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18화 (519/582)

제518화. Debut as a ?? (7)

지이익.

바이올린 가방의 지퍼를 내린 소년이 조심스레 그가 아끼는 악기를 꺼내었다. 짙고 풍부한 광택을 머금은 바이올린이 형광등 빛을 받고 매끄럽게 빛났다.

악기를 쥐는 손아귀 힘은 결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수없는 경험과 반복으로 얻어낸 숙련된 악력으로 바이올린을 쥔 채 도현은 케이스에서 활을 마저 꺼냈다.

그대로 현을 가로지르기 전, 도현은 창밖을 응시했다.

그날로부터 오 일이 흘렀다.

- 다시 말해봐. 다시 말해 보라니까?

- 에이, 캣. 네가 잘못 이해한 거겠지. 설마 지금 와서 몸을 쏙 빼내려는 거겠어? 혼자?

- 그래요, 도현. 저만 도현을 소중하게 여겼던 거죠? 하지만 이해해요. 도현은 스타고 저는 평범한 애니까…. 도현의 눈에는 제가 별로 차지 않았겠죠….

- 내가 분명히, 우리 밴드 멤버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한 건 이 도리토스가 아닌가? 마트에 진열된 도리토스에 대고 혼잣말을 했던가?

아이들이 도현을 둘러싸고, 그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올 때까지 압박을 가했던 날로부터….

잠깐 질린 낯이 되었던 도현이 헛기침했다. 그리고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도현은 너무 자주 차고 다녀서 이젠 한 몸 같아진 반지를 한쪽에 잘 빼두었다. 반지 안쪽에 음각된 이니셜, ‘D.J.N’이 언뜻 보였다.

참 이상하다.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소속감, 그리고 애착. 그러한 것들을 진은 손쉽게 얻어내고, 또 도현까지 물들게 했다. 그 옆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속한 세계에 일부가 되었다.

니콜라스와 친해진 것도.

델마 아카데미에 섞여든 것도.

Freaky Child와 만난 것도.

모두 진으로부터였다.

진은 늘 도현을 대단하게 여기지만, 정말 대단한 건 자신이 아니라 진이었다. 그저 그러고 싶다는 이유로 손을 뻗어, 결국엔 자신의 일상에 편입시키는 그 소녀가.

도현의 마음속에, 약한 바람이 불었다. 그건 친구를 향한 애정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존경심이기도 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기도 했다.

역시 사랑의 슬픔을 진의 앞에서 연주하길 잘했다.

도현은 설핏 웃었다. 그리고선 바이올린을 다잡았다.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내가 해내야 했다.

오롯이 나 스스로.

사납게 치솟은 바이올린의 음이 공중을 가득 채웠다. 도현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바이올린과 나.

둘만이 이 공간에 남는 익숙한 감각에 점차 깊이, 더 깊숙이 침잠하여,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연주했다.

* * *

“헨리, 또 피아노?”

잠에서 깬 알리사가 비몽사몽하게 물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던 헨리가 조금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주었다.

“약속한 게 있어서 말이야.”

“휴식기에도 바쁘네….”

거의 다 뭉개진 음성을 용케 알아들은 헨리가 작게 웃곤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더 자, 알리사.”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알리사가 완전히 잠이 든 걸 확인한 헨리는 조심스레 마저 일어났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방을 나와 바깥을 확인해보니 해가 뜨기도 전인 어두운 새벽이었다.

헨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이렇게 진심이 될 줄은 몰랐는데.

처음, H를 소개해준다 했을 때도 단순 호기심이 컸다.

어차피 휴식기라 여유롭겠다, 호기심을 푸는 대가로 반주를 맡아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밀턴에게 빚을 지우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만난 H의 정체를 확인했을 땐 놀라웠다. 경악했다. 나아가 의심했고, 끝내 그 의심은 소년이 H인지가 아니라 소년이 가진 비범한 실력에까지 닿았다.

그래. 인정하자면, 도현이 가진 실력 그 자체보다,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지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헨리의 머릿속엔 그 속내를 파보고, 진실을 알아낼 생각이 가득했다. 그는 신기하고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였으니.

하지만.

‘그 사랑의 슬픔.’

지난 일요일.

헨리는 스테파노스의 연락을 받고 잠시간 고민했다.

두 곡의 연습은 틈틈이 했다.

그렇다 해서, 내가 가서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는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오라 가라 불러대며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음악가란 게 그런 존재였다. 쓸데없는 고집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그것으로 먹고살아가는 존재.

그 고민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헨리는 한 박자 늦게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용한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헨리는 후회했다.

저 너머에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

아주 작은 소리는 헨리를 감쌀 듯 다가오다가, 안개처럼 흩어졌음에도 헨리는 전율했다.

왜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저 연주를 놓쳐서는 안 됐는데.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물론 기교적으로 무척 훌륭했다.

하지만, 애초에 크라이슬러의 소품은 쉽게 쓰인 곡이었다.

쉽게 연주하고, 쉽게 듣고.

어느 정도 수준이야 요구하지마는 다른 악마적인 곡들과 비교하자면 그랬다.

그런데도 저 사랑의 슬픔은 분명히 특별했다. 조금이라도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이라면, 아니 문외한이더라도 그와 같이 생각했을 터였다.

도현이 보여주었던 악마의 트릴과는 또 달랐다. 아니, 악마의 트릴을 먼저 보았기에 이토록 전율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위태롭고, 불안정하며, 그것에서 기인한 강렬함이 매혹적이라 생각했던 연주자가, 저토록 섬세하고 다정한 연주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대단한 역량이었다.

헨리는 그들이 처음 스튜디오에서 만난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현이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스테파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 밀턴, 어째서 그를 설득하지 않았나? 너라면 알 텐데. 저 아이는 배우가 아니라 음악가를 해야 할 운명이야.

그리고 밀턴은.

- 자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도리, 큼, 도현은 천생 배우야.

- 그게 무슨 소린가?

- 듣다 보면 알게 될 거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한들, 헨리가 생각하기에 그의 음악적 재능이 더욱 특별했다.

헨리가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된 건 두 번째 만남에서였다.

도현의 사랑의 슬픔을 듣고 나서.

‘밀턴의 말이 맞았지.’

도현은 대단한 연기자였다.

순식간에 감정을 뒤바꾸고, 표현하고, 전달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연기자.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나니 조금 자유롭다고,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엉망진창이라고 여겼던 도현의 레퍼토리도 이해되었다.

악마의 트릴, 크로이처 소나타, 사랑의 슬픔, 멜로디, 그리고….

‘달빛.’

마지막 곡을 듣고 그가 얼마나 헛웃음 지었던가?

그는 애초에 <달빛>으로 유명해진 연주자였다. 그런 그가, 음반 제일 마지막에 똑같은 곡을 수록한다라….

과거의 자신에게 정면으로 내미는 도전장.

그 외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하핫….”

헨리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무모하고, 당돌한 연주자였다. 겁을 상실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면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의 음반 자체도 흥미로웠다.

악마적이고, 불안하고, 위태롭게 시작하는 첫 곡. 그리고 시련을 맞이한 인간이 그러하듯, 충돌하고 격돌하는 두 번째 곡. 나아가 깨달음을 얻어낸 세 번째 곡과 평온을 노래하는 네 번째 곡.

그리고 마지막.

다시 제자리, 혹은 그 반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이라면, 똑같은 곳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전과는 전혀 다를 테니까.

그의 음반은 그 자체로 일대기였고, 혹은 연극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구성할 수 있는 음악가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하나하나의 감정을 원하는 의도대로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연기자는 도현뿐일 것이다.

말 그대로 도현이기에 할 수 있는 음반이었다.

주방에 들어간 헨리는 찬물로 목을 축였다. 짧게 몸을 이리저리 틀며 스트레칭까지 마친 그는 연습실로 향했다.

계속해서 놀라움을 선사하는 상대다.

기꺼운 일이고 즐겁다.

이젠 그 실력의 경위는 어찌 되든 좋단 생각이 들었다. 경위가 아니라, 실력 자체가 더 그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그렇지만, 그 또한 연주자.

‘계속 놀라고만 있어서는 자존심이 살지 않지.’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자라나는 아이의 코를 한번 납작하게 눌러주어야 위엄이 살지 않겠는가?

헨리의 얼굴에 즐겁고, 조금은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아침이다.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직은 컴컴한 하늘, 묘하게 서늘한 공기, 그리고 고요한 집. 모두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음에도 도현은 그 모든 걸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부스럭, 이불을 걷고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이부자리까지 단정히 정돈한 도현은 화장실로 가서 세안했다.

“…오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도현은 우뚝 멈춰 섰다. 입 밖에 내고 보니 순식간에 현실감이 닥쳤다.

오늘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헨리를 만나는 날.

도현은 빠르게 자신을 점검했다.

지금 내가 충분히 준비되었나?

분석에 아쉬운 부분은 없었던가?

빠트린 부분은? 연주에 소홀했던 부분이나 표현이 미흡한 곳은?

순식간에 생각이 엉켰다.

“후우….”

도현은 깊이 심호흡하며 아귀처럼 달라붙은 생각의 찌꺼기들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덕지덕지 달라붙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단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래.”

최선을 다했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 모든 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전부였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 그러면 된 거야.’

도현은 얼굴을 마저 닦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또렷하고 총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삼 일간의 연습은 헨리의 집에서 하기로 했다.

지난번 녹음 땐 스튜디오를 빌려 연습했지만, 사실 스튜디오는 그런 식으로 써도 되는 곳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스테파노스 프로듀서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습 장소라곤 자신의 본래 집밖에 없던 도현은 난감해하며 헨리에게 물어보았고, 헨리는 호쾌히 그의 집에 오라고 했다.

너무 사적인 공간 같았고, 또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자신 때문에 배려해주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자 헨리는 단호히 말했다. 그편이 제일 편하다고. 결국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밀턴의 배려로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한 도현은, 헨리의 집으로 추정되는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같이 들어가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오늘은 헨리와 동등한 협연자로서 방문했다. 그를 보호할 누군가는 필요치 않았다.

도현은 단호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으로요.”

“그 정도는 별것 아니란다.”

“그래도 감사해요.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호의에요.”

“그렇다면 헨리에게 지지 않고 와주렴. 그거면 충분한 보답이 될 것 같아.”

“…노력해 볼게요.”

도현의 긴장한 기색에도 밀턴은 장난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도현에게 다시금 잘하라고 격려의 말을 해준 뒤, 차를 끌고 떠났다.

홀로 남은 도현은 짧게 심호흡한 후 벨을 눌렀다.

현관 벨 소리가 짧게 울리고.

딸칵거리며 이어폰이 연결되는 소리에 도현이 입을 열었다.

“아, 헨리. 오랜만이에요. 저 도현….”

그리고 채 말을 마무리하기 전에.

철컥.

곧바로 문이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