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6화. Debut as a ?? (15)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 같은 곧은 팔이 주제를 그려낸다. 연주는 중단되는 일 없이 30분가량 이어졌다.
“…….”
스테파노스는 녹음을 종료하고 나서도 한참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맙소사.”
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감탄사였다.
두 사람이 부스 밖으로 나오자, 스테파노스는 참지 못하고 도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스테파노스는 무척 덩치가 큰 거구였기 때문에 도현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는 흥분 탓에 조금 성나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대체 지난 이 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일이라니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요.”
“아. 그거라면 헨리 덕분이에요. 그와 듀엣 연주를 해보는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도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론은 완벽하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신체적, 경험적, 그리고 음악적 경지의 제약. 이 세 가지 제약이 도현이 그것을 온전히 풀어내는 것을 방해했다.
비유하자면 문 하나로 가로막힌 바다와도 같았다.
너머에 거대한 바다가 존재하는데 통로는 문 가운데에 뚫린 작은 구멍이 전부다. 그 사이로 힘겹게 새어 나온 물은 고작 발목을 간신히 적실 뿐이었다.
도현은 늘 그 통로를 넓히려고 노력해왔고,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계는 존재했다.
꾸준한 연습과 반복으로 점차 풀려가는 신체적 제약과 다르게 나머지 두 제약은 도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신체와 이론이 준비되었음에도 경험이 부족하고 음악성이 낮아서 가진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그게 도현의 상태였다.
그것을 헨리와의 듀엣 연주가 돌파해 주었다.
그는 도현이 아무리 두드리고 내쳐도 절대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을 연주자였다. 그런 연주자를 상대로 악을 써 달려들고, 부딪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 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도현의 음악성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스스로 느껴져.’
자신에게 엄격한 도현조차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스테파노스의 눈에는 얼마나 기이할까.
그에게 적응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기엔 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다시 녹음해봐도 될까요?”
다시, 당장 더 나은 연주를 하라고 내면이 그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요?”
“네.”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당황한 스테파노스가 눈만 끔뻑일 때였다.
헨리가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두 번째 녹음을 시작하는 건 좋은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 않니?”
“네?”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중요한 건 다시 연주….
“방금 녹음한 거 들어봐야지.”
“아.”
도현은 탄식했다.
멍하니 뜨인 눈과 벌어진 입술이 조금 바보 같아 보여서 헨리가 피식 웃었다.
“너무 한 가지에 몰입하면 이렇게 한두 개씩 까먹기 마련이라니까. 녹음된 것 확인하면서 머리도 조금 식혀.”
“…네.”
멋쩍은 낯이 된 도현은 얌전히 대답했다.
* * *
스테파노스는 시간을 살폈다.
‘벌써….’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아홉 시였건만, 벌써 시계는 한 바퀴를 돌아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이 스튜디오에 도착한 지 열두 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열두 시간 동안 연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녹음을 돌려서 재생해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악보를 펼치고 연구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거나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고려해도 오래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역시 촉박한 일정이었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악보를 들여다보는 도현을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구와 연주, 그것을 계속하면서도 제자리이면 모를까.
‘계속 발전하고 있어.’
도현의 발전은 거의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보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스테파노스는 시선을 돌려 도현의 옆에 앉은 헨리를 바라보았다. 아침의 멀끔한 모습에 비하면 조금 초췌해진 남성은 열정적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헨리 씨도 마찬가지인 심정이겠지.’
마법의 식물처럼 물을 주는 대로 쑥쑥 자라나는데, 아니, 물을 안 줘도 알아서 물을 퍼다가 혼자 크는데, 그걸 지켜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까?
만약 있다고 해도 여기 있는 두 남자는 아니었다.
스테파노스는 도현의 한계를 보고 싶었다. 도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했고, 거기까지 닿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내내 조용히 있던 스테파노스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녹음해보고 마무리하죠.”
“네?”
도현이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놀람이 드러나자 이제야 그 나이대 아이 같아 보였다.
“체력이 무한정으로 솟아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일 또 녹음하려면 오늘은 이만 쉬어야죠.”
녹음을 완전히 끝내자는 뜻이 아니란 걸 깨달은 도현이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스테파노스가 꽤 짓궂게 말했다.
“내일로 미뤄지는 게 싫으면, 마지막 녹음을 완벽하게 하면 되겠네요.”
“…해볼게요.”
스테파노스의 말은 조금 장난기가 어려 있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비장했다.
음악을 조금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그 진지함이 기꺼워서 스테파노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도현은 차분하게 바이올린을 들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끝에 닿는 바이올린의 감촉이 그에게 안정감을 선사해 주었다.
‘마지막이야.’
내일 또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라도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다 문득.
‘…아니야. 부족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내 그랬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늘 부족했다. 모자랐다.
그게 최선이 아닌 것 같아서 의심스러웠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필사적임이? 간절함이? 아니면 결심이? 무엇이 부족해서 계속해서 반복했을까? 최선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까?
“…….”
바이올린을 들고 자세를 잡던 도현이 갑자기 생각에 빠지자 헨리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지치기라도 한 걸까.
‘하긴, 시간이 벌써 아홉 시를 넘겼으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제대로 쉬지 않고 연주했다. 다 큰 성인인 헨리도 힘든 마당에 도현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춰야 하나.’
과욕을 부리다가 오히려 더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도현의 컨디션을 걱정한 헨리가 그를 부르려고 입을 벌린 순간.
내리깐 속눈썹 아래 가려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고요하고,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눈동자가.
“…….”
헨리는 터져 나오려는 헛숨을 속으로 삼켰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 도현은 자신만의 벽 앞에 서 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며, 그것을 넘어서서 한 차원 높은 곳으로 가려 한다.
“…….”
스테파노스 또한 도현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런 연주자를 마주하는 일이 잦은 사람답게, 헨리보다 더 빠르게 도현의 상태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시선 교환으로 서로의 의중을 파악했다.
나올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려야지.’
뭐가 되었든, 만족할 만한 것을 얻을 때까지.
자세를 조금 더 편안하게 잡은 헨리는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 시 반. 초침이 부산스레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안에 못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공간과 시간 감각이 흐려지고 왜곡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부피를 키웠다. 키우고 키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처럼 느껴지는 건 오직 내 몸과 바이올린뿐이다.
뭘까. 무엇을 놓치고 있던 걸까.
“…….”
도현은 모든 것을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기억, 사람들, 병원, 스튜디오, 형, 음반, 덩어리 님, 음악, 크로이처 소나타…. 모든 정보가 어지럽게 얽혀 갔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둔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엿가락처럼 기다랗게 늘려서, 그 늘어진 시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도현은 문득 나아가는 게 힘겹다고 느꼈다. 움직이지 않는 발로 앞으로 나아가려 애써보다가 그 자리에 멀뚱히 멈춰 섰다.
앞으로 난 길은 까마득했다.
어찌나 아득히 긴지, 끝이 새카만 굴처럼 보이는 길은 되돌아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알아.’
다시 이만큼 걸어오는 게 무척 힘겨우리란 거. 그 과정에 지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 다 알겠어. 알겠는데….
앞을 향하던 발이 방향을 틀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와 달리 발이 한없이 가볍다. 지금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걸음걸이는 갈수록 달리기에 가까워졌다.
어디까지?
툭 튀어나온 질문에 도현은 대답했다.
맨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부터 작은 형태가 보였다. 도현은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계속 달렸다. 형체는 점점 선명해졌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와도 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시작점으로 돌아왔을 때.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려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앳된 얼굴, 희게 질려 창백한 뺨과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무표정한 표정.
꺼림칙한 동양인 아이.
“…안녕.”
뜬금없는 인사에 아이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남들 눈에는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이겠지만, 도현에게는 보였다.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외면하여 나아가려 했던 과거이자 현재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병실에 가둬두었던 나의 조각이니까.
도현은 찬찬히 아이를 보았다.
감정이 부러워서 멋대로 남의 것을 흉내 내던 아이. 그 파편을 손에 쥐고 싶어서 기어이 연기라는 수단을 찾아낸 미련한 존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도현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삼킨 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아이가 제게 내민 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와 달리 군데군데 굳은살이 지고 마디가 길쭉하게 긴 손가락을 가만히 보다가….
손이 겹쳐짐과 동시에 눈이 떠졌다.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스튜디오 부스, 컨트롤 룸에 있는 스테파노스. 그리고.
몸을 틀어서 상대를 보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헨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갑자기 혼자 생각에 빠진 것도 사과해야 했고, 기다려준 것에 감사를 전해야 했으며, 그동안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튀어나온 건 이상한 말이었다.
“<해방된 예루살렘>을 알고 있죠?”
“…그야, 알고 있긴 하지.”
16세기 이탈리아, 토르콰토 타소라는 시인이 쓴 책. 이걸 헨리가 알고 있는 이유는 독일의 음악학자 아놀드 셰링이 그의 저서 <베토벤과 시>에서 이 시를 소개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방된 예루살렘> 중의 12가, ‘탄트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을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에 대입하여 해석했다. 꽤 재밌는 내용이어서 전부 기억했다.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몬테베르디가 그의 마드리갈-성악곡-에서 가사로 채택하여 잘 알려진 이야기기도 했고 말이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걸로 할게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공통적인 이야기니까요.”
“……?”
“제 역할은 클로린다예요.”
“뭐?”
“헨리는 탄크레디고요.”
도현은 무작정 말했다.
그 어렸을 적 언젠가.
케일리에게 크로머의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싱클레어를 연기했던 미숙한 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