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21화 (522/582)

제521화. Debut as a ?? (10)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린 후였다.

“헨리…. 저는 배우예요.”

“자기소개 시간이야? 나는 피아니스트인데.”

“…그러니까, 제게는 특별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었어요. 제가 비슷한 상황을 얼마나 자주 겪어 봤겠어요?”

도현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늘 충분한 휴식을 취할 만큼 여유로웠을까요? 아니요. 항상 다음 촬영이 절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익숙해져야 했고, 익숙해졌죠. 헨리, 저는 저를 통제하는 법을 알아요.”

“…….”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에요. 전 전문 배우이니 오히려 당연한 거죠.”

몰입을 잘한다는 건 도현의 장점이었고 동시에 단점이었다.

영혼도 불안정한 와중에 계속 다른 인격에 자신을 대입하니, 자아뿐만 아니라 영혼의 혼란까지 자주 일었다.

다행히도 촬영 때 겪었던 공황만큼 커다란 사건은 그 후로 없었지만…. 그래도 자잘한 후유증은 늘 도현을 따라다녔다.

자연히 촬영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도현은 감정을 갈무리하는 법을 익혔다.

도현은 단 한 번도 그것을 특별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돈을 받고 고용된 이상 나이와 상관없이 프로였고, 프로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으니.

너무나 당연해서 그동안은 아예 신경조차 안 쓰고 살았던 문제였다.

“대단하네.”

헨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도현의 모든 말은 과장이나 으스대려는 의도 없이 담백했다.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듯이.

해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한다.

“확실히 프로다운 생각이고….”

“…….”

“아직 어리긴 하네.”

도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헨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고집불통. 헨리는 속으로 중얼거리곤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그래. 네 말대로야. 무대에 올라간 순간 나이 따위는 아무 상관 없지. 그곳에 서면 그저 해야 해. 그뿐이야. 하지만 얘야.”

헨리가 피아노에 살짝 기대어 섰다. 몸이 비스듬히 기운 탓에 시선이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무대로 보여?”

“…….”

“무대 위에서 너는 프로겠지만, 여기서는 나를 매정한 어른으로 만드는 맹랑한 어린애야.”

“그럴 생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면 완벽하게 숨겼어야지. 네 상태를 내가 모르게. 어설프게 숨기고, 어설프게 괜찮다고 하면 신경만 더 쓰일 뿐이야. 지금처럼 말이지.”

피아노에 기대어 선 헨리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낯빛을 굳히고 도현에게 나무라는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도현은 그에게 혼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일 테지. 결과적으로 그가 자신을 신경 쓰게 만들었고, 지금도 연습에 지장을 주고 있으니까.

헨리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하얀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건 후회였는데, 그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흐르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헨리는 잠깐 한숨을 삼켰다.

주변인들이 꽤 고생하겠어.

“그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되지.”

“…네?”

후우, 숨을 내쉰 헨리가 피아노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그리곤 어처구니없는 투로 말을 쏟아냈다.

“프로가 무슨 초인이야? 아프고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슬퍼도 티 하나 안 내게? 혹시 네 목표는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거니? 건담 로봇이라도 되고 싶어?”

와르르 튀어나온 말에 도현이 큰 눈을 깜빡였다.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재밌는 연주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오지랖을 부리며 육아를 하고 있었다. 헨리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거기 앉아서 쉬고 있어. 네가 마실 만한 걸 가져올 테니까.”

“전 괜찮은….”

“규칙을 어겼군.”

“…….”

“뭘 해야 하는지 알 텐데?”

“…….”

“눈 피한다고 봐줄 것 같아?”

팔짱을 낀 헨리가 무시무시한 눈매로 도현을 쏘아보았다. 도현은 따끔거리는 피부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헨리는… 잘생겼어요.”

“뭐가 빠졌는데.”

“…아주, 잘생겼어요.”

“진심이 안 느껴져.”

도현은 정말 이럴 거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서. 더 크게. 진심을 담아서.”

도현의 낯이 일그러졌다.

헨리는 음료수와 함께 돌아왔다.

두 사람은 각각 소파와 의자에 앉아서 음료수를 홀짝였다. 긴장이 풀리자 도현의 안색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헨리는 도현이 담요 위에 올린 손을 주물럭거리는 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단했어. 협연해 본 경험도 없을 텐데 무척이나 능숙하더라. 여러 번 연주회를 가져본 사람처럼 말이야.”

도현은 순간적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콩쿠르에 나갈 생각은 없겠지?”

“네.”

“아쉽네.”

진심이었으나 헨리는 도현을 설득하려고 굴지 않았다. 콩쿠르를 나가지 않는 음악가들도 존재하니까.

빠르게 유명세를 알리고 실력을 입증받기 위해선 콩쿠르만 한 게 없지만… 어쩐지 이 소년에겐 그다지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전부 이해가 되네. 이런 실력을 지녔으니까 나한테 크로이처 소나타를 제안했겠지. 깜빡 속았어. 그때 겸손하게 굴길래 한번 던져보는 건 줄 알았더니, 그냥 자신이 있었던 거군. 그렇지?”

“긴장한 건 진짜였어요.”

“자신 있었던 것도 진짜고?”

“음,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저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이곳에 왔어요.”

“뭐? 설마.”

그 실력으로?

“동양에선 겸손이 미덕이라지. 하지만 내 앞에선 그렇게까지 겸손할 필요 없어. 나는 당당하게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을 더 좋아하거든.”

“하하, 안 믿으시네요.”

헨리가 그럼 너 같으면 믿겠냐는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그냥 웃어넘겼다.

도현은 진짜로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헨리가 도현의 반주를 취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러면 크로이처를 다른 곡으로 바꿔야 했을 테지만, 어떻게든 하지 않았을까. 조금 대책 없는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이 며칠 없다는 게 아쉬워지는군.”

“그럼 지금 다시 연습….”

“…….”

“…을 하는 건 무리인 것 같고, 조금만 더 쉬었다가 해요.”

부자연스럽게 말을 바꾸는 도현의 모습에 헨리가 봐준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틈만 나면.

“조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그러다가 녹음 날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렇게까진….”

“내가 너 같은 연주자들을 한두 명 본 줄 아나?”

헨리의 말에 도현이 조용해졌다.

쯧, 혀를 찬 헨리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 삼십 분이니, 오십 분이 되면 시작하지.”

그러자 조금 푸르죽죽했던 도현의 얼굴이 한결 풀렸다. 언제까지 쉬어야 하나 몰랐는데, 그 기간이 정해지자 그나마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도현은 조금 풀린 낯으로 장난치듯 물었다.

“그거, 삼 일 뒤에 저랑 같이 스튜디오에 가주실 거란 소리 맞죠?”

끼익. 의자에 등을 기댄 헨리가 소파에 앉은 소년을 보았다.

식은땀이 가신 얼굴은 멀끔했다.

그를 여러 번 미스터리에 빠트린 얼굴이기도 했다.

“인정할 건 해야지.”

그의 입에서 나온 인정에 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마주한 데서 온 성취감이었다.

도현은 약간 배부른 강아지처럼 말했다.

“이제 녹음만 완벽하게 하면 되네요.”

“자신 있어?”

“모든 게 완벽해요. 밀턴 씨,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그리고 제 음반을 도와줄 훌륭한 피아니스트까지.”

그러니 해내야죠.

담담히 내뱉은 말에 헨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는 짧은 대답도 돌아왔다.

연습실. 어느 한 군데 닮은 곳 없는 두 사람의 눈은 음악이라는 비슷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 *

음음, 음. 턱선에서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을 한 여성이 작게 흥얼거렸다. 그녀가 낀 이어폰에서 콧노래와 비슷한 선율의 음악이 작게 흘러나왔다.

“허니…. 음?”

달칵, 불을 켠 알리사는 인기척이 없는 집 안을 보고 말을 멈췄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한번 쓸어내린 그녀는 ‘맞다, 손님이 온다 했지’하고 혼잣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사 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모두 정리한 알리사는 콧노래를 흘리며 별관으로 향했다. 짧게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하얀 이어폰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집에서 별관으로 향하는 짧은 길엔 그녀가 가꾼 화단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구두를 신은 발이 지나간 자리 옆, 화단의 꽃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린 알리사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별다른 고민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잠기지 않은 문은 그녀의 손에 힘없이 밀려났다.

알리사는 살짝 연 문틈 사이로 안을 살폈다. 헨리가 연주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못 듣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고, 그럴 때 헨리는 방해받는 걸 아주 싫어했다. 슬쩍 상황만 보고 집으로 돌아가든지 할 생각이었다.

“어머.”

그녀의 입에서 반사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여성의 시선 끝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옆에 선 소년이 있었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 가늘게 이마 위로 늘어졌다가, 활을 쥔 손이 거칠게 튈 때면 가늘게 흔들렸다. 그 아래로 그린 듯 정돈된 눈썹과 동양인 같지 않은 깊은 눈매가 보였다.

편안하게 입은 맨투맨은 면이 두껍지 않아서 길게 뻗은 쇄골과 단단하게 잡힌 어깨가 보였다. 구김 없는 검은 바지는 복숭아뼈를 가리고 있었는데, 편안한 차림새에도 길쭉한 다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소년이 집중할 때마다 눈매가 살짝 찡그려지며,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그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에도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존재였다.

‘저 애가 손님인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어린 상대였다.

손님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같이 와인을 마시려고 했던 알리사는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집에 음료수가 있던가?

아까 냉장고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없으면 마트에서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나. 내가 저녁거리는 뭘 사 왔더라. 애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저녁에 손님을 어떻게 대접할지 고민하며 조심스레 문을 당겼다. 그대로 문을 닫고 다시 마트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

그때, 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 한 개가 툭 떨어졌다. 알리사는 탄식하며 이어폰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막 이어폰을 집은 순간이었다.

“……!”

알리사의 귓속으로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파고들었다.

이어폰이라는 거름막으로 희미하게 들리던 연주 소리가 순식간에 들이닥치자, 흠칫 몸을 떤 알리사는 기껏 쥐었던 이어폰을 다시 떨어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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