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화. Debut as a ?? (3)
화요일, 샌디에이고 한 거리.
오후 두 시의 거리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건 아니라, 가끔가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산책하거나, 산책줄을 맨 강아지가 거리 곳곳에 호기심을 보이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강아지의 주인이자, 동네 이웃 주민이기도 한 엠마 씨가 말을 걸어왔다.
“얘들아, 뭐 하는 거니?”
“엠마 씨!”
“어머, 진이네. 안녕.”
“시에나랑 산책하는 거예요?”
시에나?
“응, 얘가 하도 산책하자고 졸라대서. 잠깐 공원에 갔다가 오려던 참인데….”
왕!
제 얘긴 줄 알았는지 웃는 상의 사모예드가 짖었다. 복슬복슬한 흰 털이 부슬거리며 날렸다. 아, 쟤가 시에나….
“네 이름이 시에나야? 우쭈쭈!”
“털 완전 부드러워!”
아이들은 이미 꿀에 꼬인 꿀벌처럼 시에나 주위를 둘러싼 후였다.
제일 먼저 달려간 조니는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눈을 빛내고 있어, 누가 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도현은 조금 난감한 눈으로 꼬리를 흔드는 사모예드와 그 주인을 번갈아 보았다.
애들은 반가워서 그런 거지만, 강아지나 주인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도 있었다. 도현은 움찔거리는 손끝을 무시했다.
우르르 몰려가 온갖 의성어를 내는 아이들과 달리,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도현은 조금 눈에 띄었다.
“너는 강아지 안 좋아하니?”
“…아뇨, 좋아해요.”
“그러면 같이 인사해주지 않을래? 아까부터 시에나가 너만 쳐다보던데.”
그녀의 말대로, 아이들의 예쁨을 한가득 받는 중인 시에나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도 시선은 이쪽을 고정한 채였다. 그 집요하고 바둑돌처럼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혹시 시에나도 나처럼 부담스러워할까 봐 안 다가온 걸까?
보통의 동물은 도현을 발견하면 일단 치대고 보았다. 그건 본능과도 같은 행위였다. 마치 개다래에 홀린 고양이와 고기 냄새에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처럼….
애초에 주저했던 것이 그 본인과 주인의 의사 탓이었기에 그 문제가 해결된 도현은 한 발짝 내디뎠다.
그리고 더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왕!
귀신같이 알아챈 시에나가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악!”
이미 예능 프로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 있던 도현은 놀라지 않았지만, 한참 시에나의 털이 벗겨지리만치 쓰다듬던 다비드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른 다비드가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시에나를 보았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는 얼굴이었다.
“푸흣.”
도현은 웃음을 참아내려 노력해야 했다.
‘매사 심드렁한 척하면서 동물은 평범하게 좋아하네.’
그게 꽤 귀여웠지만, 티 내지 않았다. 티 냈다간 일 년 치 욕을 한 번에 들을 수도 있었다. 도현은 세상에 얼마나 다채로운 욕설이 존재하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와! 강아지가 도현을 되게 좋아하나 봐요!”
“쟤 원래 동물한테 인기 많아.”
조니가 신기해하자, 브로콜리로 인해서 도현이 동물에게 받는 편애(?)를 알고 있던 브라운이 태연히 답했다.
“동물도 도현은 알아보나 봐요!”
조니의 존경의 시선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닐 텐데….
도현은 애매하게 웃다가 제 종아리 앞에 나동그라져 온몸으로 바닥을 쓰는 시에나를 쓰다듬어 주자, 시에나가 좋아 죽으려 했다.
“애가 잘생긴 걸 알아보나.”
엠마의 중얼거림에 조니가 눈을 깜빡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다비드는 못생겼단….”
툭, 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다비드가 조니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다비드, 항복! 항복이요!”
“안 들리는데? 못생겨서 그런가.”
“진짜 속 좁아!”
“뭐?”
“악! 잘못했어요!”
헤드락이 걸린 조니가 버둥거렸다.
“하하, 사이좋네.”
한창 악마 같은 열 살과 여덟 살 아들이 있기에 익숙했던 엠마가 온화하게 웃었다.
도현과 진을 비롯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둘을 무시했다.
조니는 도현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깐족거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에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조니의 비명이 구슬프게 흩어졌다.
“원래 저쪽 길로 가려고 했는데 애가 이쪽으로 오지 뭐야. 그게 너 때문이었던 거 같네. 혹시 우리 시에나랑 구면이니?”
“오늘 처음 봐요.”
“그래? 신기한 일이네.”
엄마를 닮아 눈이 높은 모양이라고 가벼이 생각한 엠마가 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뭐 하던 중이었니? 저건 카메라 같은데.”
“뮤직비디오를 찍으려고요!”
“뮤직비디오?”
“네, 제 밴드부의 뮤직비디오요!”
“세상에.”
엠마는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그리고 그녀는 여기 있는 모두가 밴드부라는 것과 뮤비에 출연할 배우란 사실에 무척 흐뭇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아주 멋지구나, 너희.”
멋진 일을 보고 감탄한다기보다는 기특해하는 게 컸지만, 아무튼 긍정적인 반응에 아이들의 어깨가 위로 솟았다. 도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짜 뭘 믿고 저렇게 귀엽지.
그사이에도 진은 홍보를 까먹지 않았다.
“엠마 씨도 유튜브 구독해주실 거죠?”
“그럼. 당연히 구독해야지. 유튜브 이름이 뭔데?”
“‘Freaky child official’이요! 밴드 이름이 Freaky child예요.”
“좋아, 꼭 구독할 테니까 영상 올라가면 알려주렴.”
“그럴게요!”
슬슬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저마다 시에나와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깨달은 아이들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라, 더 조르는 아이는 없었다.
문제는, 강아지는 있었단 거였다.
“얘가 왜 이래. 시에나!”
왕!
“가야지, 시에나. 공원 가고 싶다며?”
왕왕!
“시에나. 너 엄마 말 안 들으면 간식 안 준다?”
웅왕! 왕! 끼잉….
두 앞발을 길게 쭉 뻗은 시에나가 낑낑거렸다. 누가 봐도 가기 싫다는 의지였다. 몇 번 낑낑거리던 시에나는 도현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더 있고 싶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엠마가 눈을 찡그렸다.
“이걸 어쩌지….”
“음…. 엠마 씨, 바쁜 게 아니라면 같이 있는 게 어때요? 저희는 상관없는데.”
“그래도 되니?”
“시에나랑 같이 있으면 저희야 좋죠! 그치, 애들아?”
진의 물음에 아이들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 커다랗기에 더 귀여운 털 뭉치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결국 엠마는 시에나에게 두손 두발 다 들어버렸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난 저쪽 벤치에 앉아 있을 테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도현은 자연스럽게 산책줄을 건네받았다.
“……?”
뭐지.
굉장히 나의 의사가 배제된 채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 기분이었다. 아니,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산책줄의 감촉을 보건대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앙왕!
시에나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래, 좋으면 된 거지.”
뭐 어쩌겠는가. 아이들이 다 그러고 싶다는데. 아, 강아지도 말이다. 도현은 항복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청객이 생겼지만, 촬영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럼 우리 스케이트보드 장면 수정하는 거 어때?”
완전히 예정대로는 아니었다.
“수정?”
“솔직히 조니가 보드를 잘 탄다지만 조금 걱정되거든.”
진의 말에 조니가 툴툴댔다. 저 진짜 잘 탄다고요. 볼멘소리에 도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진의 말에 동의해.”
“도현까지!”
“조니,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오늘 캐서린도 다쳤으니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제가 얼마나 뛰어난 보더인데요? 제 친구 중에서 제가 제일 잘 탄다고요.”
“하지만 촬영에 신경 쓰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보호 장비라도 착용하면 모를까….”
“엑, 그건 겁쟁이나 하는 거예요.”
조니는 이상한 곳에 고집이 있었다. 보호 장비는 거슬리고 멋이 없다나. 아마 후자의 이유가 제일 클 것이다.
도현은 속이 많이 썩었을 거 같은 조니의 부모님께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그때, 진이 조니를 달랬다.
“일단 들어봐. 스케이트보드 대신에 이건 어때?”
“…뭔데요?”
입이 조금 튀어나온 조니가 팔짱을 꼈다. 방어적인 태도였다.
“네가 시에나를 산책시키는 중인 거야.”
“…시에나를요?”
꽉 마주 잡았던 팔짱이 조금 느슨해졌다.
클라인과 브라운이 시선을 마주쳤다.
혹했네. 응, 혹한 듯. 대충 그런 텔레파시였다.
“잘 생각해, 조니. 합법적으로 시에나와 놀 수 있는 기회야.”
“그거야 촬영 끝나고….”
“엠마 씨는 일정이 없니?”
“으으.”
조니가 신음했다.
조니의 마음속에서는 뮤직비디오에서 자신의 멋진 보드 실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과 일 초라도 더 시에나와 놀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중이었다.
그때, 도현이 은근슬쩍 시에나의 등을 토닥였다. 도현의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시에나가 조니에게 다가가 그의 주변을 스윽 돌았다.
복실한 꼬리가 조니의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윽!”
조니의 패배였다.
엠마의 흔쾌한 허락–그럼 우리 시에나의 이름도 넣어주는 거니? 그렇다고? 하하! 귀여워라!-까지 받아낸 아이들은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우쭈쭈쭈! 아구, 그랬쩌요?”
조니는 튕기던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높은 행복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다비드가 혀를 찼다.
“칫.”
아까 받은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게 분명했다.
도현은 숨죽여 웃었다.
그리고.
“촬영 시작하자!”
다음 장면의 첫 사인이 울렸다.
* * *
(Can you imagine?)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첫 번째 벌스의 마지막 코러스 부분.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곡의 훅 파트.
The girl saw the boy
소녀는 소년을 봤고
캐서린이 달렸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나부꼈다. 거침없이 달리는 소녀는 그 무엇도 앞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몇 걸음 앞에서, 그녀를 마주 본 드론이 하늘을 날며 캐서린과 그 뒤의 화창한 풍경까지 담아냈다.
and the boy saw the girl
소년은 소녀를 봤대
왕!
“으앗, 시에나!”
앞을 달려가는 캐서린에 덩달아 흥분한 시에나가 날뛰었다.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던 조니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시에나를 꼭 껴안았다.
“아야.”
그러다 나동그라졌다.
“…조니!”
도현이 황급히 달려오자 조니가 손을 휘저었다. 괜찮다는 사인이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생각이 없는 도현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괜찮은데….”
멋쩍게 중얼거린 조니는 제 뺨에 와닿는 부드러운 털을 느꼈다.
캉?
시에나가 조니의 얼굴 근처에 앉아서 헥헥댔다. 꼭 눈치라도 보는 것 같은 모습에 조니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도현이 한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읏차, 도현의 손을 잡고 일어난 조니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하나도 안 다쳤어요. 봐요.”
그를 살피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다행이다.”
도현의 반응에 조니가 코웃음 쳤다.
“보드 탔으면 이렇게 넘어지지도 않았을걸요.”
“그래, 그래. 미안해.”
“…왜 기분이 더 이상하지.”
떫은 낯이 된 조니가 도현의 등을 떠밀었다.
“전 괜찮으니까 다시 촬영하러 가요.”
도현이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낸 후.
잠깐 소강했던 촬영이 다시 진행되었다.
캐서린은 다시 달렸고, 진과 다비드는 클라인의 신호가 떨어졌을 때 거리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수다를 떨 때였다.
캐서린이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갔다.
“…푸큭!”
옆에서 브라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은 진의 옷에 엎어지는 거였는데….
“…하?”
다비드가 엉망이 된 제 바지를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오른쪽 바지춤부터 허벅지까지 스무디가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그가 황당하게 눈을 뜨자 캐서린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내고 지나쳤다.
캐서린은 사라졌지만, 도현은 그 자리에 남았다. 황당한 다비드의 표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다가, 어느 순간 렌즈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야, 언제까지 찍냐?”
“아, 미안.”
도현이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표정이 재밌어서.”
“흐하하핳!”
진이 배를 부여잡고 행복해했다.
무어라 욕을 하려던 다비드는 진이 웃는 걸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선 포기한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끼는 바지였는데….”
“지금도 나쁘지 않아.”
“아오.”
열받은 다비드에 도현도 행복해졌다.
From a strange place
이상하고 낯선 그곳에서
아까부터 계속 달리던 캐서린이 한껏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애들아! 나 언제까지 달려?!”
“촬영 아까 끝났어!”
Something special is happening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 거야
“언제?!”
“너 다비드 지나쳐 갈 때!”
I know it's crazy
나도 이게 미친 걸 알아
반대편으로 다시 뛰어온 캐서린이 브라운의 명치를 쳤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억! 아니, 왜 나한테….”
But this is a real story
하지만 이건 진짜 이야기야
모두가 행복한 촬영이었다.
도현은 브라운의 앓는 소리를 슬쩍 외면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