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화. Debut as a ?? (18)
솔솔 부는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소녀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금발을 한 손으로 모아 반대편으로 넘겼다. 귀에 꽂아둔 흰 이어폰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린 얼룩 없이 새파란 하늘은 소녀에겐 너무 익숙했다. 그 아래 드리운 나무도, 들풀도, 공기 중에 섞여든 묘한 바다 내음도.
진은 앉아 있던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집힌 시야로 커튼이 닫힌 창문이 보였다. 저 너머엔 새벽녘에 들어온 소년이 쿨쿨 자고 있을 터다.
진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진.”
앞쪽에서 들린 부름에 뒤로 꺾였던 고개가 바로 세워졌다. 한 손에 커피 잔을 든 남자는 편안한 카디건을 한 장 걸치고 있었다. 밀턴이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두곤 진의 옆에 앉았다.
“노래 듣는 중이니?”
“응. 도리가 녹음해 준 거.”
“뭔데?”
“사랑의 기쁨.”
스튜디오에서 들었던 <사랑의 슬픔>의 짝꿍과도 같은 곡. 진은 음반에 실리지 않은 곡을 갖고 싶다 요청했고, 도현은 흔쾌히 녹음해 주었다.
“오. 그건 나도 들어보고 싶은데.”
“도리가 허락해 주면 파일 보내줄게.”
“그러면 좋지.”
두 부녀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진은 멍하니 살랑거리는 들풀을 응시했다. 초록빛 물결이 꼭 바다 같았다.
“서운해?”
“응?”
“내일 네 친구가 떠나잖아.”
“…으음. 아무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진이 발을 달랑거렸다.
“음반 녹음한다고 나랑 별로 놀아주지도 않고, 스튜디오도 못 따라가게 하고, 녹음본도 음반 발매 전까진 들려줄 수 없다고 하고. 마지막 날인데 피곤해해서 파티도 못 하잖아.”
“…우리 공주님이 쌓인 게 많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나오는 말에 밀턴이 헛웃음을 치자, 진이 툴툴거렸다.
“이상해. 떠난다니까 형제를 빼앗기는 기분이야.”
“형제도 너희처럼 사이좋지는 못할걸.”
“그건 그래.”
진이 턱을 치켜들며 으스댔다. 밀턴은 그런 소녀가 사랑스러워 유쾌히 웃었다. 늘, 어떻게 이런 기적이 제게 찾아왔는지 의문일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웃는 그를 새침하게 바라보던 진이 곧 한숨을 내쉬었다.
“뭐어, 그래도 괜찮아. 이거 녹음해 줬으니까.”
“사랑의 기쁨 말이니?”
“응. 그것도 그렇고.”
애매하게 끊긴 말에 밀턴이 의아해했으나 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박자에 맞춰 발을 까딱대었을 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드르륵 하고 창문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를 들은 부녀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어.”
막 창문을 연 소년이 제게 향한 두 쌍의 눈에 멍하니 굳었다. 방금 일어났는지, 부잣집 도련님처럼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조금 부슬부슬 뜬 상태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도현은 곧 정신을 차렸는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조금 어색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밀턴 씨. 그리고 진도.”
“…….”
“…그, 저는 씻고 나갈게요.”
“…….”
“음, 좋은 시간 되세요.”
끼익, 열렸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 뒤이어 커튼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여, 방안의 풍경을 가렸다. 밀턴과 진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윽고 커튼이 모두 닫혔을 때.
“…잠 덜 깬 거 같지?”
진이 툭 던진 말에 밀턴은 웃고 말았다.
도현은 진의 명석함과는 결이 다른 성숙함 때문에 도저히 애처럼 안 보이다가도, 가끔 저렇게 엉뚱하게 굴 때가 있었다.
솔직히, 밀턴은 인정했다.
그 한 달 사이 도현이 집 안에 있는 풍경이 익숙해졌음을. 초반의 불편함보다는, 이제는 아침에 자연스레 건네오는 인사와 가끔가다 들려주는 연주가 주는 편안함이 더욱 당연해졌음을.
‘아들이 생긴 기분이군. 아니, 조카랑 더 가까운 느낌인가.’
어찌 되었든, 정말 정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밀턴은 오늘 아침에 받은 스테파노스와 헨리의 연락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득달같이 걸려 온 전화에 내심 기대했건만, 스테파노스가 한 말은 고작 한 마디뿐이었다.
- 네 말이 맞았어.
밀턴이 그게 무슨 말이냐 물었지만, 그는 곧 바쁘다며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밀턴은 아주 오랜만에 얼이 빠졌다.
황당해하며 가만히 서 있는데, 손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다시 전화를 건 건가? 스테파노스가 생각보다 제정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화면을 바라본 밀턴은 예상외의 이름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헨리 루빈스타인이었다.
- 헨리?
- 아, 밀턴 씨. 헨리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헨리는 기본적으로 무척이나 매너가 좋은 청년이었다. 연주자로서의 매너가 그냥 몸에 밴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긍정적이니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었다.
- 헨리의 연락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 하하, 영광이네요.
짤막하게 웃은 헨리는 몇 가지 안부를 물어보다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본론을 꺼냈다.
- 천재더군요, 그 아이.
천재.
도현을 가리킬 때 수없이 사용했던 단어인데, 그 순간의 무게는 달랐다. 관용적인 느낌을 넘어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얼핏 경외와도 닮은 감탄.
- 솔직히 무서울 정도입니다. 더 자라면 대체 무슨 연주를 할지….
헨리는 감탄을 토해내는 것 같다가도 홀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 기억나네요.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 있어요.
그다음으로 나타난 이름에 밀턴은 침묵했다.
희성 정.
- 분명 두 사람은 개성이 강한 연주자고, 그와는 다른 연주를 하는데 문득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천재성 때문일까요?
- ….
많은 생각이 밀턴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 생각은 밀턴이 아주 오래전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헨리는 도현의 연주가 정희성의 연주와 다르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그게 현재로선 사실이지만.
‘그 사계.’
그가 직접 두 귀로 들었던 비발디의 사계는… 솔직히 말해 무섭도록 정희성과 비슷했었다. 서툴고 날것 그대로의 느낌만 제하면 음 처리부터 시작해서 주법, 그리고 해석까지.
음악평론가인 그는 정희성의 연주를 몇 번이고 직접 들어본 적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도현의 바이올린도 직접 들어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다만 비밀이 많아 보이는 소년을 굳이 들쑤시지 않았을 뿐이었다.
몇 마디 더 감탄과 감사를 늘어놓던 헨리는 통화를 끊기 전,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 아마 음반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겁니다. 그는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갔으니까요. 장담하죠.
유려한 말투, 다정하고 세련된 미소, 유쾌한 태도. 그러한 것들이 합쳐져 헨리는 조금 가벼운 인상을 줄 때가 있다.
하지만 밀턴은 그가 음악에 얼마나 진지해지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저런 말을 허투루 하지도, 쉬이 장담하지도 않으리란 것 또한.
밀턴은 조용히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꽉 닫힌 창문은 조용했다. 밀턴은 저 창문을 열어젖혀 소년을 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을 해낸 건지 궁금해 미치겠더라도 말이다.
* * *
예상외로, 밀턴이 그 ‘무슨 일을 해낸 건지’ 알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창문을 닫고 사라진 지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 부슬부슬하던 머리를 평소처럼 완벽하게 정돈한, 단정한 차림의 소년이 집 밖으로 나왔다.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은 연한 민트색의 스웨터는 소년과 찰떡같이 어울렸다. 그 아래로 흰색의 바지를 받쳐 입어서 보는 이의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밖에 계셨네요.”
“음, 휴식 시간이었거든.”
“도리! 이리 와!”
진이 제 옆자리를 팡팡 치자 소년의 눈매가 난감하게 휘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가야 할 곳?”
진이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선이 도현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어깨에 닿았다. 소년의 어깨에 매달린 바이올린 가방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소녀는 소년이 마당에 돌아다닐 때 신던 편안한 신발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음을 발견했다.
“설마 또 스튜디오?”
“응.”
“녹음할 게 남았어?”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아. 어제 녹음한 것도 다시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정말 마지막 날까지 스튜디오에서 보내네. 진의 말에 도현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서운해하는 건 눈치챘는데,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어서 망설이는 눈치였다.
진은 도현이 무언가 말하기 전에 선수 쳤다.
“괜찮아. 내일 간다고 해서 영영 안 보는 것도 아니고. 너 패스파인더 촬영하면 다시 미국 올 거잖아.”
“미안해.”
“그럼 나 따라가게 해주면….”
“그건 안 돼.”
“칫.”
단호한 거절에 진이 혀를 찼다.
하여간, 이럴 땐 칼 같다니까.
순간 조금 더 졸라볼까 하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진은 참아냈다. 그랬다간 저 요령 없는 친구는 절절매면서 마당을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장면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에휴, 내가 봐준다.
푸욱, 한숨을 내쉰 진이 팔짱을 꼈다. 붙잡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밀턴이 끼어들었다.
“어제 녹음한 게 마음에 안 들었니?”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소리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도현은 데자뷔를 느꼈다.
이랬던 적이 또 있었던 거 같은데. 예를 들어서 밴드부실에서 밤을 새웠던 다음 날에….
그다음으로 찾아온 건, 어색한 현실 감각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 진짜인가?
너무 폭풍처럼 몰아쳤던 하루라 오히려 흐릿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덜컥 겁이 났다. 사실은 꿈을 꾼 거였으면 어쩌지.
그 걱정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스테파노스 미너르 : 두 곡 다 녹음은 잘 되었습니다. 오늘 시간이 날 때 스튜디오에 와주시면 좋겠는데, 괜찮겠어요?]
스테파노스가 남긴 문자에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걱정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도현은 멍한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진짜구나. 진짜 해냈어.
입술 사이로 느릿한 숨이 빠져나왔다. 도현은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울렁거림을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스튜디오에 가야겠어.’
반쯤은 몽롱하고 반쯤은 비장한 기분으로 창문을 연 뒤 두 부녀와 마주쳤다. 거기까지가 마당에 나오기까지 있었던 일이었다.
한번 웃는 걸로 생각을 털어낸 도현이 말했다.
“크로이처와 달빛은 다 잘 녹음됐어요. 확인만 하러 가는 거예요. 제가 바이올린을 챙긴 건 그 두 곡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악마의 트릴이요.”
“아.”
“생각보다 하루 더 일찍 끝났으니까 다시 들어 보려고요. 필요하다면 다시 녹음해 보고요.”
밀턴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탄식했다.
과거, 도현이 스튜디오에 갔던 첫날. 스테파노스는 도현에게 녹음을 다시 하고 싶으면 마지막 날에 하라고 권유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그래서 지금 나가려 해요.”
“아니. 잠깐만 기다리렴.”
도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밀턴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데려다주마.”
“안 그래도 괜찮은….”
“거절은 받지 않을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도현이 붙잡을 새도 없이 밀턴은 쏙 빠져나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과 둘이 남은 도현은 난감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똘망똘망하게 뜬 눈과 마주쳤다.
“…옆에 앉아도 돼?”
“응, 앉아.”
조심스레 앉은 도현은 그녀의 이어폰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냐고 물었다. 진은 말없이 한쪽을 도현의 귀에 끼워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년은 곧이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핫.”
귓가에 파고드는 익숙한 선율에 웃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시원하게 웃은 소년은 벤치에 등을 기대어, 소녀와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구름 하나가 둥둥 흘러갔다.
샌디에이고, 2월의 마지막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