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화. Debut as a ?? (2)
“좋았어!”
첫 번째 촬영을 마치고 아이들이 노트북 앞에 모여들었다. 신기한 듯이 계속 재생하는 아이들에 캐서린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영상의 흔들림 정도를 확인한 브라운이 중얼거렸다.
“이다음은.”
그의 시선이 콘티에 닿았다.
She waited
그녀는 기다렸대
till the thirteenth minute hand passed
열세 번째 분침이 지날 때까지
두 박자의 노래 가사.
그리고 그다음의 코러스.
(What do you think?)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여기는 밴드 영상을 넣는 거지?”
뮤직비디오는 주인공이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창고이자 그들의 아지트에서 노래하는 진. 그녀와 밴드의 연주 장면은 노래 부분 부분에 삽입될 예정이었다.
한 명은 노래 가사의 ‘그녀’를 맡은 캐서린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를 맡은 도현이었다. 두 사람은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 노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응.”
“그럼 이 부분은 넘어가고.”
자연스레 지휘하는 브라운에 아이들이 착착 움직였다. 그에게 그런 카리스마가 존재하는지 몰랐던 도현은 내심 감탄했다. 하긴, 게임에서 팀전 지휘할 때도 굉장히 칼같았지, 브라운.
“넌 여기서 모니터링 계속해.”
“알았어.”
도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도 제각기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그곳에 섰다. 캐서린은 침대로 돌아갔고, 노래를 트는 역할을 맡은 클라인은 라디오에 손을 올렸다. 진과 다비드는 좋은 병풍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조니가 다시 한번 액션을 외쳤을 때.
She’s still in the room
그녀는 여전히 방 안에 있어
노래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 * *
창문을 보고 누워 있던 소녀는 턱, 팔을 뻗었다. 곧게 뻗어진 손이 협탁 위를 더듬어 갔다. 그러다 손끝에 무언가 걸렸을 때, 망설임 없이 잡아챘다.
붉은색 알람 시계.
소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고 동그란 붉은색 알람 시계였다.
약속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나 시간을 확인한 소녀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거나, 놀라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에 와그작, 하는 소리가 날 것같이 온 얼굴을 구겼다.
그것을 보던 도현은 다음 가사의 콘티를 떠올렸다.
시간을 확인한 소녀가 욕설을 내뱉는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며 알람 시계를 내던진다.
- 좋아, 내 알람 시계를 희생할게!
더불어 진이 당당히 외치던 말도.
도현은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려는 진의 꼼수가 아닐까, 아주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도현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간 사이에도 노래는 흘러나왔다.
And the minute hand is going
그리고 시간은 또다시 흐르고 있어
“Shit.”
작게 욕설을 뱉은 소녀가 시계를 꽉 쥐었다. 검은색 반지를 낀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리고.
She said, “what the hell?”
그녀는 말했어, “이게 말이 돼?”
소녀가 알람 시계를 힘껏 내던졌다.
텅, 터덩.
벽에 맞고 떨어진 알람 시계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시끄럽게 울어댄다. 제 존재감을 그리 격렬히 뽐내고 있음에도 소녀는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다.
검은 양말에 감싸진 발이 시계 옆을 밟고 지나갔다. 시계 옆을 지나쳐,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비로소 창문 앞에 섰을 때.
쿵! 드럼 소리가 크게 울렸다.
드럼을 시작으로 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 그리고 바이올린까지…. 노래의 훅에 가까워지면서 멜로디가 고조되어 갔다.
모든 악기가 서로를 받치고, 나아가며.
So this is a story
그러니까 이건
after the thirteenth minute hand passed
열세 번째 분침이 지난 후의 이야기야
그 제멋대로인 멜로디처럼, 소녀의 갈색 눈 위로 푸른 하늘이 얽혔다.
* * *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자신 없어 하는 태도에 조금은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된 이후 캐서린은 그런 불안을 모두 날려 보냈다.
She rolled down the window
그녀는 창문을 내렸대
가사의 화자가 하는 말처럼 캐서린이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뒤편에 있던 도현에게까지 닿았다.
캐서린의 연기력이 뛰어나다거나 엄청난 재능을 지녔다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보다 더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즐거움.
연기하는 걸, 연기하는 순간을 즐거워하는 것.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어설프더라도 영상을 보는 이라면 그녀의 즐거움에 전염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밴드부의 첫 데뷔곡이니 조금 어설픈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좋은 추억거리가 되어줄 테니까.
charmed by the wildest idea that someone is waiting for her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Blindly went away from home
무작정 뛰어내린 거야
“…야, 야! 캐서린!”
“미친, 진짜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
“누가 내려가 봐!”
충동적으로 뛰어내린 캐서린에 아이들이 혼비백산했다. 진이 정신없이 창가로 달려가고, 조니와 클라인은 일 층으로 내려갔다.
위잉, 위이잉.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드론이 날아다녔다. 그들이 난리 난 와중에도 라디오는 열심히 제 할 일을 했다.
(Can you imagine?)
(어떻게 됐을 거 같아?)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 * *
다행히 진의 방은 2층이었고, 그리 높지 않았으며, 밀턴 씨가 제초를 게을리한 덕분에 잡초가 쿠션 역할까지 해주어서 캐서린은 다치지 않았다.
진이 캐서린의 손을 잡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었다.
“손에 생채기 났잖아!”
아, 작은 상처 정도는 있었다.
캐서린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연행되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저를 둘러싼 아이들에 포위된 채 얌전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미쳐. 거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 아래에 매트리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너 진짜 도리 같은 말 할래!?”
진이 허벅지를 찰싹 때리자 캐서린이 수그러들었다. 잘못했다는 인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얌전히 치료받는가 하던 캐서린은 문득 억울해졌는지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제니퍼는 그럴 거 같았다고.”
“…….”
세뇌…, 아니, 몰입의 부작용이었어?
그녀를 제니퍼로 세, 몰입시킨 일등 공신인 도현은 지레 찔려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 나라고 그럴 줄 알았겠어….
…그래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는데.
“…….”
제 잘못이 아님을 앎에도 도현은 책임감을 느꼈다.
“…배우는.”
느릿하게 말문을 떼는 소년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도현은 제가 뭐라고 이런 말을 남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해야 하니까 했다.
“배우는 자기 몸 관리까지가 능력이야. 연기력이 널뛰면, 그러니까 그네처럼 매번 변화폭이 크면 안 되고, 배우의 컨디션으로 촬영에 지장을 줘서도 안 되니까.”
말하면서도 양심이 쿡쿡 찔렸다.
땐 촬영 중 공황이 오고, 을 찍을 땐 개인사로 인해 동료 배우와 마찰을 빚었던 도현은 그 사실을 여기 있는 아이들이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캐서린이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를 걱정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도현은 양심이 아팠다….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뱉게 됐지.’
도현은 오늘 촬영이 끝나면 그의 인성을 반성해 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결백하게 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도현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혹은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에게 부끄럽지 않게.
“계속 촬영할 수 있겠어?”
“고작 생채기인데 뭘. 그리고 밴드도 붙였잖아.”
캐서린이 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알록달록한 과일이 그려진 밴드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던 캐서린이 시원하게 웃었다.
“나름 멋지지 않아?”
대체 뭐가?
역시 요즘 애들의 정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촬영할 부분은 노래의 하이라이트이자 훅 부분이었다. 다른 은어로는 ‘사비’라고도 부르는 구간이기도 했다.
“캣이 뛰어내린 김에 장면을 조금 변경하자.”
“어떻게?”
“이렇게… 뛰어내린 부분에서 창문까지는 찍혔거든. 그러니까 드론이 진 방에서 창문 밖으로 따라 나간 다음에, 이렇게, 방향을 틀어서 집 쪽을 찍는 거야. 거기에 아무도 없다가 캐서린이 아래에서 위로 불쑥 올라오는 거지.”
브라운은 귀찮은 일에 걸렸다는 것처럼 굴던 것치고는 상당히 열정적이었다.
아니, 그냥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 고마워, 도리토스!
며칠 전 통화했던 할리의 목소리가 도현의 귓가에 울렸다.
- 네 덕분에 요즈음 브라운이 밖에 나가고 있어!
브라운은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리는 편이라, 한번 게임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전까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할리는 그런 브라운을 걱정했고.
그 마음이 기특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또래 애가 할 생각이 맞나.’
그보단 부모님….
“왜 기분이 나쁘지?”
브라운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렸다.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조니에게 말을 걸었다.
“조니, 너도 혹시 연기할 때 도움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요!”
조니가 펄쩍 뛰며 거부하자, 도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몸이 시키는 대로 반응했던 조니는 뒤늦게 당황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제가 감히 도현을 귀찮게 해서야 되겠어요? 어차피 저는 캣처럼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
“그, 도현이 싫다는 건 아니고!”
가만 놔두면 울 기세라, 도현은 대충 수긍해 주었다.
“그래.”
사실, 조니가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고. 제니퍼처럼 세뇌할 줄 안 것 아닌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했다가 캐서린이 벌인 돌발 행동 탓에 놀랐는데, 또 그러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튼 무슨 오해가 생긴 건지 알겠는데….
‘굳이 풀진 않아도 되겠지?’
캐서린은 그쪽에서 먼저 요청해와서 도움인지 뭔지 모를 행동을 취한 거고. 그게 아니라면 굳이 부담을 줄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도현이 조니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촬영 준비나 하자.”
“넵!”
힘찬 대답을 뒤로하고 도현은 머릿속으로 다음 장면을 그렸다.
다음 장면은 캐서린이 골목길로 달려 나가는 장면. 그리고 조니와 다비드, 진은 인도에 서 있는 행인 역이었다.
장면을 설명하자면 이랬다.
창문에서 뛰어 내린 캐서린이 울타리를 넘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거리를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리는 탓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조니가 깜짝 놀라서 멈추고, 다비드와 데이트하던 진이 옷에 스무디를 엎고 기겁하다가, 대충 사과하고 지나가는 캐서린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골목길에 도착하는 장면까지가 첫 번째 훅의 촬영 분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