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화. Debut as a ?? (16)
“잠깐….”
그가 당황하여 부르자 도현이 의아한 눈으로 헨리를 보았다.
더 궁금한 게 있냐는 듯.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헨리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
그 힘 빠진 말투에 도현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복잡한 건 없어요. 그냥 놀이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역할 놀이요.”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은 소년의 얼굴은 정말로 재밌는 것을 앞둔 아이처럼 말갛고 천진했다. 헨리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럼 시작할게요.”
도현의 말에 헨리는 자세를 바로 했다.
차분한 시선이 건반을 향했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인 만큼 그의 모든 준비는 완벽했으나, 눈동자에 서린 의문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너는.’
<해방된 예루살렘>.
아리오스토, 마키아벨리,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타치아노 등이 활동했던 르네상스 문학의 전성기에 쓰인 작품이자, 화려한 르네상스 문학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평가받는 작품.
그게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무척 가치 있는 작품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 상황에서는 조금 난감했다.
‘…별수 있나. 믿고 해보는 수밖에.’
어차피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한편.
도현과 헨리가 나누는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스테파노스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타소를 알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그건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면 적당히 납득 가는 수준이다.
그가 정말 놀란 건 다른 이유였다.
- 제 역할은 클로린다예요.
‘역할이라고 했지.’
마치, 이야기에서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맡는 것처럼….
- 도현은 천생 배우야.
도현의 연주 스타일은 스테파노스도 알고 있다. 그는 전달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연주자라서 현실을 잊고 가상의 공간을, 감정을 느끼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현이 천생 배우라는 밀턴의 말에는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 전달력, 표현력과 같은 재능은 연기가 아닌 연주에서도 발휘될 수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이번 음반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면 도현에게 진지하게 연주자로서 데뷔하는 걸 권할 생각이었다.
그런 연주자를 썩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그런데, 도현은 역할이라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아니라 그 속의 역할.
무엇이 다른가?
스테파노스는 한구석에 의문을 두며 <해방된 예루살렘>의 내용을 떠올렸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지 7년이 흐른 시점. 천사, 가브리엘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게 나타나 이리 말한다.
고드프루아여, 바로 지금 기다리던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한 계절이 시작되네. 그런데 어찌하여 고통받는 예루살렘을 해방하려 하지 않는가?1)
이에 고드프루아가 군주들을 모아 예루살렘 정복을 촉구하며, 십자군과 예루살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탄크레디는 십자군의 용사였으며 클로린다는 적국 회교도의 전사였다.
그리스도인과 사라센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 천사의 편과 악마의 편. 그들은 양 극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농간인지, 먼발치에서 투구를 벗은 클로린다를 본 탄크레디는 한눈에 반하고 만다.
탄크레디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었다.
스테파노스는 가만히 부스 안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한 눈빛을 한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
검은 눈동자에 스친 빛에 스테파노스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고요 속에서 도현이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한밤중에 숲속을 조용히 거니는 발소리처럼, 불길한 도입부가 바이올린으로부터 퍼져나가 스튜디오를 짙게 물들인다.
적막한 밤. 교교한 달빛 아래 투구와 갑옷이 차갑게 빛난다. 스테파노스는 그 갑옷의 주인을 바로 알아차렸다.
사라센의 전사. 클로린다였다.
“…….”
전사의 발소리에는 무력한 의구심이 섞여 있다.
십자군의 성채를 불태우고, 그리하여 모국에 영광된 승리를 안기고자 했다.
허나.
‘내가 세나포의 딸이라고.’
출정 전, 충직한 하인이 알려준 그녀의 진짜 신분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에티오피아 통치자, 세나포의 딸이었다.
의심한다. 한평생 걸어온 길과 자신의 모국을, 종교를. 그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성채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운명의 광기에 몸을 맡기는 클로린다처럼 바이올린의 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건들면 툭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색은 마치 자기 자신을 한껏 방어하는 클로린다 같았다.
눈앞에 클로린다가 서 있는 듯이 그 모든 장면과 감정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졌다. 음악이 그에게 말을 걸었고, 바이올린이 감정을 제멋대로 건드렸다.
“…….”
스테파노스는 활을 깊게 긋는 소년을 보았다. 냉혹하고도 음울한 낯빛을 한, 그럼에도 전사의 강인함과 단단함을 지닌 소년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전율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깨달았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은 클로린다였다.
성채가 불타오른다.
붉은 화마에 휩싸여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잿빛으로 화한다.
바이올린이 압도하는 것 같던 음악에 변화가 생겨난다. 피아노가 바이올린이 건넨 주제를 철저하게 받아내어 그의 음색으로 새로이 적신다.
잠에서 깨어난 탄크레디는 성이 타오르는 것을, 투구를 쓴 이가 제 친우인 아리모네를 죽이는 것을 보게 된다.
탄크레디가 클로린다를 쫓는다.
피아노가 바이올린을 추격한다.
도현이 말한 ‘역할’이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한 헨리는 기가 막힐 정도의 테크닉과 숙련도로 그 모든 것을 표현해냈다.
스테파노스는 두 연주자의 기량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뛰어난 테크닉과 표현력으로 전달하는 연주자와 전달의 개념을 넘어서 연기하는 연주자. 그것을 어찌 비교하여 우위를 두란 말인가?
그는 속절없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
클로린다가 자신을 추격하는 십자군에게 묻는다.
그렇게 달려서 내게 무엇을 가져가려는 것이냐고.
탄크레디는 대답한다.
전쟁과 죽음.
당신이 맞이할 전쟁과 죽음을 바란다고.
차가운 밤을 등지고 서로의 칼이 서로를 향한다. 그 필연적인 운명의 선고에 스테파노스는 가늘게 떨었다.
활이 현을 거칠게 스쳐 지나갈 때마다, 건반 위로 손이 튈 때마다, 차가운 광기가 얽히고 터져 나온다.
그건 이미 음악이 아니었다.
아니, 음악이지만, 음악의 장르를 벗어났다. 음악인 동시에 이야기였으며, 오페라였고, 또 다른 무언가였다.
스테파노스는 마치 자신이 그 전쟁터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십자군 무리의 일원이 된 것 같기도 했으며, 절대자가 되어 달의 광기에 몸을 맡긴 두 남녀를 내려다보는 것도 같았다.
곧이어 프레스토, 매우 빠르게 속도가 바뀐다. 먼저 칼을 빼 들고 휘두르는 클로린다처럼 도현이 A단조의 1 주제를 연주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살의에 찬 클로린다는 정열적이며 집요했고, 냉혹했다. 그 살벌한 서늘함에 스테파노스가 숨 쉬는 것조차 잊었을 때.
“……!”
헨리의 손에서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펼쳐졌다. 십자군의 용사는 회교도 전사의 칼에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성을 불태운 적을, 친우를 죽인 원수를 죽이기 위해 칼을 치켜든다.
그의 눈은 어느새 적을 앞에 둔 전사처럼 깊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건반을 칼과 창처럼 휘둘렀다. 손가락 끝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는 칼처럼 건반을 불시에 짚고, 페달을 밟은 발이 치켜든 방패처럼 절묘하게 움직인다.
현란한 카덴차까지 이어지자 눈앞에 불꽃 튀는 듯한 환상이 인다.
두 전사는 어느새 분노의 이유조차 잊고 그저 서로를 베는 것에만 집중한다. 살갗이 벌어져 붉은 피를 흘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겨누었다.
펜싱술에 기반했던 싸움은 점차 격렬해지며 칼조차도 무용해진다.
그들은 황소처럼 투구와 방패로 충돌하고, 맨팔로 상대의 목을 조르고, 갈퀴처럼 세운 손아귀로 상대를 움켜잡고 할퀸다.
더 이상 누구의 핏물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동쪽에서 새벽이 밝아왔다.
떠오르는 해는 어둠에 웅크리고 있던 두 사람을 비추었다.
“…….”
스테파노스는 예견된 비극에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자연히 오페라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를 흘려 약해진 몸을 무기 손잡이에 기댄다.
이제 마지막 별빛이 사라진다. 이른 새벽 동쪽에서 빛나던 별이.
탄크레디는 적이 피를 더 많이 흘린 것을 보았다. 또한 자신은 그리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기뻐하였다.
아, 어리석은 마음. 행운의 바람이 살랑대기만 해도 기뻐하는구나.
불쌍한 남자, 무엇이 그리 기쁜가?
아, 얼마나 슬픈가.2)
탄크레디는 투구 너머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극적 운명을 휘두른다.
피아노의 스포르찬도가 날카롭게 클로린다의 심장을 꿰뚫었다. 바이올린의 Bb 음이 떨리는 음색을 자아냈다. 죽음을 선고받은 클로린다의 옅은 숨결이 들려왔다.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성은 긴 어둠을 지나 종막을 맞이하는 밤처럼 신비롭고 처연했다.
죽음.
클로린다는 선명하게 다가온 죽음을 느낀다.
하나, 이상하게도 두렵진 않았다.
모든 것을 굽어보는 하늘 탓일까.
아니면 이젠 모든 혼란과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탓일까.
더욱 깊어진 바이올린 소리에 스테파노스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눈앞에서 숨이 멎어가는 클로린다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숭고하게 끝을 맞이함에도, 그것을 보는 스테파노스는 연민을 느꼈다.
이내, 바이올린은 마지막 숨을 흘려보내고 침묵한다.
“…….”
코다의 첫 단락에서 바이올린이 흐름을 주도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피아노가 선율을 주도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냇물의 흐릿한 소리가 들려온다.
탄크레디는 시냇가로 이동해 숨이 멎은 전사의 투구를 벗겨주었다.
그가 무엇을 보았겠는가?
길고 구슬픈 선율이 울린다.
헨리의 손가락이 건반을 스치자 절망적인 아다지오가 선명한 슬픔을 토해낸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진실은 너무 혹독했다. 마침내 해가 밝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탄크레디가 절망했다.
아 템포로 회귀한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크게 요동치는 악구를 주고받으며 장대한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헨리와 도현은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음악에 집중했다.
마침내, 서로 격돌하던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하나의 소리로 겹쳤을 때.
1악장이 끝났다.
“…….”
스테파노스는 거의 넋을 놓아버렸다.
방금 그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대체 그가 무엇을 겪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크로이처 소나타는 3악장.
그가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헨리가 건반을 눌렀다. 2악장이 시작되었다.
“……아.”
끝끝내, 그는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레코딩 엔지니어라는 걸 되새기며 애써 떨리는 손을 수습했다.
연주자들이 저곳에서 싸우고 있다면 그는 이곳, 컨트롤 룸에서 그만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테파노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았다. 밀턴.’
도현은 음악을 완전히 분해하고 재구축하여 새로이 조립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오직 그만이 연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음악을 연기했다.
스테파노스는 그가 천생 배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Torquato Tasso, La Gerusalemme Liberata, 1575
2) Monteverdi, Combattimento di Tancredi et Clorinda,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