억했다. 유일하게 겸손을 부리지 않고 자신하는 뛰어난 기억력 덕이었다.

“네 아빠는?”

“아빠는 오늘 일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그럼 어떻게 온 거냐?”

“그야 대중교통이죠!”

진의 대답에 스테파노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둘이 올 줄 알았으면 내가 데리러 갔을 텐데.”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순 없어요. 갑작스럽게 연락했는데 받아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드려요. 이렇게 바로 불러주실 줄은 몰랐어요.”

기세 좋게 바이올린을 챙기긴 했는데 뒤늦게 프로듀서에게 일정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도현을 곤란함에서 구해준 건 스테파노스의 시원한 수락이었다.

“연락이 언제 올지 내내 기다리고 있었거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한 스테파노스가 안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미리 히터를 켜 놓은 건지 스튜디오 안은 훈훈했다. 도현과 진은 스튜디오 안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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