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화. Debut as a ?? (14)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히 챙긴 도현은 서재 앞에 섰다. 오늘은 헨리가 데리러 오기로 했기 때문에 밀턴에게 인사를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도리.”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도현은 놀라 돌아보았다.
“…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당연히 로테인 줄 알았다.
도현은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왜 이 시간에 깨어 있어?”
아침 여덟 시.
도현에게는 아니어도 진에게는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대였다. 특히나 학기 중이 아닌 이런 방학엔 꼭두새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졸음기가 가득한 눈을 문지른 진이 작게 하품하며 말했다.
“하암, 나가는 거야?”
“아, 응.”
진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세게 문질렀다. 불그스름해진 눈가에 도현이 팔을 잡아 제지하자, 잠이 덜 깬 얼굴로 웃은 그녀는 도리어 도현의 손을 꼭 잡았다.
“잘할 거야.”
“…….”
검은 눈이 멍하니 아래로 향했다.
“넌 내가 아는 애 중에 제일 똑 부러지는 애니까 잘할 거야. 누구라도 너를 자랑스러워할 만큼.”
잔잔히 흘러나온 말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저 응원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말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
차오른 의문에 도현이 굳어 있는 사이, 진이 천천히 그를 안은 팔을 풀었다. 자연스레 두어 걸음 물러난 소녀가 소년의 굳은 어깨를 톡 쳤다.
“이제 얼른 들어가 봐. 늦으면 어떡해.”
“…응.”
도현은 문고리를 잡기 전, 뒤에 서 있는 소녀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현이 돌아보면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깜빡임에 따라 가늘게 하늘거리는 기다란 속눈썹 아래, 검은 눈이 소녀를 응시했다.
문득, 그런 게 중요한가 싶었다.
“고마워.”
진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도현을 응원했듯이 도현 또한 굳이 묻지 않고 그 응원에 대답했다. 진은 여상한 낯으로 힘내란 말을 남긴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쓴 남자가 고개를 드는 걸 보며 짧게 웃었다.
* * *
밖으로 나가기 전, 도현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로테와 마주쳤다. 오늘 진의 가족을 모두 마주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로테는 야채를 물에 씻으며 물었다.
“녹음하러 가는 거니?”
“네.”
그들의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진의 집에 머물며, 밀턴과 음반을 주제로 토론하고, 툭하면 바이올린을 들고 사라지면서, 로테에게 사실을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부터 로테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물론 그녀는 다정한 사람이라 그것을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도현이었다.
- 알고 계시죠? 제가 H라는 거.
로테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도현은 낙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희게 웃었다.
- 절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로테라서 다행이에요.
무엇이 그의 마음을 그토록 편안하게 만들었을까?
하나둘씩, 제 비밀을 아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건만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락했다. 마치 도현이 서 있던 세상이, 발밑 주변의 둥근 원이 점점 퍼져나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로테와 대화를 마무리한 도현은 가방을 고쳐 메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검은색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빵. 도현이 나오자 클랙슨이 울렸다. 지잉- 곧이어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차창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헨리.”
“좋은 아침. 옆에 타도록 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검은색 차에 탑승했다.
“아침은 먹고 왔지?”
“네, 먹었어요.”
“그럼 바로 스튜디오로 갈게.”
차는 조용히 출발했다.
도현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생각했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지.
달칵, 헨리가 시동을 껐다.
그가 내리라고 손짓하자 도현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야외 주차장이었기에 눈 위로 오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손 그늘을 만들어 햇빛을 피하는 도현의 옆에 헨리가 와서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스튜디오로 향했다. 차 키를 습관적으로 던졌다 받던 헨리가 물었다.
“네 친구 안 데려와도 되겠어?”
“네.”
“단호하네.”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도현은 담담히 말했다.
“이젠 완성된 음반을 들려주고 싶어요.”
헨리는 피식 웃었다.
이 스튜디오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알리사만 해도 참관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했다.
솔직히 헨리는 도현이 거절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도현은 청중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현이 꺼낸 이유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미완성인 연주가 아닌, 완성된 최선의 곡을 들려주고 싶은 건 연주자의 본능과도 같은 거니까.
“그래, 그럼.”
그 뒤로 그들은 시시한 농담을 따먹으며 걸었다. 녹음 당일이라는 긴장감 따위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헨리의 경우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도현까지 태연자약한 건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제집에 방문하던 첫날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던 것을 기억하는 헨리는 그 삼 일 사이에 또다시 성장한 소년에 바람같이 웃고 말았다.
“헨리 씨, H.”
아홉 시보다 이십 분 정도 일찍 왔음에도 스튜디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스테파노스가 반겨주었다.
“일찍 왔군요.”
“프로듀서도요.”
“요즘 날씨가 따뜻하긴 해도 스튜디오 안은 조금 추우니까요. 미리 온도를 높여놓고 있었죠.”
그의 말대로 스튜디오 내부는 딱 좋게 훈훈했다.
“차 한잔 마시겠습니까?”
“부탁드려도 될까요?”
도현의 대답에 스테파노스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내내 쫓기듯이 굴던 도현이 보인 여유에 헨리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도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자신이 넘치거나 시간이 여유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궁금한 게 많을, 지금까지 기다려주었던 스테파노스를 위해 내어줄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
“지난 삼 일간 연습하신 겁니까?”
“네. 기존의 계획대로 크로이처 소나타를 녹음하기로 했어요.”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탄식하듯 말한 스테파노스는 다 우려진 찻물을 두 사람의 찻잔에 따라주었다. 응접실에 차오르는 허브향을 느끼며 도현은 잠깐 회상에 빠졌다.
‘얼마 전엔 여기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지금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지.
‘회상은 모든 게 끝난 후에 해도 충분해.’
그런 생각과 함께 찻물을 들이켰다.
“그럼 크로이처와 달빛이 모두 준비된 거겠죠?”
“예.”
“기대되네요. 아, 이런 말 부담될까요?”
“아니요.”
도현이 살짝 웃었다.
“기대 안 해주시면 섭섭할걸요.”
기대받지 못하는 연주자는 너무 슬프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럼 편하게 기대해 볼게요.”
“하하, 그래요.”
순서와 주의 사항에 대해 몇 가지를 확인하고 나자 세 사람의 찻잔이 비워졌다. 헨리와 도현이 준비된 부스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컨디션이 무척 좋아 보입니다.”
“그런가요?”
고개를 기울인 도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아요. 머릿속이 깨끗하거든요.”
보통 그런 건 긴장해서 머리가 새하얘질 때 나오는 말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저도 그러겠습니다.”
짤막한 대화가 오간 후 도현은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첫 번째 녹음이 시작되었다.
* * *
주어진 시간은 이틀.
휴식을 취하고, 식사하고, 잠을 자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실상 실제로 주어진 시간은 그보다 훨씬 줄어든다.
연주에 문제가 있어도 피드백을 하고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솔직히 스테파노스는 이 음반 프로젝트가 무산될 가능성까지 상정했다.
도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실력을 알고 믿기에 한 생각이었다. 적당히 ‘괜찮은’ 연주로는 저 까다로운 연주자가 만족할 리 없다는 걸 아니까.
스테파노스는 복잡한 기분으로 Beethoven demo 1이라는 파일을 만들었다. 뒤에 붙은 숫자가 몇 번까지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는 각오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스테파노스는 손짓으로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이었다.
신호를 확인한 도현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불시에, 깊고 낮은 음악을 스튜디오에 퍼트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의 성인(樂聖). 영웅.
본디 영웅의 삶이란 겉보기엔 웅장하기 그지없어도 들여다보면 비극의 연속인 법이라. 베토벤의 삶 또한 별다르지 않았다.
그는 독일의 본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였지만 그리 실력이 좋지 못했고 어머니는 병약했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 그를 통해 이루지 못한 욕망을 충족하려는 아버지로 인해 가혹하게 음악을 강요당했다.
그렇게 전해진다.
매일 건반 앞에서 아이가 울고 있었다는 말이 속설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에 관한 언급이나 정확하게 남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음악으로 가득 찼고, 음악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찾았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진실인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도현의 영웅에겐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
다른 이들에게 형과 베토벤은 비할 바 없는 상대겠지.
하지만 도현에게만큼은, 예술을 구원한 영웅보다 정희성이 더욱 거대했다.
제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 사람이.
도현은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했다.
음악.
음악이 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어머니가 저를 바라봐주게 한 음악. 연주하지 않는 자신은 그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일 뿐이란 것을 깨닫게 한 음악.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던 통로이자 그를 고통에서 해방하고, 동시에 더 깊이 추락하게 만든 원인.
그건 저주였을까, 구원이었을까?
형조차 끝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떠난 그 문제를 도현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알아야 했고.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알고 싶었다.
깊은 네 마디의 도입부가 시작되자 스테파노스는 무언가 거대한 일이 시작되는 듯한 느낌에 숨을 죽였다.
전운이 감도는 전쟁터처럼 불길한 의뭉스러움을 품은 음색이 무게감 있게 퍼져나간다. 치밀하게 설계된 부스와 마이크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한 번에 녹음이 성공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삼 일을 돌이켜보면 그들은 늘 첫 번째 연주보다 마지막 연주를 더욱 완벽하게 해내었다.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게 아니라 더욱 눈에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성미이기 때문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도현은 이 첫 번째 데모가 완성본이 되지는 않으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온 힘을 쏟아부었다.
한 달간의 준비.
삼 일의 연습.
그 시간 동안 도현의 음악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쩍 나아갔지만, 여전히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도현에게 정희성의 기억과 경험이 있는 이상은 영원히 그러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현은 닿지 못할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지금 움직이는 팔, 울리는 현과 공기의 파동. 그와 함께 연주하는 헨리와 컨트롤 룸에 있는 프로듀서.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깊은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담고, 무엇을 표현할지 정했다면 그때부턴 이성이 판단할 차례였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게.
흔한 말이지만 클래식 연주자에게 필수적인 덕목이기도 했다. 도현은 순간순간, 모든 찰나를 계산하고 판단하며 최대한 똑똑하고 깔끔하게 자신의 음악을 펼쳐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