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22화 (523/582)

제522화. Debut as a ?? (11)

투둑. 이어폰이 맥없이 잔디 위를 굴렀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 사이로 시선을 고정한 알리사는 그것을 의식하지조차 못했다.

덜 여문 나무처럼 풋풋하지만, 숙련된 연주자의 것처럼 단단한 팔이 튀어 오른다. 동시에 강렬한 소리가 그녀를 강타했다. 그 거대한 충격에 문고리를 쥔 손등이 하얗게 질리며 핏줄이 섰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알리사는 문득 무언가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한쪽 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랫소리였다.

‘거슬려.’

아까까지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노래가 순식간에 성가신 것으로 전락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남은 한쪽도 빼냈다.

한쪽 이어폰을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은 알리사는 거칠었던 몸짓과 달리 아주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문틈이 벌어지며 더 선명한 소리가 알리사를 반겼다.

“……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음악의 향연은 압도적이었다. 눈과 귀, 피부를 타고 들어와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팔 표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검고 매끄러운 그랜드 피아노에 비하면 무척 작아 보이는 소년이 피아노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불빛이 반사된 망막에 그 모든 순간이 초 단위로 박혔다.

아. 이걸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감이 소년의 팔을 움직이고, 매끄러운 광택을 흘리는 바이올린은 주인의 뜻에 맞추어 자신의 한계까지 소리를 끌어올린다.

조금 전에도 인상적인 외양이 절로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냥 사람의 존재감 자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을 보면 누구나 시선이 가듯이, 그렇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간을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어떻게?’

알리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애인으로 두었다. 그녀가 아는 음악가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헨리가 그녀의 인생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의 삶에서 음악은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그녀는 저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있는 소년에 당혹스러움마저 느꼈다.

‘어떻게 저 몸으로 헨리에게 밀리지 않을 수가 있지?’

순간 알리사는 제 현실 감각을 의심했다.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의심이 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순간에도 심장에 때려 박히는 날카로운 음색은 분명히, 꿈속에선 느낄 수 없는 강렬함이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격렬하게 부딪친다. 붉은 스파크가 번쩍번쩍 튀고, 검은 화마에 휩싸이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눈앞이 온통 검게 불타는 와중에도 소년만큼은 선명했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소년은 마치, 바이올린의 신 같다고.

마트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이어폰과 함께 그녀의 기억에서 잊힌 후였다. 알리사는 발목이 묶인 사람처럼 연주가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 * *

하얀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어딘가 불만에 차 있었다. 그 얼굴을 구경하던 헨리가 한마디를 던졌다.

“불만이 많은 얼굴이네.”

“…크레셴도 마디가 별로였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툭, 대답이 튀어나왔다.

“좀 더 마디마디, 색이 변화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데….”

“마디마디?”

“빨강, 파랑, 노랑, 보라, 검정 순으로요.”

“흠.”

마디 간에 느낌 변화가 크다고 생각했더니 그렇게 연주하고 있었나.

“그럼 그 부분 다시 해볼까?”

“부탁할게요. 아, 헨리는요? 중간에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이 부분이요.”

도현이 바이올린으로 네 마디를 연주했다. 헨리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 부분은 헨리가 어떻게 표현할지 아직 고민 중인 부분이 맞았다.

“그걸 들었다고?”

“들리니까요.”

헨리가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도현이 했던 네 마디를 연주했다. 그다음에 또다시 반복해서 연주했다.

반복이었지만, 달랐다.

“이 부분이 너무 과열되는 느낌이야.”

“제가 위에 얹어볼게요. 두 번 다 연주해 봐요.”

두 사람은 또다시 네 마디를 두 번 반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네요. 첫 번째는 조금 둥글리는 느낌이 있어요. 괜찮긴 한데….”

“네 소리랑 안 어울리지. 지저분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이어진 연주에 헨리는 감탄했다.

짧은 시범을 끝낸 도현이 팔을 내렸다.

“제가 이렇게 연주하면 어때요?”

“괜찮네.”

“그럼 이렇게 할까요?”

헨리의 대답을 들은 도현은 악보에 짧게 글씨를 휘갈겼다. 아니, 휘갈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결과물은 단정하고 우아한 글씨였다.

도현이 악보에 기록하는 걸 기다리고 있던 헨리가 말했다.

“흐름이 자연스러운지도 봐야 하니까 몇 번 더 확인해보고 아까 네가 말한 부분 다시 연주해보지.”

“그래요.”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한 후에 다시금 듀엣 연주를 시작했다. 훨씬 나아진 소리에 헨리가 만족스러운 탄성을 뱉었다.

도현이 연주를 맞춰가는 방식은 몹시 시원시원했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니 위축될 법도 한데,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제 의견을 말하고, 또 헨리의 의견도 유연하게 수용했다.

그들은 만족할 만큼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후 도현이 불만스러워했던 부분으로 넘어갔다.

앞선 프레이즈가 빠르게 넘어갔던 것과 다르게 이 부분은 조금 애를 먹었다. 도현이 어느 정도 만족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기에 두 사람의 표정은 좋았다.

“신기해. 네 바이올린을 듣고 있으면 꼭 두 사람이 연주하는 거 같아.”

“퍼스트랑 세컨드 두 대가 같이 연주한다고 생각하고 연주했거든요.”

헨리가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야. 그렇게 독립적으로 분절된 느낌이…. 오.”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한 헨리가 침음을 흘렸다. 정신없이 듀엣 연주를 하고 수정을 반복하는 사이, 쉬지 않고 세 시간 넘게 연습을 해버렸다.

‘너무 집중했나.’

도현은 그렇다 쳐도 자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아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닌가. 헨리는 악보를 정리하고 피아노의 덮개를 덮었다.

“잠깐 쉬었다 하는 게 좋겠어. 벌써 세 시간 넘게 이어서 연습 중이었잖아. 힘들진 않았어?”

“네, 저는 괜찮….”

“규칙.”

스읍, 숨을 한번 마신 도현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쏟아냈다.

“…위에서 내려다봐도 여전히 잘생기셨네요. 이목구비 균형이 조화로워서 어느 각도로 봐도 완벽해요. 피아노 옆에 있으니까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 같….”

“푸흡!”

그리고 바깥, 문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끼 같은 검은 눈이 도로록 굴러 문가로 향했다. 거기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당황스러운 낯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

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헨리가 벌떡 일어났다.

“알리사!”

그는 반가운 낯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언제 온 거야?”

“아까 왔어.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방해해 버렸네.”

“방해는 무슨. 들어와. 잠깐,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날씨가 추웠나 보지.”

헨리가 알리사의 손을 감싸자 알리사가 괜찮다며 그를 살짝 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헨리의 어깨 너머, 뒤쪽에 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뒤에 계신 분은?”

“아, 내가 말한 손님.”

헨리가 몸을 틀어 도현이 잘 보일 수 있도록 했다. 도현은 바이올린을 다탁 위에 잘 내려두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헨리가 알리사를 소개해 주었다.

“도현, 이쪽은 알리사 맬버튼. 내 동거인이지.”

“반가워요, 알리사 씨. 도현 리예요.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 얼굴에 떠올랐던 놀람은 모두 가신 후였다.

- 아, 이건 미리 말해두지. 내 집에는 다른 사람도 있어.

헨리는 도현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에게 동거인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혔다.

- 네가 누군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겠지만, 그녀라면 음반이 발매되는 순간 그게 너라는 걸 알겠지.

- 헨리가 믿는 분인가요?

-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사람이지. 내 남은 인생을 모두 줄 수 있을 만큼 말이야.

도현은 고민했다.

헨리는 도현을 도와주려고 나선 사람이었다. 물론 도현이 헨리에게 반주의 대가를 아예 제공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도 헨리의 호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현은 제게 호의를 보인 사람은 믿고 싶었다.

- 그럼 저도 믿을게요.

그래서 믿기로 했다.

“…알리사야. 편하게 알리사라고 불러.”

알리사가 흰 손을 마주 잡았다.

가볍게 맞잡은 손에서 연주자 특유의 굳은살이 느껴진 순간, 알리사는 그녀의 내부를 휘저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

덥석, 그녀의 양손에 붙잡힌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을 보고 있던 헨리도 당황하여 알리사를 쳐다보았다.

알리사는 그들의 당황을 느꼈음에도 이 말만큼은 내뱉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다.

“방금 연주, 정말 훌륭했어!”

“잠깐, 알리사….”

“믿을 수 없어. 왜 지금까지 너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몰랐던 거지? 헨리, 왜 진즉 소개해주지 않은 거야?”

“그, 알리사?”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니? 아, 혹시 콩쿠르에 나간 적 있어? 연주회라든가. 영상이 남아 있다면 보고 싶은데….”

듣기 좋은 연주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귀를 즐겁게 하는 걸 넘어서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영혼을 즐겁고 풍요롭게, 요동치게 만드는 연주는 드물었다.

알리사는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났다.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고 있을 수가 있지?

그동안의 시간을 손해 보고 산 기분이었다. 헨리와 다투고 이별했었던 일 년의 시간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오싹함을 선사해준 연주자를 향해 다시금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대단한 연주였어.”

삼십 대 정도로 성숙해 보이는 외양이었으나,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나 순수한 열정과 감탄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그녀를 어려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도현에게 무척 익숙하며 낯선 것이었다.

무언가를 아주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도현이 시사회나 다른 곳에서 마주했던 이들이 저런 눈빛이었다.

형이 연주회를 열었다 하면 그게 어디든 달려와 참석했던 수많은 열렬한 팬들 또한.

멈칫, 소년의 팔이 뻣뻣이 굳었다.

‘…팬, 이라고?’

검은 눈동자가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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