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4화. Debut as a ?? (13)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월이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깜짝하면 3월로 넘어가고, 또다시 정신을 차려 보면 시간은 훌쩍 흘러가 있겠지.
스테파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다.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달려 나가려고 굴지도 않는 건 그가 터득한 삶의 여유기도 했다.
하지만….
흘긋, 시계를 확인한 스테파노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전화라도 한번 해볼까.
핸드폰을 쥔 커다란 손이 움찔거렸다.
약속했던 녹음 일이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왔건만 핸드폰은 잠잠했다.
아침에 밀턴에게 슬쩍 연락해봐도 ‘기다려 보게’ 같은 의미 없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끄응….”
주소록을 띄운 스테파노스가 눈을 꾹 감았다. 핸드폰 화면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톡, 무언가를 눌렀다. 곧이어 주소록 창이 사라지고 그가 저장해둔 배경 화면이 떴다.
“후우.”
결국 연락을 포기한 스테파노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답답함과 불안함이 그의 안에 응어리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니.”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테파노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준비가 문제없이 잘 되어가고 있으니까 이토록 잠잠한 것이리라.
“방해하면 안 되지.”
다짐과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스테파노스가 봐온 두 사람이라면 흘러가는 일분일초조차 아껴서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때, 고요한 집 안에 째깍거리며 분침이 넘어갔다. 스테파노스는 무심코 시계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후 여덟 시.
네 시간 후면 내일인데….
“…….”
아니다. 멍청한 생각을.
그들이 약속한 게 내일이라고 해서 그게 열두 시 정각에 연락하기로 한 건 아니었다. 끽해야 내일 오전, 더 늦어지면 어쩌면 오후나 저녁 시간대일 수도 있겠지.
스테파노스는 애써 시계에서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가까스로 위스키나 한잔 마시고 자야겠단 생각을 했을 때였다.
삐리릭!
“!”
스테파노스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위스키병을 향해 뻗어지던 손이 방향을 틀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핸드폰을 들었고.
[H]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살짝 떨고 말았다.
* * *
연습 시작으로부터 둘째 날에는 첫째 날보다 귀가 시간이 한 시간 더 늦어졌다.
헨리는 차라리 그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지만, 도현은 그럴 순 없다며 거절했다. 헨리 혼자만 사는 것도 아니고 그의 애인까지 있는 집에 머무는 건 민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리사가 정말 상관없다며 적극적인 찬성 의사를 펼쳤음에도 도현은 꿋꿋했다. 두 사람은 결국 도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나보다 고집 센 사람은 처음 보네.”
항복한 헨리는 도현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렇게 둘째 날이 저물고 다가온 셋째 날.
서로에게 적응을 마친 두 사람은 별다른 형식적인 대화도 없이 곧장 연습에 돌입했다. 그런 대화 한마디에 소요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보다 더 훌륭한 수단이 존재했다. 그들은 건반과 현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수없이 나눈 대화지만 매번 새로웠고 매번 강렬했다.
무섭도록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은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 끝나리란 게 조금은 아쉽다고.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언어로 대화할 때면 그들은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처럼 서로의 의중을 잘 꿰뚫어 보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한 알리사는 한쪽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거니 질려야 정상이다.
그녀 자신도 이쯤 들었으면 감흥이 떨어지는 게 맞지 않나 싶었는데, 귓가에 선율이 파고들 때면 그런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점점 고조되는 기대감과 의문뿐이다.
어디까지 나아가려고 하는 걸까?
알리사는 저기서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연주하는 소년에게 묻고 싶었다. 네가 바라보는 경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그녀는 헨리나 도현처럼 음악을 잘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삼 일간 소년을 지켜봤다. 그것도 온 정성과 열정을 다해서. 그렇기에 느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거야?’
무엇을 보길래 그렇게 지칠 줄을 모르는 거냐고. 대체 무엇을 말해주고 싶길래, 그 바이올린으로 무슨 일을 해내고 싶길래 이토록 속을 울렁이고,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냐고.
무엇이 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만드냐고 묻고 싶었다.
“…….”
동시에 그녀가 참견할 부분이 아니란 걸 느꼈다. 오직 저 애 혼자서, 스스로 해내야 하는 문제였다. 왜냐면 저 애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
알리사는 궁금증을 속으로 삼켰다. 그 대신에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연주를 귀에 새겼다.
- 알리사. 가끔은 연주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는 그가 하는 음악을 듣는 게 나을 때가 있어.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음악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든.
답은 음악에 있을 테니.
건반에서 손을 뗀 헨리는 숨을 골랐다. 그는 몇 번의 심호흡으로 순식간에 숨을 가다듬은 후, 옆을 돌아보았다.
“너도 느꼈겠지.”
“네.”
방금, 그들의 음악은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그 탁 트인 소리와 높은 구름을 뚫고 나와 보이던 장대한 정경은 잠시나마 아찔함을 선사했다.
“어떻게 할 거지? 지금 프로듀서에게 연락할 건가? 아니면….”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녹음하러 가지는 않을 거예요.”
“왜? 너도 느꼈겠지만, 방금 우린 벽을 뚫었어.”
“네. 우연이었죠.”
“너 정도 되는 연주자라면 한번 넘어선 벽은 더는 큰 문제가 아니란 걸 알 텐데.”
“온전히 제 실력으로 녹여내지 않는 한은 만족 못 해요.”
“고집이 세네.”
잠시 후 헨리는 웃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고집이야.”
살짝 웃은 도현은 협탁 쪽으로 다가가 물 주전자로 물을 따랐다. 물잔 세 개를 채운 후, 알리사와 헨리에게 물잔을 내어준 뒤 자신도 마셨다.
잠시 목을 축인 도현이 입을 열었다.
“매번 제 사정대로 프로듀서를 불러낼 수는 없잖아요.”
“예의가 아니긴 하지.”
수긍하는 듯했던 헨리는 금방 말을 덧붙였다.
“그가 예의를 따지는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생각엔 지금도 네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가요?”
“그래.”
헨리의 수긍에 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럼, 지금 연락은 해봐야겠어요. 녹음하러 가겠다는 건 아니고 내일 몇 시에 방문할지 말씀드리려고요.”
“예의 바른 아이구나.”
감탄하는 투였는데 도현은 그가 꼭 자신을 놀리는 거 같았다.
반응해주면 더 신나하지.
나름대로 헨리를 파악한 도현은 자연스레 화제를 넘겼다.
“내일 오전 아홉 시로 말하려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그들이 연습을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헨리는 그 한마디로 도현이 무대에 서기 전 특별히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기보단 평소와 같이 보내는 걸 선호하는 타입임을 알아챘다.
“뭐, 난 상관없어.”
“그럼 아홉 시로. 잠깐 전화 좀 할게요.”
양해를 구한 도현은 스테파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식사 중인 건 아니겠지.’
저녁 식사를 늦게 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시간이라 마음에 걸렸다.
그가 식사 중이라면 빠르게 사과하고 끊자.
그리 생각할 때 수화음이 끊기며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오랜만이에요, 프로듀서. 제가 식사를 방해하진 않았나요?”
- 그건 두 시간도 전에 진즉 치웠습니다.
스테파노스의 대답에 도현은 짧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 그나저나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기대가 묻어 있는 거 같으면 착각일까?
“내일 몇 시에 스튜디오에 갈 예정인지 알려 드리려고요.”
- …아.
착각이 아닌 것 같네.
도현은 그가 실망한 걸 눈치챘으나 티 내진 않았다.
그들이 프로듀서와 연주자로 만났다 하나 스테파노스는 중년의 남성이었고 도현은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너무 속을 넘겨짚거나 놀리는 것처럼 굴면 좋지 않았다.
“내일 아홉 시에 가려고 해요.”
- 오전입니까? 아니면 오후?
“오전이요.”
- 아.
아까와는 조금 다른 탄식이었다.
도현은 입 안의 살을 깨무는 것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때 가도 괜찮을까요?”
- 물론이죠.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H.
도현이 <사랑의 슬픔>과 <멜로디>를 녹음한 날 이후, 스테파노스는 그를 이름이 아니라 예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현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존중하는 방식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 그럼 지금은…. 헨리 씨와 함께 계신 겁니까?
“그의 집이에요. 함께 연습하고 있고요. 옆에 있으니 원한다면 바꿔줄 수도 있는데, 혹시 필요할까요?”
- 아닙니다. 어차피 내일 볼 테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 해결하면 되겠죠.
거기까지 말한 스테파노스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한층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섬세한 눈매가 두어 번 깜빡여졌다.
- 제가 더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죠.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H.
“네, 내일 뵐게요.”
한참을 기다려도 상대가 먼저 끊지 않아 도현은 먼저 종료 버튼을 눌러야 했다. 까맣게 물든 액정 위로 소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내 말이 맞지?”
헨리는 약간 우쭐거렸다.
“네, 인정할게요.”
졌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인 도현은 핸드폰을 협탁에 다시 내려두고 바이올린을 들었다. 알리사는 소년의 손에 바이올린이 들린 상태가 꼭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퍼즐 같다고 생각했다.
“연습해요, 헨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좋아. 네 말대로 우연을 실력으로 만들어 보자고. 잔뜩 기대하고 있을 스테파노스 프로듀서를 한번 깜짝 놀라게 해야지.”
“난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
주먹을 쥐어 보인 알리사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냥 즐겁기만 하진 않지만, 옆에서 단단히 받쳐 주는 사람이 있기에 괴롭지는 않은 시간이 또다시 흘러갔다.
헨리가 도현을 집에 데려다주고, 서재에서 나온 밀턴이 도현을 맞이하고, 도현은 또다시 기진맥진해 잠이 들고. 그렇게 지난 이틀과 비슷한 일과가 흐르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