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가족의 의미 (5)
초봄, 새 학년, 새 학기, 새 반.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처럼 모든 게 새롭고 설레는 시기. 저마다 생기 도는 낯을 한 소년 소녀들은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소년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 자연광을 받아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적갈색 눈동자. 그리고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
불과 일 년 전. 잔뜩 기가 죽어 소심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소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환하고 빛나는 모습이었다. 친구가 농담할 때마다 구김살 없이 웃는 낯은 천진했고, 사랑스러웠다.
“내 짝은 오늘 온다고?”
“으응….”
손등으로 웃느라 찔끔 맺힌 눈물을 닦아낸 정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실없이 농담이나 던지던 소년의 낯빛에 긴장이 서렸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야, 너도 연예인이니까 그렇게 태연한 거지. 나처럼 일반인이었어봐!”
소년은 자리 배치가 끝난 뒤로 지금까지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내가 할리우드 스타의 짝꿍이라니? 유찬이 양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눌렀다. 어디 웹소설에 나올 법한 일이잖아!
뭉크의 절규처럼 찌부러진 볼에 희운이 당황스레 부정했다.
“아니, 나도 그렇게 태연하지는 않았었는데….”
“걔가 나같이 평범한 애랑 친해지고 싶어 하겠어? 눈에 들어나 오겠냐고!”
“그, 글쎄. 상관없지 않을까.”
소개팅하는 것도 아니고….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뒤로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들어 봐. 걔 주변에 화려한 사람만 가득하겠지?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에드워드에, 루카에, 헤레이즈에, 새디…. 와, 미쳤네.”
열변을 토하는 친구에 어색하게 웃던 희운은 점점 난감히 눈동자를 굴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까부터 열띠게 말하던 소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잖아! 솔직히 내가 아메바로 보인대도 납득 쌉가능 아니냐.”
“별로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그거야 네가 몰라서 하는 말…?”
홱! 바람 소리가 날 것같이 고개가 돌아갔다. 휘둥그레진 눈이 뒤편을 향했다.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에 담긴 건, 반듯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소년이었다.
도현은 태연자약하게 가방을 책상 옆, 작게 튀어나온 고리에 걸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몸을 틀고, 등받이에 왼팔을 올릴 때까지 이유찬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 어어….”
“체육 시간에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안녕.”
산뜻하게 웃는 얼굴 위로 햇살이 가로질렀다. 종종 여자애들이 도현을 보고 ‘개안한다’며 떠들어 댔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눈에 페퍼민트 향 안약을 넣은 기분이었다.
그런 안약을 뿌리면 상쾌하기 이전에 고통을 걱정해야 한다는 상식적을 저 멀리 던져버린 이유찬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 알아?”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을걸!
너무 찐따같이 대답한 거 같아 유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현은 유찬의 상기된 뺨을 못 본 척 굴었다.
“응, 그럼. 축구 같은 팀이었잖아. 맞지?”
“어, 맞는데….”
“네가 골 넣어서 우리 팀 이겼었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저거, 감동한 표정이다. 도현과 화해 비스무리한 것을 한 후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은 희운은 금방 유찬의 감정 상태를 알아챘다.
희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얜 사실 조용하게 지내기 싫은 걸까?’
도현이 말하는 걸 보면 딱히 주목받는 걸 즐기는 것 같지 않은데, 정작 행동은 그 반대였다. 숨 쉬듯이 사람의 호감을 샀다.
한창 호기심 왕성하고 남들에게 관심 많을 시기, 열다섯. 그 나이대 청소년들한테 잘생기고 친절한데 유명하기까지 한 배우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절로 시선을 빼앗기고 그 주변을 맴돌 수밖에.
아는지 모르는지. 등교하는 순간 모든 시선을 독식한 도현이 희운을 쳐다보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아직 희운은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도현이 이전처럼 차갑게 구는 게 좋은지, 아니면 지금처럼 과하게 뜨뜻한 시선을 보내는 게 좋은지.
그러다 문득 억울해졌다. 아니, 양쪽 다 너무 극단적이잖아.
…그래도.
“응, 잘 지냈어?”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쟤네 둘이 같은 소속사지?”
어깨와 고개는 한설아를 향하면서 시선은 묘하게 빗겨가 있다. 옆을 자꾸 힐끔거리는 모습이 해변을 거니는 게를 떠올리게끔 했다.
정확한 호칭 없이 ‘쟤네’라고 했음에도 여기서 그게 누군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냥 대놓고 구경하는 게 어때?”
“그건 부끄럽잖아!”
나한텐 안 부끄럽고?
“그리고 눈 마주치면 어떡해!”
“도현이는 아무런 말 안 할걸.”
오히려 웃어주며 팬 서비스까지 해줄 애다. 한설아는 도현의 프로적인 면모에 놀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 걘 약간 그럴 거 같긴 해! 부끄러워하는 것도 전혀 없을 거 같아! 어때? 진짜 그래?”
“음….”
잠깐 고민하던 한설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인간미 없진 않아. 놀랄 땐 놀라고 부끄러워할 땐 부끄러워해.”
“진짜?”
“응.”
창의성 함양을 이유로 전공별로 반을 나누지 않고, 모두 통합하여 배정하다 보니 작년과 반 구성원이 많이 달라졌다. 자연히 작년, 학기 초의 분위기가 조금씩 떠올랐다.
‘그때도 처음엔 이랬는데.’
아이들은 도현을 열넷의 동갑내기 소년이 아닌 어디 숲에 사는 요정처럼 취급했다. 그만큼 평범하게 보지 않았단 소리였다. 같이 지내면서 달라졌지만….
‘이번에도 한동안 그런 분위기이려나.’
한설아는 시선을 돌려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았다. 아닌 척 집중된 시선 속에서 홀로 태연한 도현과 신경 쓰여 죽겠는데 그런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하는 희운이 눈에 들어왔다.
턱을 괴고 그 풍경을 감상하던 한설아가 생각했다.
‘잘 지내네.’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작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모두 멀게 느껴졌다. 한설아가 묘한 평온을 느끼며 눈을 깜빡일 때였다.
“어?”
아까부터 옆을 힐끔거리던 아이가 탄식을 내뱉었다. 처음에 한설아는 거기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싱거운 말일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설아의 머릿속에는 그보단 다른 잡념이 끼어 있었다. 오늘 학급 반장과 부반장을 뽑을까. 혹시 희운이가 거기에 지원하려나? 그럼 나도 같이….
“서, 설아야. 이거 봐!”
“뭔데 그래?”
언제 사심 가득한 생각을 했냐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한 한설아가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드렁했던 얼굴은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을 때.
“어?”
저도 모르게 친구와 비슷한 탄식을 내었다.
“자, 잠깐만.”
한설아의 손가락이 영상을 첫 부분으로 돌렸다. 다시 0:00으 돌아간 영상이 천천히 재생된다. 전구가 깜박이는 창고 천장이 제일 먼저 보이고, 점점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마이크를 잡고 고개를 까딱이는 소녀. 그리고 그 양옆에 선 소년 소녀…. 거기까지만 해도 그냥 그렇구나, 했을 텐데.
“…이도현?”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무척 익숙했다. 마치, 지금 저기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과 도플갱어처럼 똑 닮았….
그냥 본인이잖아?
“그치! 쟤 맞지!?”
친구가 호들갑 떨며 어깨를 팍팍 쳐댔다. 잠깐, 잠깐만.
“이거 어디서 찾은 영상이야?”
“아까 애들이 이도현 아니냐고 그러면서 보내줬어. 이도현 맞는 거 같지?”
“어….”
눈을 씻고 봐도 이도현이었다.
따로 작품 들어간다는 소리는 못 들었던 거 같은데. 애초에 그랬으면 진즉 여기저기 기사가 나서 모를 수도 없었을 거다.
그럼, 진짜 밴드인가?
이도현은 바이올린을 켜고?
…근데 걔가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지?
“우리 가서 물어보자!”
“아.”
상기된 낯의 소녀가 한설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말을 걸 용기가 없던 소녀에게 도현과 친분이 있는 존재와 적당한 용건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소녀가 눈을 간절히 빛냈다.
“응? 네가 물어보면 안 돼? 설아야아.”
“아, 알았어. 물어볼게.”
“정말?”
곧장 화색하며 웃는다. 투명한 감정 변화에 희운과 친해지고 싶어 기웃거렸던 자신이 생각난 한설아는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서 물어보자.”
“좋… 잠깐! 나 앞머리 확인 좀.”
손거울로 만족할 만큼 확인을 마친 소녀가 한설아의 뒤에 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설아가 앞장선 대열로 관심의 진원지를 향해 걸어갔다.
“설아야.”
가까이 다가가니 도현이 금방 설아를 알은척했다.
“방학 동안 잘 지냈어?”
이쪽을 향한 시선에 뒤에 선 소녀가 설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설아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어깨에 힘을 주며 물었다.
“난 잘 지냈어. 그런데, 음.”
“응? 왜?”
“이거, 너 맞아?”
스윽, 그녀가 내민 손 위로 핸드폰 화면이 빛났다. 의아하게 쳐다보던 도현은 고개를 조금 더 앞으로 기울여 화면을 확인하더니 짧게 탄식했다.
진이 올린다고 말해줬는데 깜빡했네. 대수롭지 않은 중얼거림에 희운이 호기심을 보였다.
“나도 봐도 돼?”
“응, 근데 이어폰이 필요할 텐데.”
“괜찮아!”
“그래, 그럼.”
가벼이 수긍한 도현이 한설아에게 양해를 구한 후 희운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그리고 희운에게 무어라 더 말하려던 때였다.
“저, 뮤직비디오 맞지? 이제 노래까지 하는 거야?”
내내 한설아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녀가 수줍게 물었다. 긴장한 얼굴은 새빨개진 상태였다. 깜빡, 깜빡. 새카만 깃털 같은 속눈썹을 두어 번 팔랑인 소년이 입을 열었다.
“뮤직비디오는 맞고 노래는 아니야.”
검은 눈이 스르륵 옆으로 향한다. 이어폰 없이 재생한 영상에서 희미하게 일렉 기타와 바이올린 소리가 퍼져 나왔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화면을 응시하던 희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바이올린을 켰거든.”
보컬이 아니라.
금방 뒷말이 따라붙었지만, 희운의 귀에는 바이올린이라는 단어만이 커다랗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