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30화 (531/582)

제530화. Debut as a ?? (19)

밀턴과 함께 스튜디오에 도착한 도현은 전날 녹음한 것들을 신중히 검토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다는 통과의 의미였다.

그 사이에 두 녹음본을 들은 밀턴이 경악하는 일이 있었지만, 도현은 사소한 일로 치부했다. 밀턴은 상당히 억울해했다.

그다음으로는 악마의 트릴을 들었다. 집중하여 무표정이 된 낯으로 녹음을 듣던 도현은 헤드폰을 벗었다.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가 이마에 내려앉았다.

“다시 녹음할게요.”

“그렇게 하시죠.”

첫날, 처음 녹음한 게 제일 좋을 거라던 스테파노스는 이번엔 도현의 의견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간 착실히 쌓은 연주자로서 신뢰의 발로였다.

도현은 곧장 바이올린을 들고 부스로 향했다.

악마의 트릴 재녹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연주할 때마다 능숙하게 감각을 되찾은 도현은 세 번째에 완벽한 연주를 해내었다.

그쯤 되었을 때 밀턴은 충격과 부정의 단계를 넘어 수용에 접어들었다. 허허롭게 웃는 얼굴은 거의 해탈에 가까웠다.

그렇게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녹음이 끝나고.

그들은 노트북을 테이블 가운데에 두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 보내주신 계획서는 확인했습니다.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화면 너머,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계약서로 보이는 종이를 넘겼다. 집에서 자주 보던 편안한 모습이 아닌 공적인 자리에서의 이장혁은 도현에겐 낯설었다.

음반을 만드는 건 도현 혼자 완벽한 연주를 해낸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제작, 유통, 홍보, 판매. 그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검토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도현의 몫이 아닌 도현의 부모님 몫이었다.

도현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이장혁과 스테파노스, 그리고 밀턴이 회의하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문제가 있었다.

도현은 미국에 소속사가 존재했고, 그건 아직도 유효했다. 도현이 하는 활동은 소속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지만, 도현은 소속사에 연락하지 않았다.

오스카는 믿는다.

하지만 도현이 믿는 건 오스카 개인이지 소속사 자체는 아니었다. 그 단체를 믿기엔 너무 거대한 기업이었고, 또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도현은 부모님과의 상담 끝에 계약서의 허점을 노렸다. 계약된 사항은 도현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경우, 소속사를 통하는 것.

하지만 이번에 음반을 내는 사람은 도현이 아닌 익명의 바이올리니스트, H였다.

좋을 대로 갖다 붙인 거긴 하지만….

끔뻑, 섬세한 눈매가 움직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도현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가 뭘 어쩌겠는가.

이제 와 음반을 만들지 못하겠다고 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속사 측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지.

이상한 부분에서 수긍이 빠른 도현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무념무상으로 앉아 있었다. 그사이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던 회의는 슬슬 끝을 보였다.

마무리는 계약서를 다시 보내주면 변호사와 검토 후 연락드리겠다는 이장혁의 말이었다.

화상 회의를 통한 만남이었지만, 서로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린 두 사람은 정중한 인사 끝에 회의를 마쳤다.

마침내 노트북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을 때.

화면에 반사된 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도현은 새삼스레 실감했다.

정말 다 끝났구나.

“…….”

무작정 미국에 가겠다 결심한 순간부터 음반 녹음을 마친 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몸이 지면에서 삼 센티 정도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도현.”

도현의 눈이 조용히 움직여 옆으로 향했다.

“식사 자리를 권하고 싶지만….”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면 저번에 왔던 귀여운 숙녀분과 시간을 보내야겠죠. 보내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무척 아쉬운 기색으로 다음번에 이곳에 오면 한번 들려달라고 말했다. 도현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그가 조금 멋쩍게 물었다. 자신이 부담스럽게 했냐고.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누가 생각나서요.”

리암 호프라고.

호감을 담뿍 담아 쳐다보는 거구의 남성을 보니 자연히 도현이 처음으로 사귄, 어른이지만 친구에 가까운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리암은 잘 지내려나.’

한국에 돌아가면 연락해 봐야겠네.

가벼이 생각하던 도현은 스테파노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좋아요. 다음번엔 맛있는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세요.”

도현의 긍정에 스테파노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습니다. 그땐 헨리 씨도 불러야겠군요. 바쁘지만 않으면 기꺼이 참석할 것 같으니까요.”

도현은 스테파노스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앨범 재킷에 대한 일정도 조율한 후 스튜디오를 나왔다. 스테파노스는 도현과 밀턴이 차에 탈 때까지 배웅해 주었다.

차에 타기 전.

도현은 스테파노스를 돌아보았다.

아마 지금 가면 오래도록 보지 못할 얼굴일 것이다. 도현의 본업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배우였으니.

도현은 새벽녘 꿈같았던 한 달간, 그를 믿고 지지해 준 이에게 무척 감사했다. 그런 감사와 아쉬움을 담아서 또렷하게 말했다.

“제 음반을 맡아준 분이 스테파노스라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아직 제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감사 인사는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난 후에 받도록 하죠.”

“하하, 네. 좋아요. 그때 다시 인사드릴게요, 그럼.”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마친 후 도현은 차에 탔다. 스테파노스와 몇 마디 더 나누던 밀턴은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후 운전석에 탑승했다.

달칵, 차 문이 닫혔다. 밀턴이 차 안에 들어오자 특유의 향수 향이 코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그러게요.”

“돌아가면, 짐을 챙길 거니?”

“네, 그래야죠.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하니까요.”

“도와줄까?”

“괜찮….”

덤덤히 대답하던 도현이 갑자기 멈칫했다. 차의 시동을 걸던 밀턴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피곤한 낯이 된 도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아서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어요.”

“씩씩하구나.”

밀턴은 도현을 꽤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도현은 문득 한 달 사이 밀턴과의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그냥, 제 정체를 언제 터트릴지 모르는 위험인물 느낌이었는데….

“고마워요, 밀턴.”

그 누그러진 투를 기민하게 감지한 밀턴이 물었다.

“이제 미스터는 안 붙이는 거니?”

짧게 웃은 도현이 긍정했다.

“네, 안 붙이려고요.”

장난처럼 물었던 말에 긍정이 돌아오자 밀턴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도 곧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로테는 집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늦게 들어간다고 했거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어깨를 으쓱인 밀턴은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도로를 내달렸다. 도현은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로를 달리던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로 들어섰다. 속력을 늦춘 밀턴은 천천히 집으로 들어섰다. 도현은 집의 불이 꺼져 있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진도 나갔나?’

나간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까부터 쌓였던 아쉬움 위에 아쉬움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먼저 자리를 비운 건 자신이라 할 말이 없었다.

도현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나갈 때와 달리 어둑해진 하늘을 머리 위에 둔 소년은 조금 차분해진 낯이었다.

“들어가지.”

“네.”

한동안 못 본다고 생각하니 잔디가 멋대로 자라난 마당조차 아쉬움의 일부가 되었다. 도현은 밀턴에게 그러한 감정을 들킬까 봐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걸었다.

앞장서던 밀턴은 문을 밀어서 연 후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라는 몸짓에 작게 고맙다고 말한 도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집안에 불을 켜려 벽을 더듬을 때였다.

“…불이?”

손끝에 스위치가 눌린 감각이 없는데 불이 켜졌다. 밀턴이 켰나. 의아하게 고개를 든 도현은 곧이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 벌써 와! 더 늦을 줄 알고 천천히 준비했는데!”

“…클라인?”

“브라운은 못 온대. 오늘 승급전 해야 한다나 뭐라나. 나머지 애들은 다 왔어.”

태연하게 말하는 클라인에 도현은 놀람을 숨기지 못하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클라인, 조니, 캐서린, 다비드, 진, 그리고 로테….

마지막으로 시선을 받은 로테는 즐겁게 웃었다.

“네가 곧 떠난다니까 애들이 파티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늦으면 어떡하려고 했어요?”

도현이 황당해하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진이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프리키 차일드 두 번째 밤이 시작되는 거지.”

“…그러니까, 대책 없이 기다리려고 했다고?”

“아니. 정기 모임이라니까?”

“하.”

헛숨이 빠져나왔다.

대책 없이 구는 아이들이 어이없는데, 또 그 대책 없음이 기껍게 다가와서.

“당연히 기다려야죠! 도현은 우리 정식 멤버잖아요.”

“결국엔 정식 멤버야?”

“네, 도현도 그만 받아들여요. 그리고 여기에 도현이 없으면 너무 암울하다고요. 클라인은 바보지, 캐서린은 그냥 고양이고.”

“잠깐, 내가 왜 바보야?”

“나는 왜 고양이인데?”

어이없어하는 둘을 자연스레 무시한 조니가 말했다.

“다비드는 너무 무게를 잡고, 진은 의도하진 않는데 너무 꽁냥거려서 가끔 꼴 보기 싫어요! 브라운은 집에서 나오질 않고요. 여기서 정상은 저랑 도현뿐이라고요!”

“하하!”

황당하단 표정을 짓던 도현은 서서히 무언가를 참는 듯 뺨을 씰룩이더니, 결국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맑고 앳되었다.

“누가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휜 눈매, 고양이처럼 말려 올라간 입꼬리. 누가 봐도 즐거워하는 도현의 낯에 뿌듯해진 조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보도 가끔 쓸 때가 있더라고요.”

“저 자식이 자꾸….”

클라인과 조니가 아웅다웅하기 시작하자, 밴드부 아이들은 자연스레 그들을 무시했다. 짧은 사이 정이 들어버린 풍경에 도현은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그날 저녁, 파티는 열 시까지 이어졌다. 도현이 짐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해산했다.

밀턴의 차를 타고 떠나는 아이들을 지켜볼 때, 누군가 도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짧게 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이 서 있었다.

다비드였다.

“그거는 잘했냐?”

“응.”

“흐음, 그래? 그럼 이제 진을 더 귀찮게 하지 않겠지?”

심술궂게 말하는 소년에 도현은 빙그레 웃었다. 도현은 눈치가 뛰어난 편이었고, 소년이 어색함을 숨기려 부러 툴툴댄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도현이 다정히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은 무슨. 알아서 잘하겠지.”

흥, 코웃음을 친 다비드는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도현은 멀어져 가는 등을, 아이들을 태우고 집을 빠져나가는 차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는 자동차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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