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Debut as a ?? (12)
부드럽게 거리에 들어선 차가 한 대문 앞에 멈추었다. 차가 완전히 정지하자 조수석에서 바이올린 가방을 멘 소년이 내렸다.
도현은 문을 닫기 전, 운전석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운전석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한쪽 팔을 핸들에 올린 헨리가 가볍게 웃었다.
“밤길에 어린애를 혼자 보내서야 쓰나. 당연한 일이니까 감사해할 필요는 없어. 그럼 내일 또 봐.”
그가 핸들을 쥐지 않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도현은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한 후 조수석 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느릿하게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던 도현은 그게 아주 작아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각이라 다들 방 안에 있었다. 혹여나 폐가 될까, 조용히 들어가려고 조심스레 움직이다가.
“이제 왔구나.”
서재 문을 열고 나오는 밀턴과 마주쳤다. 그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도현을 기다렸던 기색이었다.
“네. 다녀왔어요.”
도현의 대답을 들은 밀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현은 자연스레 그가 기다렸을 말을 꺼내었다.
“준비는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아요. 헨리는 저와 결이 잘 맞는 연주자더라고요. 아, 이것도 밀턴 씨가 생각했던 부분인가요?”
“그럴 것 같긴 했지. 둘 다 표현력이 뛰어난 연주자이니.”
“그랬군요. 고마워요, 밀턴.”
“말하는 것 보니 일이 아주 잘 풀린 거 같네. 그래서, 아침에 말한 건?”
“…노력은 했어요.”
밀턴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큭큭거리다가, 이내 도현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그래, 알았다. 지금까지 연습했던 거면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밀턴도 너무 늦게 자지 마세요.”
“이젠 내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어.”
어깨를 으쓱인 밀턴은 알겠다며 도현을 방으로 보냈다. 도현은 그에게 밤에는 커피 마시지 말라는 당부까지 한 후에야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하아아.”
도현은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으로 녹아내렸다.
순식간에 피로감이 엄습했다.
도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루 내내 그를 지배했던 긴장과 피로가 해일처럼 뒤늦게 몰려와 그의 온몸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문에 머리를 툭 기댔다.
대단했지, 헨리 씨.
그가 보여주었던 세련된 연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자유자재로 노래하던 피아노도. 그 감각적이던 음색도.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만약 헨리가 형과 협연했다면 어땠을까?
헨리는 젊은 피아니스트 중에서 손에 꼽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리고 형은…. 형은 누구나 인정했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두 사람이었다면 더 멋진 듀엣 연주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
박탈감이 일지는 않았다.
푸르스름한 바람이 심장을 한번 맴돌고 사라졌다. 도현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그 추위를 이겨냈다.
그는 의식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전환했다. 도현의 의식의 흐름은 헨리와의 연습에서 넘어가, 꽤 즐거웠던 저녁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 배, 배우? 배우라고?
알리사의 얼빠진 표정은 조금 웃겼다. 감정 표현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생각의 변화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경악했다.
- 진짜잖아. 심지어 내가 본 영화에 나온 배우….
그녀는 과 를 봤건만 눈앞의 소년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번 인지하고 나니 저 얼굴이 둘일 순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인지했음에도, 미련을 놓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도현의 프로필을 검색하길 반복했다.
물론 그녀가 알게 된 것은 도현의 프로필 이력에 콩쿠르나 연주회는 한 자도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 세상이 날 놀리는 건가?
그녀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렇게 한참을 충격에서 허우적거릴 것 같던 알리사는, 의외로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 또렷하고 맑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 네가 유망한 배우라는 건 알겠어. 그래도… 내게는 바이올리니스트야. 나는 너를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닌 다른 걸로는 생각하지 못하겠어. 미안해.
그 말을 듣고 어떠했던가.
배우로서 경력이 무시당했단 생각이나 부정적인 감정은 일절 들지 않았다. 도현의 안에서 요동치는 파도는 그를 울렁거리게 했지만, 그게 불쾌한 종류는 아니었다.
- …아니요.
누군가 날 바이올리니스트로 본다.
그 모습밖에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모습을 보았음에도 바이올린 연주자로 느껴져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서.
글쎄. 그게 왜 그렇게 속을 울렁이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도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건 환희와 기쁨, 약간의 서러움이었다.
소년은 그 모든 감정을 꿀꺽 삼키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선 자신이 팬이라고 말하는, 연주자로서의 첫 번째 팬을 두 눈에 깊이 담아내었다.
- 고마워요. 그렇게 봐주셔서.
왠지 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울렁임을 눌러 담고 웃을 때였다. 마주 웃던 알리사가 문득 멈칫하더니 묘한 눈빛을 보냈다.
- 그, 이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혹시, 이상형이 우리 헨리니? 성별은 그렇다 치고 나이 차가….
- 그럴 리 있겠어요?!
“하핫….”
도현은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미련을 털어낸 사람처럼 문을 짚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삼 일 중에서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남은 이틀은 더없이 소중했다.
내일 더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은 쉬어주어야 했다. 달리기 위해서는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도현은 여태 어깨에 메고 있던 바이올린 가방을 조심히 세워놓았다. 그것을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벽에 기대어 세워진 바이올린 가방 위로 멀어지는 소년의 등이 흐릿하게 비쳤다.
소년이 사라진 자리.
허공에 떠오른 흰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환상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다시 돌아온 이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다음 날 도현이 헨리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홉 시였다. 열 시에 오라고 했던 걸 후회했다더니, 진짜로 다음 날엔 도현을 한 시간 앞당겨 부른 것이다.
도현은 헨리의 집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장장 열세 시간을 그의 집에서 보냈다.
손님맞이를 한다고 화려한 저녁 식사를 했던 첫째 날과 다르게 둘째 날부터는 모든 식사도 간소화했다. 여유를 가지기엔 두 사람 모두 열정이 넘쳐났다.
그 모든 시간이 도현에게는 특별했지만, 가장 특별한 건 저녁 식사 전.
알리사가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삼십 분가량의 짧은 점심시간과 틈틈이 가졌던 한 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을 제외한 채, 하루를 온종일 연습에 쏟아부었던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소파에 가지런하게 앉은 단발의 여성이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로 그들을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솜사탕을 사주기 전의 어린아이 같아서 도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긴장이 풀려 웃던 것도 잠깐.
단단해진 눈빛으로 활을 들어 올린 도현은 깊은 심호흡과 함께 곧장 현을 깊숙이 그었다.
어제부터 수없이 주고받았던 피드백을 떠올리며, 그중 단 한 가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입술을 꾹 다문다.
“…….”
헨리는 도현의 손과 발이 된 것처럼 그를 받쳐 주고 때로는 도리어 주인을 조종하려는 것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면 도현은 그를 어르거나 달래고, 호통치거나 강제로 끌어당겼다.
헨리는 도현과 듀엣 연주를 반복하면서 몇 번이고 놀라운 상황을 마주했다. 도현은 천재였다. 그와 단 한 번이라도 같이 연주해본 이가 있다면 누구나 인정하리만치 대단한 천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깊이가 보이지 않아.’
사람은 호수와 같다. 그 호수에 물이 쌓이는 것은 경험, 노력, 시간으로 축적된다.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또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아주 깊은 호수는 날씨만으로는 모두 채울 수 없다.
그러니 바닥을 보이는 게 정상일 텐데도 헨리가 아무리 깊이, 더 깊이 잠수해도 도현은 끝 모를 만큼 깊어졌다. 호수가 아니라 영원히 끝에 다다를 수 없는 심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뛰어난 잠수부인 헨리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이 호수 안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에 잠식되거나 그대로 압도당하지 않을까.
그 또한 자칫 방심하다간….
“…….”
이렇게 이를 드러내지.
주위를 유유히 맴돌던 물들이 첨예하게 날을 세웠다. 헨리는 짧게 헛숨을 내쉬며 그것을 떨쳐내듯 건반을 세게 내리쳤다.
수없는 반복 중에 한 번쯤은 긴장이 풀리거나 힘이 빠질 법도 한데 도현의 연주는 시간이 갈수록 더 격해지고 강렬해졌다. 더 깊어지는 것 외엔 모르는 사람처럼.
기이한 집중력이다.
헨리는 어느새 웃음을 모두 지운 얼굴로 연주에 집중했다. 이젠 더 이상 도현을 봐주려 굴지 않는다. 봐주어봤자 저 맹랑한 꼬맹이는 그를 익사시킬 방법만 궁리할 뿐이다.
서로의 역량을 계속해서 끌어올린다. 부딪치고, 멀어졌다가, 화합하고. 끊임없는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더 완벽한, 더 넓은 음악의 바다까지 나아갔다.
“……하아.”
연주가 끝나자, 알리사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용히 손바닥을 가슴 위에 얹어보았다. 쿵쿵쿵. 거세고 빠른 박동이 그녀가 느낀 충격과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제도 좋았는데….
‘더 좋아졌어.’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어제는 조금 겉돌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지금은 완전히 결합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두 대의 악기였는데, 꼭 한 가지 악기에서 여러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눈앞에 둔 것처럼 장대해져서 그녀를 전율하게 했다.
“알리사.”
도현이 알리사를 불렀다.
“어?”
“피드백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아!”
헨리의 말에 따르면 알리사는 듣는 귀가 무척 좋다고 했다. 예리하고 감각적이며, 톡톡 튀는 관점을 가진 터라 그도 자주 도움을 받는다고.
그에 도현은 간단히 듣고 피드백을 줄 수 있는지 알리사에게 부탁했고.
- 물론, 당연하지! 그 말 무르면 안 돼.
그녀는 화답해 주었다.
사실, 도현이 가장 기다린 시간이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기대와 설렘이 떠올랐다.
알리사의 뒷목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큰일 났네.’
넋을 놓고 정신없이 감상하느라 피드백이고 뭐고 하나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 말이나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 얼굴에 대고 어떻게 없다고 말해.
“어, 으응. 그게 말이지….”
쥐어짜내라, 내 머리야.
알리사는 그렇게 도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한참을 끙끙대며 뇌를 혹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