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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532화 (533/582)

제532화. 가족의 의미 (2)

투욱, 푸른 하늘에서 불시에 내린 물줄기처럼 언어가 쏟아졌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미안해, 내 아들. 방금까지 건조한 하늘 아래 서 있던 소년은 쏟아지는 낙수에 머릿속이 멍멍해졌다.

아득한 건 도현인데 여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나약한 얼굴이었다. 늘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있어 쳐다보는 것도 힘들었던 존재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나란히 하는 건.

문득 깨달았다.

날카로운 것으로 베거나 무너트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가벼운 손짓 하나에도 얼기설기 쌓은 모래성처럼 부서질 것이다.

본능처럼 자신이 처음으로 강자의 입장에 섰단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휘두르기엔 소년은 너무나 지쳐 있었고, 기대감이란 건 너덜너덜하게 낡은 감정이었다.

괜찮아요. 소년의 입에서 덤덤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감정의 고저 없이 나온 말은 약간은 버석했다. 폭우에 휩쓸린 여성과 달리, 모든 게 메말라버린 호수의 밑바닥처럼 허전하고 건조했다.

아마,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현이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조금의 분노도 없이 받아들였는지. 그저 그들이 데리러 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이라는 위치를 인정할 수 있었는지.

생각건대, 그게 그들의 차이점이었다.

높은 댐이 있다. 너머엔 가득 찬 물이 흐르지 못해 넘쳐나고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오랫동안 메마른 호수가 갈라져 있다.

그러니 좁혀도 좁힐 수 없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소년이 되물었다.

제가 원망해야 하나요?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얼굴.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음에도 마음에는 담지 않는다. 흘려보낸다. 또다시 마른 땅 위를 밟고 퍼석한 숨을 내쉰다.

다시 생각건대, 그게 용서나 포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체념이었다.

* * *

도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느릿느릿 침대에서 내려온 도현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밤에 물든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한밤중이었다.

시차 적응이 덜 됐나.

멍한 정신도, 화한 두통도.

모두 시차 적응이 덜 된 탓인 모양이었다.

언뜻 꿈의 잔상이 흐릿한 도시 연기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그것을 붙잡아 보려 했지만, 그것은 명확히 판단하기도 전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미적지근한 감상뿐이었다.

꿈을 꾸었던 거 같은데.

지나간 잔상에 대한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현은 의자를 끌고 와 멍하니 창문을 보고 앉았다. 멀리서 보이는 빌딩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내일 학교 가서 졸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다시 침대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봤자 잠들지 못할 것 같단 직감이 일었다.

밤에도 여전히 도로를 내달리는 차들. 그 번쩍번쩍한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자연히 다른 것이 떠올랐다.

도로 위 자동차의 라이트보다 훨씬 미약하고 옅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내던….

“…….”

무표정하던 얼굴이 흐트러졌다.

단정한 눈썹을 조금 모은 채 도현은 입 안으로 단어를 굴렸다. 낯설면서 익숙한 단어가 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동생.

문득, 소년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자기가 뱉어 놓고선 지레 놀라 뒤로 넘어진 꼴이었다. 바보 같다는 걸 알지만, 도현은 자신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동생이라고?”

기어이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제가 낸 소리가 귀에 스며들지 못하고 공중을 허무히 맴돌았다. 이토록 동요하는 자신이 의아하면서도 퍼져나가는 파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검은 눈이 멍하니 정면을 향했다.

투명한 유리창 위로 소년의 형태가 어렴풋이 비쳤다. 도현은 넋이 나간 소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한테 동생이 생긴다고?

나한테?

* * *

결국 다시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도현을 본 서혜나와 이장혁은 기겁했다. 하룻밤 사이 안색이 퀭해졌으니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내, 서혜나가 단호히 말했다.

“오늘은 학교 쉬자.”

“하지만 첫날인데….”

“안 돼.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러더니 도현이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원래도 쉬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시차 적응할 시간도 없이 학교에 가는 건 너무 힘들잖아.”

두 사람은 도현이 하고 싶다는 것에 대체로 관용적인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굴었다.

건강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도현은 탐탁지 않았으나 싫다고 떼쓰진 않았다. 오래 병원에 있다 퇴원한 자신의 상황이 그다지 평범치는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잠을 잘못 잤니?”

“네?”

안색으로 한참 얘기했으면서 또 무슨 소린가 해서 보니, 이장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까부터 고개를 자꾸 왼쪽으로 돌리길래. 담 걸렸어?”

“…….”

차마, 오른편에 엄마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도현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그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

“어디 아픈 데 있어?”

“…아니요.”

도현이 담에 걸렸단 소리에 그를 의자에 앉힌 서혜나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목이며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은 전문가처럼 능숙했지만, 도현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조용하네. 피곤해서 그런가?”

“그, 런가 봐요.”

“역시 오늘은 푹 쉬어야겠네.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자. 학교에는 엄마가 연락해둘게.”

“그, 두 분은요?”

“우리? 우리도 오늘 휴가 냈어. 오랜만에 도현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거기서 한식 많이 못 먹었지?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네. 그리고 이제 목 괜찮아졌어요.”

“더 안 주물러줘도 돼?”

“네.”

애초에 담에 걸린 적도 없었다.

“다행이다.”

옅게 웃은 서혜나가 도현의 어깨를 두어 번 쓸어주었다. 다정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 손길이었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에, 도현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응? 왜?”

아직 이십 대로 보일 정도로 희고 깨끗한 얼굴. 세련된 인상. 누군가의 어머니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는 여성은 두 눈 가득히 부드러운 애정을 담아 도현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게 당연해졌더라.

의문은 계속해서 차올랐다.

내게 동생이 생긴 게 맞냐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왜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있냐고. 언제 말해줄 생각이냐고. 그런데도 왜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냐고….

차오르는 질문이 너무 많아서 입 안에서 저들끼리 엉켰다. 따로 존재했을 땐 의문이었던 것이, 모이니 점점 속을 시끄럽게 만들어댔다.

말해주지 않는 게, 혹시 나를….

휙휙!

“…고개는 갑자기 왜? 담이 덜 풀렸어?”

“아니에요.”

대충 얼버무린 도현은 괜히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기한 우연이었다.

누가 문자를…. 문자를 확인한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설아 : 너랑 나 또 같은 반이야. 희운이도!]

정희운이랑 같은 반이라고?

[한설아 : 근데 오늘 안 와? 애들이 너 언제 오는지 궁금해해.]

[한설아 : 특히 서일준이 네가 카톡 안 본다고 징징대서 귀찮아. 어떻게 좀 해 봐.]

도현은 형의 버릇을 그대로 닮아 카톡보다는 문자를 사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카톡을 놓치는 일이 가끔, 아니,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문자를 보내곤 했다. 지금의 한설아처럼 말이다.

그 말대로 카톡 창에 들어가 보니 도착한 카톡 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걸 언제 다 확인해. 도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도현은 적당히, 반이 갈렸다며 우는소리를 내는 서일준과 몇몇 아이들에게 답장해준 후 한설아에게 오늘은 못 간다고 문자를 보내두었다.

보내는 김에 고심하다가 정희운에게도 문자 한 개를 남겼다.

[나 내일 학교 가. 내일 보겠네.]

정희운도 도현 못지않게 핸드폰을 안 보는 사람이라, 아마 확인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제가 보낸 문자를 보던 도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희운을 내 동생처럼 여기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동생이 생겨버릴 줄은….

처음 정희운과 마주쳤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전혀 처음 겪는 종류의 것이었고, 솔직히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분간도 잘 안됐다.

이게 긍정적인 감정인지 부정적인 감정인지조차도.

“친구들이야?”

“아, 네.”

“아쉽겠네. 오늘 친구들 못 봐서.”

“내일 볼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 일단 아침부터 먹자.”

속이 수런거리든 말든 시간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접어들 때까지 도현은 다섯 번 정도 물어볼 시도를 했고, 정확히 다섯 번 실패했다.

“…….”

난 답이 없는 건가.

자신의 답 없음에 새삼스럽게 놀라워하며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이 천장에 선을 그렸다.

천장을 무의미하게 응시하던 도현은 문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살짝 움칠했다.

- 자니?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도현의 귀에는 잘 들렸다. 도현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실내화를 대충 신고 터벅터벅 걸어가 문고리를 돌리자, 도현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남성이 보였다.

“아빠?”

“안 자고 있었어?”

“네, 잠이 안 와서요. 지금 자면 밤에 못 잘 것도 같고.”

“그래? 그럼 잠깐 시간 될까?”

검은 눈이 깜빡인다.

도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혁을 따라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 앉아 있는 서혜나가 보였다. 그쯤에서 도현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일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당장 등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차 마실 거지?”

그 물음이 꼭 도현을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는 밧줄처럼 느껴졌다.

도현은 꽁꽁 묶인 기분에 휩싸여 맥없이 답했다.

“네. 주세요.”

쪼르륵. 눈앞에 잘 우려진 찻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수색은 맑았고 향기는 편안했지만, 그 모든 게 도현을 압박하는 덫 같았다.

도현은 기계적으로 차를 한 입 마셨다.

“도현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저한테요.”

“응. 그게….”

서혜나와 이장혁이 시선을 교환했다. 도현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서혜나가 긴장된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게 아주 느리게 보였다.

“혹시, 동생이 생기면 어떨 거 같니?”

기다렸던. 그러나 이렇게 느닷없이 훌쩍 다가오길 바라진 않았던 질문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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