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6화. Debut as a ?? (5)
상황의 원인을 안 도현이 한 걸음 나설 때였다.
“다 봤으면 가.”
시큰둥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통보처럼 말한 다비드는 그대로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몇몇 아이들이 황급히 문을 잡지 않았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다.
재빨리 문을 붙잡은 아이가 항의했다.
“이렇게 바로 닫아버리는 게 어디 있어!?”
보란 듯 귀를 후빈 다비드가 말했다.
“여기 있네.”
“치사하게…. 야! 문 닫지 말라니까!”
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아이들에 다비드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대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후, 벽 쪽을 향해 턱짓했다.
“저거 보여?”
“저기 뭐… 시계?”
“어. 보여?”
“보이는데…. 시계가 왜?”
“다섯 시에 여기에 수업이 있어. 우린 그 전까지 해야 할 일을 끝내야 하고. 그런데 네가 벌써 오 분이나 잡아먹었어.”
“그….”
“아, 지금 일 분 또 지났다.”
태연히 나온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아이들을 움찔하도록 만들었다.
“조, 조용히 구경만 할게.”
“흠….”
“방해 안 한다니까?”
다비드는 꿈쩍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어?”
팔짱을 끼며 말하는 다비드에 도현은 슬슬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애초에 원인도 나고….’
책임감을 느끼며 입을 열다가.
“잠깐만!”
성량 좋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진이 책상 사이사이를 빠르게 움직여 문 앞에 도착했다.
“너희, 구경하고 싶다고?”
“어, 응….”
“그으래?”
진이 복도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유튜브에 출연하고 싶은 사람 손!”
아이들이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상황 파악이 덜 된 탓도 있었다.
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덧붙였다.
“선착순 열 명!”
모인 아이들이 딱 열 명이었다는 것은,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든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 * *
칠판 앞.
찬란한 금발을 하나로 틀어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소녀가 칠판을 탁탁 두드렸다.
흰 와이셔츠와 안경, 그리고 손에 들린 나무 막대기. 그러한 소품들은 소녀가 맡은 역할이 선생님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빙글.
칠판과 소녀를 비추던 카메라가 돌았다. 저마다 책을 펼치고 수업에 집중한 아이들. 그 고요하고도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카메라가 계속 이동했다.
책상과 책상 사이, 아이들 틈바귀 속으로 파고들다가.
창가 옆.
오후의 햇빛에 젖은 책을 외면한 채 창밖을 바라보는 소년 앞에 멈춰 섰다.
정(靜)적이다.
소년을 표현할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소년은 오른손에 턱을 괴고,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깥은 오후의 햇살로 가득 차 부드러운 은총이 가득했지만, 자신만의 생각에 젖은 소년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브라운은 순간 그가 촬영 중이란 사실을 잊은 게 아닐까 하는 멍청한 걱정이 들었다.
그만큼 도현은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 위로 똑딱똑딱, 움직이는 시계가 아니었다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He was a boy
그는 소년이었어
who grew up in Boston
보스턴에서 자라난
띵, 디리딩!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저마다 책과 가방을 챙겨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다.
소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when the rain fell from the blue sky
푸른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면
he just looked at the sky
그는 그저 하늘을 바라봤대
툭, 제 친구를 기다리던 소년, 클라인이 도현의 어깨를 쳤다. 도현은 하늘에 고정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클라인이 가자는 것처럼 턱짓했다.
도현이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터벅터벅.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그러다가 문턱을 넘기 직전,
문득, 무언가 놓고 온 게 생각난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구름이 움직이며 태양이 드러났고, 햇살이 매끄러운 뺨 위로 빛의 선을 그렸다.
Imagine’ of what would happen if the city got under
도시가 바다에 잠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면서
* * *
“비가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도현의 첫 촬영분을 확인한 진이 안타까이 외쳤다. 다른 아이들도 진의 의견에 공감했다.
도현의 촬영분은 완벽했다.
딱 한 가지.
날이 너무 화창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늘 비 안 내린대?”
“밤에는 온다는데 낮에는….”
“씁, 아쉽네.”
그들이 아쉬움을 달랠 때, 캐서린이 한마디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어차피 보스턴도 아니잖아.”
가사에 따르면 오늘 촬영은 보스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여건상 샌디에이고에서 촬영하게 되었다지만, 본래 소년은 보스턴에서 자랐으니까.
“그건 그렇네.”
맹하니 수긍하는 클라인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다시금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문 앞에는 그들의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아이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던 소녀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아.”
소녀의 뒤로는 고개를 빼꼼히 빼 들은 아이들이 옹기종기하게 모여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거, 우리도 같이 할 수 있어?”
“어….”
그 수에 놀란 클라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금발의 소녀를 찾았다.
그때,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 모두 구면이었다.
학원에 오자마자 인사를 했던 원장님이었으니까.
그녀는 조금 머쓱히 웃었다.
“하하, 음, 애들이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일 줄은 몰라서….”
이 학원의 원장, 메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저 조금 신기하고, 재밌는 이슈를 알려주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몰릴 줄은….’
그녀의 경솔한 행동 탓이었다.
민망해진 메릴다는 그 기색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혹시 많이 방해되니?”
방해된다고 하면 아이들을 해산시키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진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방해는요! 괜찮아요!”
“저, 정말이니?”
“네, 물론이죠!”
진이 활짝 웃었다.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였다.
* * *
시끌벅적한 복도.
아이들이 저마다 왁자지껄 대화하며 두 소년을 지나쳐 갔다. 클라인과 도현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정해진 길을 걸었다.
나중에 이 부분은 도현이 지나치는 창문에 흘러가는 구름을 입힐 예정이었다.
He waited
그는 기다렸대
till the thirteenth cloud passed
열세 번째 구름이 지날 때까지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구름도 유유히 흘러갔다. 도현이 멈칫했다.
(What do you think?)
(어떻게 됐을 거 같아?)
휙! 도현이 창문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러자 창문에 둥둥 떠다니던 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보이는 건 평범한 복도 창문뿐이었다.
He's still on the road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고
사람은 때론 이상한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갑자기 길을 가다가 춤을 추고 싶어질 수도 있고, 수업을 듣다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엉뚱한 상상들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 멀쩡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우습고 이상한 충동을 억제하는 방법을.
And the cloud is moving
구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어
진은 ‘Freaky Child’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설명해준 적이 있다. 영화 에서 따온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 모두가 괴짜. 너도나도 괴짜야.
- …뭐?
-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걸 두고 기이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세상에 모두에게 이해받는 존재가 있을까?
- …….
-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 거야. 모두가 모두에게 조금씩은 괴짜일 수밖에 없어. 조금 더 이상하고 조금 덜 이상한 것 정도의 차이지.
“야, 뭐 하냐고.”
기다리다 못한 클라인이 도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현실로 돌아온 도현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잇새로 삼키며 메고 있던 가방을 클라인 품에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가방을 넘겨받은 클라인이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도현은 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어차피 이상한 거, 괜히 멀쩡한 척하지 말고 이상하게 살자’ 이거였지….
잘 가다가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진다워서 기분이 절로 유쾌해졌다.
무어라 말하는 클라인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He said, “what the hell?”
그는 말했어 “이게 말이 돼?”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소녀를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 소년을 보여준 후.
화면은 두 개로 분할되어 거리를 달리는 두 소년 소녀의 모습을 비춘다.
소녀의 장면은 전날에 이미 촬영을 마쳤다.
조니, 시에나, 다비드와 진을 지나쳐 달린 캐서린이 즉흥적으로 조니의 스케이트보드를 빌려서 보드로 조금 더 달리다가-왜 난 안 됐는데 캣은 되냐는 조니의 항의가 조금 거셌다-, 내려서 엉망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다 간주가 잦아들 때쯤 보인 골목길에 몸을 쏙 넣었다.
오늘은 도현의 차례였다.
바이올린과 함께, 조금은 잔잔하고 몽환적이던 선율이 순식간에 경쾌하고 유쾌하게 바뀐다.
Just leaving with stupid thoughts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무작정 떠나고 있어
놀란 아이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달리다가.
“뭐야!”
수업 중인 교실 문을 활짝 여는 기행을 저질렀다. 도현은 저에게 집중된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또다시 찾아온 학원 아이들을 기점으로, 수없이 수정해 완성했던 콘티는 완벽한 쓰레기가 되었다.
예정에도 없던 배우들이 엄청나게 생겨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에 아쉬워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수많은 공짜 인력과 건물주(?)의 흔쾌한 허락이라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그리고.
- 네가 할 수 있는 제일 유쾌하고 미친 짓을 해줘!
진은 도현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미친 짓이라니.
그런 걸 해본 적이 있어야지….
아니, 있긴 한가. 아무튼.
도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뭐 어쩌겠나. 그렇다고 싫다고 뒤돌아서 갈 것도 아니고….
도현은 캐서린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그리고 춤을 췄던가…. 도현은 멀뚱히 칠판 앞에 서 있는 원장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얼떨결에 한 바퀴 돈 원장 선생님이 바보 같은 표정이 되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녀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도현은 그녀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단상을 훌쩍 뛰어 내려갔다.
푸에떼 턴.
양쪽 팔을 우아하게 펴내면서 한쪽 무릎을 옆으로 굽혀 제자리에서 도는 턴이었다. 그 자리에서 네 번 돈 도현은 네 번째 돌자마자 책상 사이, 비어 있는 공간으로 파고들어 뒤로 달려갔다.
그대로 높이 점프해서 공중에서 두 바퀴 돈 뒤, 시선을 뒤에서 앞쪽으로 바꾸었다. 칠판에 선 원장 선생님과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그대로 양팔을 벌려 한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무릎은 땅에 댄 채로 취하는 자세.
뒤 파세 뚜르 앙 레르였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멋있긴 한데…, 멋있는데….
‘미쳤나 봐….’
그대로 자세를 마무리한 도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아하게 랑베르세를 하며 뒷문으로 나갔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남은 이들은 넋이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