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Whose H? (24)
두 사람에게 차를 내어준 스테파노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두 분이 같이 오게 된 겁니까?”
“제가 밀턴 씨의 집에 신세 지고 있다는 건 말씀드렸죠.”
“네, 들었습니다.”
“그게 H로서가 아니라 진의 친구로서 머무는 거라서요.”
도현이 옆에 앉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스테파노스 눈에도 다정하기 그지없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진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도와줬다고요?”
“네, 계속 같이 있어 줬거든요.”
오늘도 진이 보는 앞에서 연주하던 중에 연락드린 거예요. 덧붙이는 말에 스테파노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실례지만 두 분 사이가….”
“진은 남자친구가 있어요. 우리는 친구 사이고요.”
“오,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델마에 다닐 땐 이런 오해를 받는 일이 없었다.
니콜라스가 이사 가기 전에는 늘 셋이 붙어 다녔기에 그랬고, 니콜라스가 떠난 후에는 다비드와 진의 사이가 학교에 쫙 퍼져서 그랬다.
그래서 이렇게 오해를 받을 때마다 신기했다. 당혹스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진 않았다.
그만큼 친밀해 보인다는 거잖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방해하진 않을 테니 옆에서 구경해도 될까요?”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었단다. 물론 얼마든지 편하게 있어도 돼. 밀턴의 딸이면 내 조카나 다름없지.”
“고마워요, 스테파노스.”
진이 짓궂게 웃었다.
“사실 안 된다고 해도 있으려고 했거든요. 누가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요. 허락받아서 다행이에요.”
“허허….”
스테파노스는 진의 당돌함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이내 그는 씩 웃었다.
“네 친구가 얼마나 대단한 바이올리니스트인지 보면 깜짝 놀랄 게다.”
“으음, 전 영화 찍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걸요?”
“이런, 내가 졌군.”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아, 혹시 여덟 살의 도리가 한 다른 연주에도 관심 있으세요? 저한테 영상이 있는데!”
“그건 꽤… 흥미로운데.”
둘이 뭐 하는 건데.
오늘 처음 본… 아니, 진이 네 살 때 봤으니 처음은 아닌가. 아무튼, 거의 처음 본 사이면서 아주 단짝처럼 짝짝쿵이 잘 맞았다.
어느새 머리를 맞대고 DJ-N 조의 수행평가 영상을 관람하는 두 사람에 도현은 어이없는 숨을 흘렸다.
“호오, 일렉 기타에 바이올린….”
“저기서 피아노 치는 애도 우리 친구예요. 니콜라스라고, 바보 같지만 나름 착한 애죠.”
“편곡이 들어간 거 같은데, 도현이 한 게 맞니?”
“네. 사계의 봄이랑 겨울을 붙여서….”
흥미진진하게 영상을 보던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이 영상 내게도 보내줄 수 있을까?”
“안 돼요.”
의외로 진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저랑 도리만 등장한 영상도 아니고, 뭣보다 퍼지면 안 되는 영상이라서요. 스테파노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진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걸요.”
“흠, 그래.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스테파노스는 쉬이 물러섰다.
영상을 요구한 건 단순한 흥미였는지 ‘잘 보았다. 보여줘서 고맙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요구한 것치곤 미련 없는 태도에 진이 의아해하자, 그가 웃었다.
“어차피 그 영상보다 더 뛰어난 연주를 녹음할 거니 말이다. 그렇지?”
마지막 물음은 도현을 보면서 한 말이었다. 도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자연스레 바이올린을 챙겼다. 말하지 않아도 이제 시작할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은 부스 안에서 바이올린을 점검하는 소년과 마이크 위치를 조정하는 스테파노스를 보았다. 도현에게 무어라 말을 하던 스테파노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부스 밖으로 나왔다.
진은 그에게 눈짓으로 아는 척을 했다. 괜히 입을 열어서 도현의 녹음을 방해할까 싶어서였다.
“혹시 말이다.”
“네?”
그래서 스테파노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놀랐다. 스테파노스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도현이 크라이슬러를 택한 이유를 알고 있냐?”
“어, 도리가 말을 안 해주던가요?”
스테파노스가 간결히 답했다.
“그저 나중이 되면 알 거라고만.”
진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저도 몰라요. 전 그냥 도리가 연주하면 듣는 게 전부여서요.”
“그래, 그렇구나.”
스테파노스가 아쉬움을 삼킬 때였다. 진이 불쑥 물었다.
“도현이 연주하는 곡 이름이 사랑의 슬픔이었죠?”
“음, 그렇지.”
그걸 왜 갑자기 묻는 걸까?
진은 스테파노스의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저는 슬픔이라고 하면 눈물이 떠올라요. 보통 누군가 울 때 우리는 슬프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연주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눈물이 꼭 슬픔의 눈물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고.”
“……”
“때론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혹은 그리워도 눈물을 흘리니까요. 전 도현이 연주하는 슬픔을 그렇게 느꼈어요.”
스테파노스는 빠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 그런가. 그가 뒤늦게 입을 열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도현의 연주가 시작되었기에, 스테파노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A 단조로 시작하는 주제는 감미로웠다.
점차, 스테파노스는 진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해갔다.
스테파노스가 도현의 선곡에 의문을 품은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베토벤에서 곧장 크라이슬러로 넘어가는 담대한 선택이 그 첫 번째고, 크라이슬러의 소품곡,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기쁨> 중에서 슬픔만을 연주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둘이 개별적인 곡이긴 해도, 묶어서 연주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스테파노스는 도현이 어째서 슬픔만을 다루려는 건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애초에 슬픔이란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감정을 인간의 언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슬픔이 고통만은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본디 사람의 감정이란 그러했다.
절망 속에 있다고 한없이 절망만 하진 않는다. 그림자가 존재하려면 빛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분명 그곳에는 희망도 존재했다.
비록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쁨이 동반한다는 것.
슬픔 속의 기쁨, 기쁨 속의 슬픔.
도현이 그려내는 <사랑의 슬픔>은 그러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두 곡을 연주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 곡만으로도… 아니.
이 곡만이기 때문에 도현이 무엇을 연주하고 싶은지 선명히 전해지니까.
“…뛰어나군요.”
스테파노스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얇은 코트 차림의 헨리 루빈스타인이 서 있었다.
“헨리 씨, 대체 언제…?”
“연주가 시작한 직후에 왔습니다. 제법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 늦은 거 같네요.”
스테파노스는 연주에 집중하느라 헨리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는 걸 깨닫고 탄식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가 풀려난 기분이었다.
“와 주셨다는 건….”
“반주자가 필요하다 들어서요.”
스테파노스는 그간 헨리에게 도현의 일정을 공유했다.
도현이 시벨리우스를 크라이슬러와 차이코프스키로 바꿨을 때도 그는 헨리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가능하다면 그가 그 곡을 연습하고, 녹음일에 와주었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도현이 스튜디오에 가겠다고 연락했을 때도 헨리에게 전달했다. 도현이 오늘 녹음하러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솔직히 음반 준비를 너무 날치기로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긴 하는데, 도현의 상황이 너무 특수하고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헨리의 실력을 믿는 수밖에.
연주를 끝내고 다음 곡을 준비하던 도현은 부스 밖에 서 있는 남성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도현은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헨리 씨!”
“브라보. 정말 멋진 연주였어.”
“무슨 일로… 혹시.”
“반주를 맡아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
도현의 시선이 스테파노스에게 향했다. 그가 연락한 것인지 묻는 얼굴이었다. 스테파노스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 동안 곡은 연습했어. 오랜만에 라흐마니노프 버전이 아닌 사랑의 슬픔을 연주하니 꽤 재밌더군.”
“…….”
“일단 맞춰볼까. 아,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스튜디오 좀 빌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편하게 하시죠. 오늘 집에 못 돌아갈 각오까지 하고 왔습니다.”
“하하,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러기엔 여기 꼬마 숙녀분이 계시군요.”
갑자기 자신이 화두에 오르자 진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뺨은 조금 상기된 채였다.
“헨리 루빈스타인 맞죠? 재작년 봄에 당신의 연주회에 가본 적 있어요! 정말 훌륭한 연주회였어요.”
“영광인데요. 저도 기억합니다. 밀턴과 같이 와서 제게 사인을 받아 갔었죠?”
“저,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잊을 리가요.”
그 여유로운 미소에 진의 얼굴이 더 발갛게 물들었다. 도현은 감탄했다. 특히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피아니스트라더니, 그 이유가 준수한 외양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헨리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자, 시작하자. 시간이 많지 않아.”
도현도 밤늦게까지 진을 고생시킬 마음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먼저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부스 안에 들어온 헨리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가볍게 쓸었다.
“뭐부터 할 거지? 크라이슬러? 아니면 차이코프스키?”
“크라이슬러요.”
“그래, 그건 그렇고. 그럼 차이코프스키는 3악장 전부?”
“아직 생각 중이에요. 준비는 다 해 왔지만….”
“해 보고 결정하는 게 낫겠네.”
헨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바르게 자세를 잡았다. 도현은 떨리는 심정으로 바이올린을 고쳐 쥐었다.
그대로 숨을 내쉰다.
폐에 가득 찬 공기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초조함도, 불안함도, 기대감도 모두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검은 눈동자는 차갑게 반짝였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도현은 활을 내리그었다.
서두르지 않고, 급하지 않게.
그리고, 피아노가 바이올린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왔다.
서로를 탐색하는 것처럼 누구 한 명 조급하지 않다. 천천히, 상대의 주변을 맴돌며 관찰했다. 그렇게 상대를 파악해 나간다.
헨리는 솔직히, 감탄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의 합주에 기가 죽거나 긴장할 법한데도 도현의 연주는 한없이 침착했다.
마치 숲속에서 산책하는 것처럼 결코 앞서 나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처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누군가와 같이 연주해보면 상대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 상대가 한 명의 연주자일 때도 그랬고, 오케스트라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주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헨리는 장담하건대, 이 소년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배려심 넘치는 성격일 것이라 확신했다. 합주자로서는 무척 뛰어난 자질이었다.
하지만.
‘배려할 상대가 따로 있지.’
시간이 많다면야 조심스레 맞춰가도 좋을 테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헨리는 건반을 더욱 깊게 눌렀다.
“!”
옆에서 나란히 걷던 헨리가 한 발짝 더 내딛자 도현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헨리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지 않을 거냐는 듯이.
“…….”
도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뒤처질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