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가족의 의미 (1)
진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도현을 신기하게 보았다. 꽁꽁 싸맨 시커먼 소년 주변을 소녀가 빙빙 돌아대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모였다.
로테가 그런 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진, 가만히 있으렴.”
진은 금방 얌전해졌다.
니콜라스와 도현과 함께 있을 땐 가장 야무져 보였던 진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할 때면 어린 소녀 같아졌다.
진의 집에서 지내면서, 도현은 진이 로테나 밀턴에게 자연스레 어리광 부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도현은 그것을 신기해하면서도 종종 자신과 비교해 보았다.
그러다가 도달하는 것이다.
나는 꽤 귀여운 부분이 없는 아들이라고.
네 사람은 게이트 앞에 섰다.
“혼자 갈 수 있겠니?”
로테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혼자 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비행기는 여러 번 타 봐서 익숙하기도 하고.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한 거지. 우리 아들이 떠나는데.”
로테가 장난스레 한 말에 도현이 짧게 웃었다.
로테는 도현이 집에 머무는 동안 정말 자식처럼 대해주었다. 그 스스럼없는 대우와 따뜻한 온기는 당황스러웠고, 동시에 그들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안온한 안정감이었다.
“잘 가, 도리야. 가서 연락해야 해.”
어젯밤에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도 실컷 도현을 독점했던 진은 미련을 많이 털어냈는지, 질척임 없이 깔끔히 인사했다.
내심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진이 슬퍼했다면 떠나기 어려웠을 테니까. 도현은 친구 한정으로 무척 나약해지는 자신을 잘 알았다.
도현은 진네 가족과 인사를 마친 뒤 게이트를 넘었다. 비행기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잠깐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오기 전과 많은 것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잠시 하늘을 담던 눈이 다시금 정면을 향한다. 뒤에도 사람이 있기에 오래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소년은 언제 멈췄냐는 듯이 걸음을 뗐다.
이젠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꽤 지루했다.
영화 두 편을 보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 소설책을 펼쳤다. 대략 스무 장 정도 읽고 나니 속이 울렁거려서 덮어버리고 말았지만. 도현은 자신이 비행기 멀미가 있다는 걸 새로이 깨달았다.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괜찮…, 음. 이걸로 충분해요.”
식사를 가져다준 승무원의 질문에 정중히 답한 도현은 그녀가 멀어진 후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
그가 너무 영향을 끼쳤다. 그 짧은 사이에 거의 세뇌가 되어버렸지 않나.
조금은 억울하고, 조금은 기가 차고, 조금은 웃긴 심정이 되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혼자 뭐 하고 있나 싶어 눈앞에 놓인 도시락을 열었다.
홀로 비행기에서 배를 채우고 있자니 미묘했다.
꼭 연주회를 위해 이곳저곳 떠나던 형이 떠올라서….
- 잘할 거야. 누구라도 너를 자랑스러워할 만큼.
뚝, 열심히 도시락 위를 오가던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정말 그럴까?
형이 나를 봤으면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형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았으면서 진의 손을 잡고 묻고 싶었다. 참아낸 건 기적적인 인내심 덕분이었다.
“…….”
늘 시끌벅적하게 둘러싸여 있다가 홀로 남으니 고요한 상념이 찾아들었다. 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3월.
곧 개나리가 피는 시기가 온다.
찰나, 소년의 얼굴에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도현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꼭 누군가에게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 …오니, 좌석벨트를 매어….
파르르, 감은 눈이 잠자리의 날개처럼 떨렸다.
곧이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소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소년의 귓가로 안내 방송이 파고들었다.
- 승객 여러분, 편안한 여행이 되셨습니까? 저희 항공기는 현재 강하를 시작하여 목적지, 인천 국제공항에 앞으로 약 30분 후인….
…도착했구나.
테이블을 원래의 위치로 돌린 도현은 뻐근한 목을 풀었다. 몇 번 스트레칭하고 나니 나른하게 뜨였던 눈이 또렷해졌다.
착륙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기내는 부산스러워졌다. 곧이어, 별다른 문제 없이 착륙한 비행기는 정지했다. 여기저기서 안전벨트를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 즐거운 여행 되셨기를 바라며, 다음 여행에서도 기내에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도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탔던 짐을 챙겼다. 승무원의 지시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자, 통로의 창문 너머로 오후의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샌디에이고였으면 지금쯤 새벽에 가까워졌을 텐데.
국경을 넘어왔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도현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쓴 후 걸음을 옮겼다. 샌디에이고에서와 다르게 사람들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한국어가 귀에 들렸다.
입국 절차를 밟은 도현은 캐리어를 질질 끌며 밖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그를 마중 오기로 했던 장소로 거침없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샌디에이고에서 나날은 단순히 연주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뿐은 아니었다. 도현은 진의 가족과 내내 함께 있으며 많은 것을 겪었다.
진은 부모님과 자주 마찰하지만 그게 큰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늘 서로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무슨 일이 있든 마지막엔 애정과 포용으로 감쌌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처음 갈등 비슷한 것을 겪고 가출까지 감행하려 했던 도현과는 달랐다.
그게 충격이었다.
싸우고 틀어져도 별일이 아니라는 게.
“…….”
검은 눈이 결연히 빛났다.
그동안 잘 지냈으며 해야 한다던 일도 무사히 마쳤다. 그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미국에 가겠다는 말을 너무 급하게 꺼내어 두 분을 놀라게 했던 거 같다. 그래도 결국 믿어주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
샌디에이고에 머물던 내내 면접의 문답지처럼 준비했던 말들을 다시금 머리로 복습했다. 부모님을 보자마자 말하자. 그리고 대화를 해보는 거야.
캐리어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도현의 생각과 얽혀들었다. 도현은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아.”
멀리서 두 인형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부모님이었다. 굳이 다른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도현은 조금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빠르게 나아가던 발걸음은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우뚝 멈추었다.
끼긱,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캐리어의 바퀴가 부자연스레 정지했다. 멈춰 선 소년의 곁을 수많은 인파가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서 소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이 공항 한복판에 멈춰 선 소년을 흘깃 쳐다보았지만, 막상 소년은 인지하지 못했다. 검은 눈동자는 오직 두 남녀, 정확히는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바짝 얼어붙은 도현이 가는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시끄러운 말소리, 안내 방송 소리,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과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 그 모든 게 도현을 빗겨 갔다. 새카만 동공이 충격을 머금어 크게 확장된다.
“어, 도현아!”
그 속으로 여성의 환한 얼굴이 비친다. 그 옆에 서 있던 남자 또한 이쪽을 돌아보며 활짝 웃음 지었다.
환하게 손을 흔들던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손이 움칠 떨렸다.
소년은 망부석처럼 굳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만히 두 눈을 크게 뜬 모습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깊이 눌러쓴 모자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거의 뛰듯이 걸어온 여자가 도현의 손을 잡았다.
“…도현아!”
쿠웅, 손이 잡힌 순간 심장이 아래로 추락했다.
도현은 처음 겪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소란스럽고 울렁거리는 속을 못 참고 헛구역질했다.
“!”
도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입을 가렸다. 욱. 아무것도 나오는 것 없는 헛구역질이 몇 번 이어졌다.
“도현아! 벼, 병원! 여보, 빨리 병원에!”
경악하여 얼굴이 파래진 두 사람이 도현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려던 때, 흰 손이 허공을 갈랐다. 도현의 손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던 도현은 서서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얼핏 창백한 눈가가 보였다.
“…아픈 거 아니에요.”
“방금 헛구역질을….”
“멀미해서 그래요. 제가 비행기 멀미가 있더라고요. 모르고 비행기 안에서 소설책을 읽었더니 내내 속이 안 좋았어요. 방금은 좀 울렁거렸을 뿐이에요.”
“…정말이니?”
“네.”
도현은 여 보란 듯, 멀쩡하지 않냐는 것처럼 잠깐 마스크를 내렸다가 올렸다. 도현의 말대로 그는 멀쩡해 보였다.
확인까지 시켜 주었음에도 걱정을 덜지 못한 두 사람은 도현을 부축해 차에 앉혀두고, 빠르게 약국에 달려가 약을 사 왔다. 도현은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 한참을 진정해야 했다.
“멀미가 그렇게 심했어?”
“그런가 봐요.”
“혹시 차에서도 멀미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닐 거예요. 그동안 차멀미는 한 적 없었어요.”
“그래도…. 앞으로 차에서 대본 같은 거 보는 거 조심하자. 그리고 주말에 병원 한 번만 가보자.”
“저 진짜 멀쩡해요.”
“그냥 정기 검진을 할 때가 되어서 그래. 벤자민 씨도 정기 검진은 꾸준히 하라고 하셨잖아.”
달래듯, 부드러이 나온 말에 도현은 결국 수긍했다.
“……알았어요.”
두 사람은 도현의 얼굴에 혈색이 완전히 돌아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인천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도현은 뒷좌석에 앉아 운전하는 이장혁과 조수석에 앉은 서혜나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응? 왜? 멀미해?”
“아니, 아니요.”
도현이 부정하자 서혜나가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꼼꼼히 상태를 확인한 그녀가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했다.
“무슨 일이야? 배고파?”
“밥은 비행기에서 먹었어요. 그냥….”
도현이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제가 묻고 싶은 건….”
말이 길어지자 운전하고 있던 이장혁도 백미러로 도현을 흘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도현은 입 안의 살을 한 번 깨물었다.
잠시 후 나온 말은 평범한 내용이었다.
“…언제 도착하는지 궁금해서요.”
“아?”
“멀미하는 건 아닌데, 피곤해서….”
“아아. 피곤할 만하지!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잖아. 전날까지도 스튜디오에 있었고. 이런, 정말 피곤하겠네. 잠시만 있어 봐.”
서혜나는 몸을 돌려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푹신한 담요를 꺼내서 도현에게 주었다.
“그거 덮고 눈 좀 붙여. 집에 도착하려면 좀 걸리니까. 시차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지?”
“…감사해요.”
“이런 건 안 감사해도 돼. 얼른 자, 도현아. 엄마 더 말 안 걸게.”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도현은 눈을 감았다. 이장혁이 노랫소리를 줄여서 제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혹여나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봐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도현은 의식적으로 고른 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깜깜했다.
눈꺼풀이 시야를 덮고 있으니 깜깜해야 맞았다.
하지만 도현에게는 보였다.
조수석 쪽.
보랏빛으로 흐르는 영혼의 아래쪽에, 만개한 봄이 되면 찬란히 피어날 벚꽃처럼 미약하게 일렁이는 빛의 파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