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11화 (512/582)

제511화. Whose H? (25)

헨리와 도현은 다시금 응접실로 가서 앉았다. 그들은 스테파노스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다만, 온전한 휴식은 아니었다.

그 짧은 새를 못 참은 두 사람이 또다시 머리를 맞대고 곡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서였다.

“거기선 조금 더 경쾌하게 표현하는 편이 나아.”

톡, 도독. 헨리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스타카토까진 아니더라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다음 패시지랑 이어질 때….”

두 사람이 토론 아닌 토론을 하는 동안 스테파노스는 부스를 점검했다. 녹음된 연주를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진은 그 모든 광경을 신기하단 눈으로 보았다.

그녀의 집에는 수없이 많은 음반이 존재했지만, 그 음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멀뚱멀뚱 구경하는 사이 두 사람의 주제는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차이코프스키 전 악장을 넣으려는 이유가 있어?”

헨리가 보기엔 3악장만 들어가는 편이 훨씬 깔끔했다. 하지만 도현은 모종의 이유로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도현이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시간이 적당한 거 같아서요.”

“시간? …아.”

음반의 표준 길이는 74분.

그리고 멜로디만 들어갔을 때 도현의 음반 길이는 60분대, 만약 전 악장이 들어가면 70분대….

…그러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고민 중이었다고?

“하!”

헨리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하, 겨우 그거 때문에?”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말하는 남성에 도현은 변명하듯 말했다.

“저도 74분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건 알고 있어요. 아는데, 그냥….”

“내가 맞춰보마. 너 완벽주의자지?”

“…….”

“책 정리할 땐 꼭 기준대로 할 거야. 계획한 건 무슨 일이 있든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점쟁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고요.”

“무슨 소리야. 딱 네 얘긴데.”

진이 태연히 한마디를 얹었다.

도현은 화끈거리는 귓불에 고개를 숙였다. 레퍼토리를 고민하던 이유가 고작 74분에 맞추고 싶어서였다는 게, 너무나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확실히 유치했다.

도현은 몇 번의 호흡 만에 가까스로 민망함을 내리눌렀다.

“…멜로디만 넣죠.”

헨리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밤 아홉 시가 되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연주자들은 신기한 족속이다.

때로는 말보다 연주에서 서로의 심중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곤 하니까.

지금도 그랬다.

그 누구 한 명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어 보았다. 도현과 헨리는 시선을 교환하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첫 번째 녹음이 시작되었다.

도현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연주에 집중했다. 신경을 쇠톱처럼 첨예하고 날카롭게 세우고, 손에서 흘러가는 음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더, 더.

더 간결하게.

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두 다리는 거목처럼 땅을 곧게 딛고 섰지만, 상체는 한없이 자유롭다. 형의 팔 길이와 나의 것이 달라서 어색했던 감각이 아주 오래전 일만 같다.

현이 이끌면 피아노가 그 뒤를 따라왔다. 피아노가 현이 나아갈 길을 단단히 다지면 현이 그 위에 발자국을 새겼다.

도현은 불현듯이 시선을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보는 금발의 소녀가 보였다. 그 눈에 담긴 건 신뢰와 애정이다. 그사이에도 연주는 흔들림 없이 이어진다.

도현은 깊은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과거에서 현재로의 기록. 그것이 음반의 목적이었다.

맨 처음으로 진행되는 악마의 트릴은 병원에서의 나날이었다. 그곳에서 홀로 맥베스를 연기하던 아이. 형과 덩어리 님과의 만남. 그 꿈결 같던 순간.

그리고 상실, 이별.

감정적으로 치솟다가 마무리된 선율은 크로이처 소나타로 이어진다. 도현이 그 곡을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이 듣기 힘든 음악이라서.

모든 비극적인 소리는 불편함을 동반한다. 상처받은 영혼이 울부짖고, 혼란해하고, 헤매며 만들어내는 모든 절망의 소리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한다.

그때의 도현은, 듣기 힘든 음악과 같았다.

한없이 가라앉는 중인.

하지만 추락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

많은 것들이 도현을 추락하지 않게 붙잡았다.

부드러운 손으로 이끌고, 등을 떠밀고, 기어이 밖으로 나오게 했다.

도현이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세 번째 곡의 녹음에 진이 함께해주길 바란 건 그래서였다. 사랑의 슬픔은 그녀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기도 해서.

곡을 마친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헨리도 놀라지 않고 자연스레 그를 받쳐 주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소중한 곳에 대한 추억 Souvenir d’un lieu cher.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인 이 곡은 총 세 곡으로, 순서대로 명상곡, 스케르초,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때, ‘무언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첫 번째 곡이 제일 좋으며 가장 어려웠고,

두 번째 악장은 활발하고 명랑하며,

세 번째 악장은 무언가입니다.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악보와 함께 보낸 편지의 내용이자 무언의 노래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도현은 그 무언가라는 표현이 무척 재밌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라니.

표현할 수 없기에 고른 단어일까.

아니면 그것이 가장 적절하기에 선택한 어휘일까?

이 곡이 사람, 그러니까 폰 메크 부인이 아니라, 그녀의 영지인 브라일로포에 헌정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도현은 나름대로 곡을 해석했다.

첫 번째 악장과 두 번째 악장이 아름다웠던 브라일로포에 대한 묘사이자 즐거웠던 기억이라면, 세 번째 악장은 그 모든 추억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온 이의 회상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추억하고 곱씹을 수는 있다. 흘러갔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어딘가의 일부가 되어 현재를 이루는 것이다.

도현의 의지를 대변하듯이 바이올린은 투명한 냇물처럼 유유히 흘렀다.

아름다웠던 순간이 끝나버렸다고 해서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건 아닐 거다. 그 모든 기억이 지금 내가 연주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니까.

“…….”

연습할 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었던 곡이다. 하지만 스테파노스는 이 곡에 또다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연스레 그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보다 젊었던 어느 날.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모든 게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였던 그 순간을.

현실에 치여 잊고 있었던 때를 다시 떠올렸음에도, 현재에 박탈감이 일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건 저 소년이 모든 것을 끌어안겠다는 듯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겠지.

스테파노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선명하면서도 흐릿하다.

한없이 선명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 같다가도 아주 먼 곳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좋은 날에 대한 기억이 그리하듯이.

단순히 기술적인 실력을 넘어선 문제였다.

사랑의 슬픔을 노래할 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슬픔을 억지로 억눌러 괜찮은 척하는 사람처럼, 어딘가 눈을 떼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는 거 같다.

“…….”

스테파노스는 도현이 음반에 무엇을 담고 싶은 건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건 한 인간의 기록이자 성장이다.

아마도 도현의, 그리고 슬픔을 마주쳤던 모든 이들에게 해당할. 스테파노스는 그것이 마치 인간에 대한 찬가 같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노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몇 시간 내리 이어진 연습과 녹음에 지쳐 있을 법한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또렷하게 뜬 눈이 부스 안의 소년에게로 향해 있었다.

금갈색 눈동자는 무척 진지했으며, 동시에 명료했다.

이 순간 이상하게도, 부스와 컨트롤룸 사이에 있는 벽과 유리창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런 장애물 따위는 막아설 수 없는 어떠한 것이 소년과 소녀를 이은 느낌이었다.

“…….”

친구 사이라고 했었나.

스테파노스는 주책맞게도 이 순간 저 둘이 무척 부럽다고 생각했다. 영혼이 이어진 친구를 두었다니. 그 무엇보다 가장 축복받은 일이 아닌가?

3부 형식으로 이루어졌던 곡이 다시 주부로 돌아와 조용하게 마무리되었다.

“…….”

마지막 선율까지 잦아들자 소녀의 작은 숨소리만이 들렸다. 스테파노스는 박수하는 것도 잊은 채 소년을 보았다.

이 음반이 도현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왜 갑자기 공백을 깨고 음반을 만들려고 한 건지도, 왜 여전히 익명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건지도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스테파노스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어졌다.

음악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 하던가?

그렇다면 말하건대, 소년은 음악을 하고 있었다.

* * *

도현의 몇 번 더 해 보자는 의견에 따라서 녹음은 자정에 가까워질 즈음에야 끝이 났다. 총 여섯 번의 녹음을 했고, 고른 것은 네 번째의 녹음본이었다.

“진, 미안해. 힘들었지.”

도현의 말에 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도 안 힘들었어.”

“너무 오래 걸려서….”

“나 봐봐. 내가 피곤해 보여?”

진은 특유의 총명하고도 또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녀가 가진 내면의 힘을 짐작할 만한,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빛이었다.

진이 씩 웃었다.

“나 진짜 괜찮아. 오히려 데려와 줘서 고마워.”

고맙다는데 도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현은 조용히 긍정했다.

“엄마는 십 분 뒤에 도착한대.”

“…죄송해서 어쩌지.”

밀턴은 출장을 갔기에 새벽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도현과 진을 데리러 오는 사람은 로테였다.

도현은 밤, 그것도 일요일 밤에 일찍 잠들지 못하고 둘을 데리러 오게 생긴 로테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엄마는 신경 안 쓸걸.”

진의 말에도 도현은 걱정을 지우지 못한 채였다.

“정 걱정되면 엄마한테도 오늘 녹음한 거 들려줘.”

“그게 무슨 상관인데?”

“적어도 이 밤에 움직인 게 헛고생은 아니란 거잖아.”

위로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오묘한 표정을 하던 도현은 코트를 챙겨 입은 헨리를 보았다. 늦은 밤이라 딱히 볼 사람도 없음에도 옷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리한 헨리는 도현의 앞에 다가와 섰다.

“오늘 정말 훌륭했어.”

“헨리 씨가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그의 반주는 마치 잘 갈고 닦인 땅 같았다. 그 위에서 도현은 마음대로 걷고, 뛰고, 심지어는 드러누울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땅이었다.

그렇기에 역량을 온전히, 가진 것보다 더욱 완전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도현은 어째서 훌륭한 반주자가 중요한지 깨달았다.

두 사람은 존중을 담아 악수했다.

헨리는 나가기 전, 도현을 향해 짓궂게 말했다.

“다음엔 이보다 더 날 놀랍게 해주겠지?”

“…….”

수면 시간을 줄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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