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19화 (520/582)

제519화. Debut as a ?? (8)

문이… 열린 거지?

도현은 머뭇거리다가 철컥 소리가 난 문을 천천히 밀었다. 문은 별다른 소음 없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열렸다.

“문 열다 세월 다 가겠군.”

검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위로 향했다. 머리 하나 정도 높은 위치,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에 왁스를 바르지 않은 남성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계셨네요?”

의외란 기색에 헨리가 팔짱을 꼈다.

“왜. 내가 밖에서 널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아?”

“그건….”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입 밖에 내기엔 조금 민망했던 터라 말을 뭉갰다. 그냥 적당히 웃음으로 넘길 셈이었다.

“맞아.”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네?”

헨리가 팔짱을 풀자,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린 와이셔츠 소매가 조금 흘러 내렸다.

“놀이동산 가기로 약속한 어린애처럼 아침부터 눈이 일찍 떠졌는데,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거 아니겠어? 너한테 열 시가 아니라 아홉 시까지 오라고 말할 걸 싶었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지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그의 가장 편안한 공간이기 때문일까. 평소처럼 몸에 딱 맞는 옷이 아닌 넉넉한 품의 셔츠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헨리는 그간 봐 왔던 모습 중에서 제일 느슨해 보이기도 했다.

“자, 들어와. 내 집에 온 걸 환영해.”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환영도요.”

느슨히 풀린 헨리와 달리 도현은 새로운 공간에 들어선 햄스터처럼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조금 딱딱하게 나간 대답에 헨리가 어깨를 으쓱이곤 앞장섰다.

“저기가 내 집이고 옆에 있는 건 별채야. 참고로 내 연습실은 별채에 있지. 물론 집 거실에도 피아노 한 대가 있지만 말이야.”

“그럼 연습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네요. 그곳에 제가 가도 된다면요.”

“시원시원해서 좋네.”

헨리는 곧장 별채 쪽으로 향했다.

만약 도현이 평범한 손님 대접을 원한다면, 초대자로서 적당히 집을 소개해주고 차를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런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굴었고, 그건 헨리의 생각과도 같았다.

“집 소개는 점심 먹을 때 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헨리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실력을 좀 볼까.”

“…좋아요.”

도현은 양옆으로 늘어트렸던 손을 말아 쥐었다. 이른 아침부터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을 확인한 헨리는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별관은 말 그대로 연습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커다랗진 않지만, 벽은 방음이 잘되는 마감재로 되어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뒤쪽 벽에는 음반과 책, 악보가 잔뜩 들어찬 커다란 책장이 늘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작은 다탁과 소파가 있었다. 소파 옆에 의자도 있는 걸 보아, 누군가와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 같았다.

“뭐 좀 마실래?”

“일단은, 연주부터요.”

“적극적인 건 좋네. 아, 그 가방은 저기 위에 올려두면 돼.”

도현은 헨리의 말대로 바이올린 가방을 다탁 위에 올렸다. 지퍼를 열고 바이올린을 꺼냈다. 상태를 한번 점검한 후 뒤를 돌자 마찬가지로 연주할 준비를 모두 마친 헨리가 보였다.

“손 풀 시간 필요해?”

“아니요.”

헨리의 집에 오기 위해 출발한 건 아홉 시. 그리고 도현이 눈을 뜬 시각은 다섯 시 반이었다.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일어나 그의 집에 가서 밀턴이 아홉 시에 도현을 데리러 올 때까지 연습을 반복했다.

손은 풀 만큼 푼 상태였다.

도현이 그랜드 피아노 옆, 적당한 위치에 섰다. 헨리가 옆으로 고개를 들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방향이었다.

두 시선이 교차했다.

“박자는….”

“인 템포요.”

헨리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흘러나올 뻔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네.

아직 조금 경직된 표정을 보면 긴장하는 게 분명했는데, 말하는 거나 행동은 거침없었다. 헨리는 도현의 그런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흠, 괜찮겠어?”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스르륵, 도현에게서 시선을 뗀 헨리가 반듯이 앉아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 느슨해 보이던 헨리의 기세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그가 걸친 셔츠도, 바지도, 모두 넉넉하고 편안했으나, 그저 반듯이 앉아 자세를 잡은 것만으로 그는 연주자 같아졌다.

‘이게 프로.’

도현은 헨리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런 연주자를 관찰할 기회는 쉬이 주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현은 지금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히고, 빼앗고, 제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짧게 숨을 고른 도현은 헨리에게 고정된 시선을 가로막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체감상 삼 초 정도 지났을까.

눈을 뜬 도현은 헨리와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

지금이라는 생각과 손이 움직인 건 동시였다.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

베토벤이 남긴 열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 유일하게 느린 서주부로 시작되는, 네 마디 A장조 악구의 첫 음이 도현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강하게. 포르테로 터져 나온 더블 스톱에 헨리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활은 계속해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악보에선 다음 음을 피아노(여리게)로 지시하고 있지만, 도현은 메조 피아노(조금 여리게)로 해석했다.

마치 절망하는 사람처럼.

혹은, 분노한 인간이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며 신에게 대화를 거는 것처럼.

그 짧은 네 마디 악구만으로 도현이 이 곡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 얼핏 가늠할 수 있었다.

헨리는 고양되어 가는 기분을 느끼며 정확한 타이밍에 건반을 눌렀다.

도현이 먼저 제시했던 네 마디 악구가 헨리의 손 아래에서 A단조로 바뀌어 모방된다.

도현은 헨리가 제게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게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느냐고.

도현은 곧장 화답하듯이 마지막 두 마디를 반복했다.

바이올린이 주제 선율을 제시하면, 피아노가 화려하게 변주하여 반복했다. 피아노가 주제 선율을 가져가면 바이올린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처음 맞춰보는 것인데도 한 치의 엇갈림 없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기대와 불안에 점철되어 있던 도현은 조금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뻣뻣한 긴장이 가시고, 헨리와 피아노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진심으로 즐겁게 느껴지려던 때.

피아노가 고개를 들었다.

“……!”

도현의 시야에 맞추어 몸을 구기고 있던 피아노가 그 거대한 몸체를 펼친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16분음표의 화려한 아르페지오는 도현을 휩쓸고, 그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거대한 파동으로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그간 봐주었단 것처럼.

그 순간 도현은 이해했다.

어째서 베토벤 이전까지 바이올린이 중심에 설 수 없었는지.

거대함의 차이.

도현의 한 손에 들리는 바이올린과 달리 피아노는 거대한 악기였다. 도현은 몸을 지지할 작대기 하나를 들고 커다란 산봉우리 앞에 선 사람과 같이 아득해졌다.

* * *

피아노와 대등한 바이올린.

그래, 듣기엔 쉽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사람들끼리 격투를 할 때, 왜 체급에 따라 구분하겠는가?

악기도 마찬가지였다.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울림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래서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할 땐, 피아노는 적당히 조절해야 했다. 바이올린을 압도하지 않도록.

그래서 지금 헨리가 도현을 압도하려 굴었냐 하면, 아니었다.

헨리는 숙련된 연주자였다.

상대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연주의 본질을, 협주의 기본을 깨트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멍청한 짓은 헨리가 싫어하는 행위였다.

다만, 그저 차이일 뿐이다.

헨리는 궁금해졌다.

제대로 된 협주를 처음 해보는 게 분명한 도현이, 이 차이를 넘어서 정말로 대등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판단했다.

만약 그러하지 못한다면 음반은 없던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이 정도도 받아치지 못하는 연주자라면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나올까.

헨리는 아주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하!”

순식간에 사나운 발톱을 드러낸 도현이 그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언뜻, 환청처럼 그 정도로 나를 누를 수 있을 것 같냐는 도발이 들려오는 듯했다.

…재밌네.

뭐, 어차피 여기서 주춤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헨리가 뛰어난 이유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해서가 아니니까.

헨리의 눈빛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지금부터, 그가 어째서 그토록 유명한 피아니스트인지 저 소년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 * *

방심하면 잡아먹힌다.

도현은 무너지는 지반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속력을 늦추거나 망설이면 그대로 추락해, 아득한 무저갱에 잡아먹힐 것만 같다.

헨리 루빈스타인.

도현은 단 한 번도 그를 쉽게 본 적이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사랑의 슬픔과 멜로디를 녹음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반주자가 아닌 정면으로 맞붙은 헨리 루빈스타인은 도현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 압도적이고, 위압적이며, 세련된 연주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계속된 질주에 숨이 찼고.

동시에, 못마땅했다.

‘…아직.’

아직이다.

경악스럽게도, 아직도 도현은 헨리의 모든 기량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이 악을 쓰고 매달려 따라가면 헨리는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더 나아갔다. 좁혔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그의 한걸음에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다.

“…….”

모양 좋은 입술이 사나운 호선을 그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안다. 아득바득 쫓아가서 따라잡아도 언제 가까워졌냐는 듯 훌쩍 멀어질 거란 걸.

그럴수록 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지리란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더 끌어내야 해.’

그럴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할퀴고, 물어뜯고,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이 되더라도, 그 끝을 보고 싶어서 왔다.

점점 피아노와 바이올린 사이의 논쟁이 거세진다. 그에 따라 연습실의 공기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도현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대신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이를 악문 채,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집요히 빛냈다.

더, 더.

더 빠르게. 더 거칠게.

더 분노에 차서.

크로이처 소나타가 작곡된 시기는 베토벤이 자신이 청력을 잃어가는 걸 알게 된 시기였다.

청력을 잃는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음악가가 청력을 잃는다는 게 대체 어떤 고통인지.

‘형도 그랬지. 아픈 게 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리사이틀에서 그렇게 쓰러지고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보며 그렇게 자조했다.

적어도 잃은 게 청력은 아니니까 다행이지 않냐고. 원한다면 다시 들을 수 있고, 연주할 수도 있으니 나름 괜찮지 않냐고.

그렇다면, 베토벤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신이 그를 버린 기분이 아니었을까?

도현에게 크로이처 소나타의 1악장은 베토벤이 쏟아낸 절망으로 들렸다. 신에게 버려진 인간의 깊은 절망과 분노, 아득한 고통. 그 모든 게 이 소나타의 1악장에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난폭하고, 거칠며, 분노에 차 있다.

또한 두려워하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

활을 든 손이 크게 허공으로 튀었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나간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 들어온다. 안개로 된 감옥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인간이 신음했다.

점점 느려진 바이올린의 선율이 이겨낼 수 없는 절망을 맞이한 인간의 심정처럼 불안하게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무너질 것 같던 순간.

활 주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강하는 음은 불안감을 담고 있지만, 어딘가 환상적인 기묘함을 품고 있었다.

절망하던 인간이 비틀거리며 캄캄한 안개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선 것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그 안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이 가늘게 맥동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