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28화 (529/582)

제528화. Debut as a ?? (17)

2악장은 혼을 쏙 빼놓았던 이들을 달래려는 것처럼 우아하고 근사했다.

누가 봐도 화려한 기교와 속주의 연속이었던 1악장에 비하면 쉽게 느껴지지만, 그렇기에 더욱 깊은 음악성이 요구되었다.

클로린다의 이야기는 죽음으로서 끝맺어진다.

그녀는 죽음을, 탄크레디는 상실을. 그것이 결말이다. 그러니 클로린다는 더 이상 이야기 속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도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스테파노스는 투소의 문단 중 한 부분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은 제비꽃에 뒤섞인 백합꽃과 비슷한 아름다운 창백함으로 살짝 덮여 있다. 시선은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고, 하늘과 태양은 자비롭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말할 수 없었기에 기사에게 화해를 청하기 위해 차가운 빈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이 몸짓을 하며 아름다운 여인은 숨을 거두는데, 그저 잠이 든 것만 같았다.1)

겨울의 자작나무처럼 희고 낭창한 팔이 움직이며 아름다운 선율을 그려낸다.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주제는 마치 죽기 전 하늘의 부름을 받은, 혹은 삶의 고통을 모두 뒤로하고 하늘의 품으로 돌아간 클로린다 같았다.

한없이 아름다운 음색은 심장의 한 어귀를 건드렸다.

도현의 왼손이 현을 절묘하게 짚자,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설계된 음이 흘러나온다.

스테파노스는 그게 막이 내린 뒤 무대에서 내려간 배우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도, 관중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배우의 이야기.

스테파노스는 어느새 딱딱하게 굳혔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그의 영혼을 잡아채 전쟁터 한가운데로 몰아넣으려 했던 1악장과 다르게 2악장은 오히려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다정하고도 우아한 방식으로.

이야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음악은 이어지고 있노라고.

우리의 삶은 여기 있다고.

“…….”

도현이 처음에 가져왔던 해석도 스테파노스에게서 감탄을 자아내었다. 절대로 열셋의 소년이 내어놓을 만한 수준의 연주도, 해석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도현은 한 차원 더 나아갔다.

기술적으로는 달라진 부분이 없을지라도 그 음악적 영혼이, 그 경지가 놀라우리만치 높게 비상했다.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에 감동마저 일었다.

이제 도현은 크로이처 소나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천사가 인도하는 길을 걷듯이 환상적이고 고상하던 2악장이 서서히 저물고.

가는 바이올린 소리를 마지막으로 찰나의 적막이 들어섰다.

“…….”

스테파노스는 도현의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난 것을 보았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힘듦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내일 다시 녹음할 필요는 없겠군.’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히 이 연주가 크로이처 소나타 녹음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스테파노스의 기대 속에서 꼿꼿이 선 소년이 헨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고.

3악장이 시작되었다.

곧 어디에 시선을 두는 거냐는 듯이 바이올린이 거침없이 치고 나왔다. 정확한 타이밍에 섬세하게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베토벤의 뛰어난 악상 전개 능력이 도현의 스토리텔링 능력과 만나 한없이 화려하게 꽃피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마치 한 쌍의 새처럼 노래했다. 빙빙 돌며 날갯짓하는 것처럼 멀어졌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다시 서로의 털을 골라주고 있다.

클로린다가 이쪽을 보며 웃는다.

그녀는 더 이상 회교도의 전사도, 세나포의 딸도, 십자군의 손에 죽은 패배자도,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여인도 아니다.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슬퍼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다.

춤을 추듯 나아간다.

스테파노스는 어느새 그 손을 맞잡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음악이 그를 이끌었다. 저항할 수 없는 흐름이 그를 청중에서 음악의 일부로 만들었다.

D단조로 시작한 코다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유니즌으로 그 마지막 화려함을 장식해갔다. 두 번의 아다지오는 템포를 변화시키며 전개되며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

바람에 얽히는 꽃의 잎사귀와 푸른 잔디처럼,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스튜디오를 감싸던 두 대의 악기가 일시에 멈추었다.

서로 공명하듯이 잔음이 마지막까지 부스 내를 울렸다. 마이크에 스며들던 음은 체감상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 잦아들었다.

연주가 모두 끝났음을 아는데도 스테파노스는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년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영원토록 시간이 정지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도현이 이쪽을 바라봤을 때.

“……하.”

그가 더는 클로린다가 아님을 확인한 스테파노스는 미약한 허탈감이 배어난 탄성을 토해냈다.

그건 그를 음악 속으로 인도했던 존재가 사라졌음에서 온 허탈함이었으며, 그것은 스테파노스가 인지하기도 전에 저 경이로운 연주자에 대한 감상으로 뒤덮여 스러졌다.

“도현, 아니, H. 당신은….”

“한 곡만.”

“예?”

“한 곡만 더 연주할게요.”

“무슨….”

“프로듀서, 부탁드려요.”

이렇게 멋진 연주를 해놓고서도 만족하지 못했단 말인가?

스테파노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도현을 바라봤다. 그때,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던 헨리가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곡을 녹음하고 싶다는 소리지?”

“네.”

“아.”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에 스테파노스는 탄식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또다시 녹음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곡을 녹음하고 싶다는 간청이었다.

“그럼, 크로이처는….”

“전 이보다 더 잘 연주할 자신이 없어요.”

도현의 대답은 시원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나왔다.

오랜 연주로 인해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고, 어깨는 덜덜 떨리면서도 표정만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보는 이까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만큼이나 확신에 찬 표정에 스테파노스는 조금 감동했다.

그 또한 느끼고 있었다. 도현이 자신의 연주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을 말이다.

그의 연주가 그 또래에서 불가능할 만큼 높은 수준에 다다라 있음에도 도현은 늘 갈증에 허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도현이 스스로 만족했다고 표현했다.

저리 확신에 차서.

어디서 기인한 감동인지는 애매했다. 자기 확신을 지니게 된 연주자에 대한 감동인지, 결국엔 스스로 목을 축인 생존자에 대한 감탄인지.

“저도 그렇습니다.”

헨리도 말을 거들었다.

그 또한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이 연주가 완벽하다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도현이 헨리의 나이가 되면 이보다 훨씬 훌륭한, 더욱 정교하고 다듬어진 연주를 해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금 한 연주는 그 순간이었기에 가능했다.

헨리는 몸을 돌려 도현을 보았다.

“고마워.”

“네?”

“음악에 나이는 상관없는 법인데 내가 그걸 잠깐 잊고 있던 거 같아.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헨리는 그간 자신의 기준점을 통과한 소년에게 보상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음악에는 나이가 없다는 걸.

방금, 도현으로 인해 헨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알지 못했던 음악의 가능성을 깨우쳤다. 지금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상태지만, 이 깨달음을 갈고 닦아 그의 것으로 체화하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헨리가 손을 내밀었다.

“좋은 연주였어.”

첫날 멋대로 도현의 손을 뒤집어서 확인하던 남자는 이제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저도요.”

도현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그 누구도 아닌 헨리였기에. 도현이 처음 맞부딪쳐 깨진 연주자였기에 더욱 특별했다.

“그럼 다음 연주 기대할게. 아, 스테파노스 프로듀서. 이대로 끝낼 생각은 아니시죠?”

악수한 손을 놓은 헨리가 스테파노스를 보며 물었다.

침음성을 흘리던 스테파노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를 넘긴 시각.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밀턴에게 연락을 넣어둘 테니.”

스테파노스의 대답에 헨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그런 연주를 듣고 다음 날 녹음하자는 태평한 말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스테파노스의 연락을 받은 밀턴은 난감해하며 자신이 아닌 도현의 부모님께 허락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도현은 잊고 있었던 부모님을 떠올렸다.

…나, 지난 삼 일간 연락 안 하지 않았나?

뒤늦은 깨달음에 도현의 안색이 조금 파래졌다.

황급히 스테파노스와 헨리에게 양해를 구한 도현은 핸드폰을 들고 로비로 나갔다. 응접실에서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까지 멀어진 후에,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다섯 번의 신호음이 울렸음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항상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받던 부모님이라 속이 덜컥거렸다.

도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갈 즈음.

달칵.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도현의 안색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가 생각했던, 화가 나서 전화를 거부하는 상황은 일단 아닌 것 같았다.

‘그럴 분들이 아닌데.’

왜 그런 바보 같은 걱정에 젖었는지.

도현은 자신을 탓하며 입을 열었다.

“저….”

- 도현이?

그러나 도현이 말을 하기 전에 상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엔 도현이 걱정했던 분노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안도와 기쁨이 한가득 흘러넘쳤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 며칠간 많이 바빴니? 밀턴 씨랑 로테에게 전해 듣긴 했는데 엄마는 걱정이 돼서…. 그래도 이렇게 전화해줘서 고마워.

“…….”

- 방해될까 봐 연락을 안 했는데, 혹시 서운했던 건 아니지? 아빠가 핸드폰 붙잡고 종일 고민하는 걸 엄마가 말렸거든…. 음, 생각해 보니까 서운했을 수도 있겠네. 서운했으면 미안해. 도현이 생각 안 한 건 아니야.

내내 연락을 기다린 사람처럼 봇물 터지듯이 말이 흘러나왔다. 도현은 그 안에 어린 진심을 가짜라고 매도할 수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도현은 간신히 한마디를 건져내었다.

“…죄송해요.”

어렵사리 뱉은 말에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비웃음이 아닌 다정한 기운을 품은 웃음소리였다.

- 그럼 내일도 연락해줘. 연락이 어려우면 문자라도. 로테한테 전해 들어도 걱정은 되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현은 곧 한국에 돌아가니까. 그러나 그녀는 며칠 후면 도현이 한국에 가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도현은 그 미련함에 전염이라도 된 듯이, 순한 양이 되어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서혜나는 궁금한 게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그녀와 그 옆에 있는 이장혁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느라, 도현은 본론을 오 분이 지나고 나서야 꺼낼 수 있었다.

- 거기가 지금 열 시? 열한 시? 그쯤이지?

“네.”

- 늦은 시간이긴 한데….

잠깐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

- …원하던 건 찾았니?

그리고 이어서 나온 질문에 도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진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왜 이렇게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까지 투명한 사람이었나, 그런 실없는 의문도 잠깐.

“네. 그래서 지금 해야 해요.”

덤덤히 나온 인정에 서혜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래, 그러면 그래야지.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 응. 대신 음반 나오면 엄마랑 아빠도 줘야 해?

“그건, 당연하죠.”

- 하하, 그러니? 기대되네. 우리 …한테 들려주면 좋아할 것 같고.

“네?”

- 아! 아니야. 아무튼, 너무 늦게까진 하지 말고. 건강이 제일 중요해, 알았지?

조금 찝찝했으나 그것을 잡고 늘어질 시간은 없었다.

결국 도현은 수긍했다.

“네, 조심할게요.”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도현은 핸드폰을 끈 뒤,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머릿속의 모든 복잡한 생각은 지워졌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Torquato Tasso, La Gerusalemme Liberata,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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