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20화 (521/582)

제520화. Debut as a ?? (9)

헨리는 도현이 크로이처 소나타를 말했을 때, 그게 협주풍의 곡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의외라 생각한 구석이 있었다.

‘그다지 유리한 곡은 아닐 텐데.’

사람에게 성격이 있듯이 곡에도 성격이 존재했다.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곡을 만나면 연주자의 기량은 더욱 상승한다. 곡과의 상성은 그런 부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크로이처는 내향적인 사람보단 외향적인 사람에게 더욱 유리한 곡이었다. 이 곡을 표현할 때는 절제보다는 차라리 과장이 더 나았고, 숨기기보단 터트려야 했다.

도현은 그 반대였다.

과장하기보단 절제하고, 터트리기보단 적당히 숨겨서 의뭉스럽게 연주하는 연주자였다. 나이에 맞지 않는 세련된 연주 방식에 헨리는 감탄하기도 했었다.

‘아직 자신에게 잘 맞는 곡이 뭔지 모르는 건가.’

아무리 천재라지만, 열셋.

자신의 연주 방식과 강점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그렇기에 헨리는 그 곡이 도현의 경험 부족에서 나온 선택이라 여겼다.

…그리 여겼었다.

바이올린이 몰아친다.

무언가 그 안에 잉태되어,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감을 머금었던 선율이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며 공간을 뒤흔든다.

쨍한 고음이 연습실 천장으로 치솟아 올랐다. 바이올린의 고음과 피아노의 고음이 겹쳐지며 높이, 더 높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한 곳까지 비상한다.

“…….”

헨리가 손을 크게 들어 올렸다가 건반을 내려찍었다. 쾅, 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영혼까지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바이올린의 속주가 이어지고.

더 격해질 수 없을 만큼 열기가 가득 차올랐을 때.

1악장은 피날레로 치달았다.

“…….”

헨리는 뭔지 몰랐던 게 자신이었음을 인정했다.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나름 자부하였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차분해 보이는 얼굴 아래에 대체 얼마나 거대한 감정을 눌러 놓고 있는 것일까.

도현에게서 터져 나오는 열기에 헨리조차 잠식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헨리는 어느새 자신이 도현이 쏟아내는 감정에 동화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배우라 했던가.

배우라는 존재가 모두 저런 것인지 아니면 저 소년이 기이한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아니, 배우라고 다 저럴 린 없지.’

도현이 이상한 게 맞았다.

잠깐,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에 숨을 고르듯이 고요한 구간이 그들을 찾아왔다.

스며드는 미지처럼, 손을 휘저어 봐도 잡히는 것 없이 흩어지는 안개처럼, 그렇게 으슥한 불안감을 선사하다가.

“……!”

안개 속에서 툭 튀어나온 괴물의 손이 헨리를 급습했다.

헨리는 괴물에게 붙잡히지 않으려 질주했다. 서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서 뒤엉켜, 엉망으로 뛰었다.

아 템포로 회귀한 두 악기가 파동치는 연속 8분음표 악구를 주고받는다. 구분할 수 없으리만치 간격을 좁히다 마침내 결합한다.

베토벤이 말하고자 했던, 두 악기의 동등성을 뜻하듯 두 사람이 정확하게 동시에 쏟아낸 음이 세 번 겹치고.

1악장이 끝났다.

10분.

고작 10분 정도의 연주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헨리는 달리기하고 온 사람처럼 기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도 늙었나.’

실없는 생각을 한 헨리는 느릿하게 손목을 들었다. 그가 다시금 건반을 누른 순간, 다음 주제가 시작되었다.

1악장과 달리 2악장에서 먼저 주제를 제시하는 건 피아노.

F장조의 서정적인 선율이 헨리의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1악장이 노(怒)였다면, 2악장은 애(哀).

격렬하고 동적인 정서 후에 나타난 우아한 아름다움은 베토벤 특유의 극단적인 다이내믹함과 비범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헨리는 건반을 무겁게 누르지 않고 맑고 깨끗하게 표현했다.

피아노는 한 종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 발전할 때 피아노 역시 그 역사를 같이하며 변화해왔다.

베토벤이 소유했던 피아노는 발터 피아노.

그의 집을 처음 방문했던 체르니가 “그 당시 최고의 악기다”라고 감탄한 적이 있기도 한 그 악기는 둥글고 풍부한 울림의 저음과 깨끗한 종소리 같은 고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발터 피아노에 비해 현대의 피아노는 건반의 너비가 더 넓고, 건반의 하강 폭이 더 깊으며, 액션은 더욱 무겁다.

그러니 베토벤이 발터 피아노로 작곡했던 크로이처를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선 그 차이를 고려해야 했다. 중요한 음은 부각하되, 너무 무겁게 누르지 않도록.

깊지 않은 페달링이 맑고 깨끗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위에 바이올린은 오블리가토-하인리히 크리스토프 코흐에 의하면 ‘반주하거나 작품에 살을 붙이고자 쓰인 악기들’, ‘가끔 연주된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로서 선율을 더욱 경쾌하고 풍부하게 만들어내었다.

‘참 이상하지.’

협주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는 단순히 연주자의 기교나 역량으로 갈리지 않는다.

그 또한 중요하지만, 핵심은 ‘듣느냐, 아니냐.’였다.

아마추어는 여유가 없어서, 혹은 경험이 부족하거나 듣는 귀가 발달하지 않아서 상대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

주고받아야 하는데 상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다음에 이어질 자기 것을 준비하는 식이다.

그게 집단적 독백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는 협주의 의미가 없었다.

반면, 프로는 들을 줄 알았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듣고, 이해하고, 화답했다. 그래서 상대가 갑자기 토라져도, 화를 내도, 사랑을 속삭이거나 화해를 청해도 반응할 줄 알았다.

지금의 도현처럼 말이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뭐가 튀어나온다.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이쯤 되면 감탄을 넘어서 조금 질린다.

그러나 질린다고 생각하는 헨리의 입가엔 즐거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떠오른 미소였다.

우아하고 화려하던 2악장이 유려하게 흘러가고.

그들은 마지막 악장 앞에 섰다.

“…프레스토 다음에 천한 변주곡을 곁들여 연주했는데, 마지막 부분은 지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톨스토이 단편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3악장을 묘사한 구절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주인공의 지극히 주관적 입장으로 그의 음악적 무지를 드러내는 면도 있지만…. 어쩌면 그가 제대로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3악장은 본래 다른 소나타를 위해 만들어졌다.

의 피날레를 위해 만들어두었던 이 악장은 베토벤이 어울리지 않는다 판단하여, 크로이처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이 되었다.

헨리는 타건하며 속으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해석했지?’

전 악장 중 가장 강렬했던 1악장에서 도현은 내내 힘에 부쳐 보이긴 했으나, 피날레에 다다라서는 찰나,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헨리를 잡아챌 뻔했다.

그리고선 2악장에서는 만족했다는 듯이 간지럽게 굴었다.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연주는 그를 달래려는 것도 같았다.

솔직히 기대 이상, 아니. 그냥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앞서 대단한 역량을 보여줬더라도, 3악장을 음반에서 빼는 게 아니라면 마지막 악장까지 완벽해야 했다.

헨리는 도현이 이 곡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금해졌다.

그는 정성 들여 건반을 누르고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

이건, 락(樂)인가?

활이 상승할 때마다 경쾌한 음이 튄다.

타란텔라 풍의 3악장은 가벼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현의 해석은 헨리의 것과 다르지 않다.

‘나쁘진 않은데….’

조금 더 재미있는 걸 기대했던 터라 김이 빠졌다.

헨리는 곧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그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이고, 사실상 오늘 도현이 보여준 것은 경악의 연속이었다. 음반이 발매될 날이 기대될 정도로.

그 순간이었다.

음이 가늘게 떨렸다.

“……아.”

불현듯 거대한 심상이 그를 강타했다.

아니. 실은 그의 주변에 계속 맴돌았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애(哀), 2악장을 애(哀)라 생각했다.

그리 달콤하게 속삭이는데 누가 다르게 생각할까.

‘아니야, 그게 아니었어.’

도현이 전 악장에 걸쳐 그려온 기묘한 그림이 점차 선명해졌다.

1악장에서 토해냈던 분노와 절망이 극적 전개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안개 미로에 갇힌 인간은 계속해서 그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달콤함은 무엇이었지?

스스로 던진 질문에 헨리는 금방 답을 찾았다.

상상, 잠깐의 꿈, 혹은 신과의 만남. 그도 아니면 환각.

헨리가 도현이 풀어낸 이야기를 이해한 순간 음악의 저변이 넓어졌다. 그들의 음악은 안개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모든 숨결 속에서 유유히 흘렀다.

짧았던 행복에서 깨어난 인간이 현실을 마주한다. 마주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웃는다. 즐겁게, 익살맞게, 경쾌하게, 기묘하게.

어디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안개 속에서 어째서 웃는 걸까?

완전히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헨리가 의문을 품은 순간.

안개가 흩어진다.

드러난 풍경 속에 인간이 상상하던 괴물은 없다. 탁 트인 시야 위로 새하얀 달빛이 흘렀다.

“허.”

헨리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박자를 놓칠 뻔했다.

아니었다.

안개와 인간의 싸움도. 괴물과 인간의 싸움도.

모두 아니었다.

그를 좌절시키던 모든 것들, 그를 버린 신, 길을 잃게 했던 안개, 그리고 무섭고 두려웠던 괴물은 전부… 그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환상처럼 부스러진다.

남은 것은 본래 그러했듯 그곳에 유일했던 인간뿐이다.

홀로 남아 승리한 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안개가 모두 흩어진 세상을 눈에 담고,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던 때.

가득 차올랐던 음악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음악이 끝났다.

헨리는 미묘한 얼굴로 건반에서 손을 내렸다. 모든 음악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숨소리뿐이었음에도, 귀에 남아 잔류한 음들이 그를 침묵하게 했다.

건반을 응시하며 할 말을 고르던 헨리가 옆을 돌아보았다.

“대체 넌….”

진중하게 말을 내뱉던 헨리의 두 눈이 경악스레 뜨였다.

식은땀에 전 채, 흰 뺨이 더욱 창백하게 질린 소년이 휘청였다. 헨리는 하려던 말도 잊고 다급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도현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척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헨리가 당혹스럽게 낯을 굳히는데 잠깐 어지러운 듯 눈매를 찌푸리던 도현이 손바닥으로 그를 조심스레 밀었다.

“괜찮아요. 잠깐 현기증이 일었을 뿐이에요.”

“이게 괜찮다고?”

“정말이에요.”

“나한테도 눈이 달려 있어. 넌 괜찮지 않아. 젠장, 아니. 아팠으면 말을 해야….”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헨리는 멈칫했다.

말했으면.

말했으면 이해했을까?

‘…당연히 이해했겠지.’

그가 무슨 아동 학대범도 아니고, 아픈 애를 붙잡고 윽박질러 가며 연주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이해는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도 했겠지. 자기 관리도 실력이니, 그 정도인 연주자였다면서.

‘…혹시 그래서.’

문득 든 생각에 헨리가 복잡하게 표정을 굳힐 때였다.

“아픈 거 아니에요.”

소년이 택도 없는 소릴 해왔다.

“연습실에 거울을 한 개 둘 걸 그랬어. 그랬으면 그런 소리는 못 했을 텐데.”

“진짜 아니에요. 제가… 가끔 이럴 때가 있거든요. 보통 배역에 너무 몰입하면 그래요. 연주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지만요.”

“메소드 연기를 말하는 거야?”

“네. 그리고 이럴 땐 잠깐만 쉬어주면 돼요.”

헨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선 자신이 괜찮다고 주장하는 소년을 보았다. 확실히, 아까보단 더 생기가 도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진짜여도 괜찮은 건 아니지. 그 정도로 몰입한 거면 여파가 있을 거 같은데.”

“괜찮아요.”

“사실 내 연습실엔 규칙이 있어. 여기선 괜찮다는 말은 금지야. 한 번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헨리는 아주 잘생겼다고 한 번 외쳐야 하지.”

“네?”

“그래서, 연기할 때도 그런다고?”

태연한 질문에 도현의 낯이 오묘해졌다.

“…네. 그, 연주할 때도 가끔 몰입하면 기력이 빠지잖아요. 그런 거라서 괜찮, 아니.”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도현은 곧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헨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그래.”

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도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단어를 금지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어. 잘못된 건 단어가 아니라 너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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