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가족의 의미 (6)
물어보고 싶지만, 뭘 물어보고 싶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희운은 미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시간을 보냈다.
도현의 주변은 조용해질 틈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찾아와 수다를 떨었으며, 점심시간엔 올해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질문 폭격을 던졌다.
실은, 시끄러운 건 비단 도현의 주변뿐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도 해당 뮤직비디오 영상이 인기를 얻어 가며 ‘이도현 발레’, ‘이도현급발진’, ‘배우 이도현 바이올린 실력’ 같은 쇼츠 영상이 널리 퍼지는 중이었다.
아직은 생각보다 파장이 크지 않으나, 지금까지 있었던 도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여기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한 믿음이었다.
-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무작정 떠나고 있어
종일, 거의 열 손가락을 가득 채울 만큼 반복해서 들었던 가사가 다시금 귀에 꽂혔다.
- 절대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싸아아.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목소리는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적당한 습기와 모래 알갱이를 머금고 해변에 선 사람들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바닷바람처럼.
어느새 희운은 가본 적 없는 샌디에이고 해변에 서 있었다. 발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가 흩어졌다. 몇 번 꼼지락거리다 걸음을 옮기자, 지나가는 자리마다 옅은 자욱이 남는다.
해변 끝에는 소년이 서 있다.
희운은 만나본 적 없는, 어린 나이의 소년에게 희운은 마음속으로 물었다. 너는 내가 모르는 바다 근처에서 자랐는데, 왜 나는 네게서 익숙한 사람을 겹쳐 보게 될까?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밴드의 노래는 볼륨이 커졌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그리고 바이올린 소리가 한데 엮여 하나의 악기처럼 연주했다. 그 위로 소녀의 목소리가 얹혔다.
- 나도 이게 미친 걸 알아 하지만 이건 진짜 내 이야기야
지지직, 배터리가 나간 카메라처럼 검게 깜빡이던 화면이 이내 완전히 까매졌다. 영상이 끝나며 희운의 귓속에 빵빵한 사운드의 노래가 아닌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쿵, 쿵. 희운은 뛰는 심장을 느끼며 이어폰을 뺐다. 도현은 그가 노래를 재생하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배운 거야?”
“조금 오래됐어. 영화를 찍기 위해 배우기 시작해서. 아, 물론 그때 배운 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법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립싱크하는 법이었지만.”
그리고 우연처럼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곧 말해줄게.”
“응? 뭐를?”
갑작스러운 말에 아이가 어리둥절했다. 도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희운은 그들처럼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말해준다고?”
도현은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제게 한 말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도현은 희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테니 더더욱 말이 안 됐다.
그런데 왜 꼭 나한테 한 말 같지….
희운이 혼란에 젖은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화면 위, 소년의 얼굴이 수면에 떠오른 구름처럼 이지러졌다.
* * *
툭, 가방이 의자에 떨어졌다. 그대로 욕실로 직행한 소년이 다시 나왔을 땐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는 상태였다. 수건을 머리에 얹고 몇 번 털던 도현은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하자 머리 말리던 것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도현입니다.”
- 도현아.
“매니저 형.”
전화의 주인은 경찬호였다.
“형, 오랜만에 통화하네요. 잘 지내셨어요?”
- 어, 난 잘 지냈는데. 그런데 너 이거, 뭐야?
“뭐 말이에요?”
- 밴드 영상!
“아, 그거요?”
도현은 오른쪽 어깨를 위로 추어올려 핸드폰이 떨어지지 않게 고정한 후,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었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옷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랑 뮤직비디오 영상 찍어서 올리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그거예요.”
- 아니, 물론 듣긴 했지. 했는데….
“혹시 뭔가 문제될 만한 거라도 있어요? 논란거리라든가….”
- 아,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다행이네요. 그럼요?”
물기가 얼추 빠진 것 같아 수건을 한쪽에 내려둔 후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살짝 기울어졌던 고개가 반듯해졌다.
- 내가 생각했던 건 친구들끼리 노는 거였지, 이런 고퀄리티가 아니었거든….
약간은 허탈감이 배어난 목소리였다.
- 그리고 도현이 너,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켤 줄 안 거야?
“오늘 그 질문만 열다섯 번째네요.”
꽤 오래됐다고 설명해주자, 경찬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 너… 하. 그래. 그럼 왜 회사에는 말 안 했어?
“별로 자랑할 만한 실력이 아니어서요. 죄송해요.”
더 추궁해야 하는데, 대뜸 사과해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친구끼리 밴드 영상 찍어서 올리겠다더니, 대뜸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발레를 선보이기까지. 하려면 할 말은 많은데….
결국 한숨을 삼킨 그가 말했다.
- 그거 말고 더 말 안 한 건 없지?
“…….”
- …도현아?
“아, 네. 잠깐 뭘 좀 떨어트려서요.”
- 뭔데? 안 다쳤어?
“수건이었어요. 방금 씻고 나왔거든요. 바닥이 조금 축축해진 거 말곤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 다행이네. 수건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거 떨어트리다 다치면 큰일이니 조심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럼 영상엔 큰 문제 없는 거죠?”
- 문제야… 없긴 하지. 근데 그거 진짜 친구들끼리 만든 거 맞지? 중간에 에이전시 같은 거 안 끼고?
으응? 눈을 동그랗게 뜨던 도현이 곧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런 의심을 할 정도예요? 아니에요. 작곡, 작사, 연주, 촬영, 편집 모두 밴드부에서 했어요.”
진에게 말해주면 좋아하겠네요. 덧붙이는 말에 경찬호는 조금 머쓱해졌다.
- 뭐든 확실해야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나 다음 주에 소속사에 한 번 들를 수 있어?
“괜찮긴 한데, 왜요?”
- 너 바이올린도 얘기해야 하고 올해 활동도 생각해야지.
“아….”
그냥 넘어가는 거 아니었구나.
하긴, 그 꼼꼼한 매니저 형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는 없지. 도현은 아쉬움을 삼키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십 분간의 통화를 마무리한 도현은 떨어진 적 없이 그 자리에 고이 놓인 수건을 들고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선 방에 돌아와 종이 몇 장과 색연필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왔다.
커다란 테이블에 종이를 펼쳐놓은 소년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 턱을 괴었다. 턱을 괸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검은 눈으로 종이를 노려보았다.
많이 생각했다.
H의 첫 음반의 재킷엔 무슨 그림이 들어가야 할지.
후우, 짧게 숨을 내쉰 소년이 테이블 위에 올렸던 팔꿈치를 내렸다. 그리고 색연필을 꺼내어 거침없이 종이 위를 내리그었다.
슥, 스윽. 조용한 집 안. 소년이 종이 위에 색을 새겨 넣는 소리만이 한동안 고요히 울렸다.
* * *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들어왔다. 서혜나는 몸을 기울여 구두를 벗은 후 한쪽에 잘 정리해 두었다.
‘남편은 늦는댔고.’
도현이는 방에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안에 들어서니, 거실에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잠이 든 것처럼 테이블 위로 엎어져 있는 등에 서혜나의 눈이 커졌다.
살금살금. 발소리가 날세라, 조심히 걷는 모습은 누가 보았더라면 비웃었을 광경이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마침내 도현을 깨우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기에 성공한 서혜나가 도현의 맞은편에 소리 없이 앉았다.
새액, 색. 가까이 오니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서혜나는 한쪽 팔을 베고 잠든 도현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감긴 두 눈, 평온한 입매, 규칙적으로 호흡할 때마다 움직이는 어깨.
‘많이 피곤했나.’
하루 쉬게 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이윽고 소년을 담던 눈동자는 아래로 미끄러졌다. 팔 옆, 조금 비죽 튀어나온 종이에 시선이 닿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게 뭐지.
무언가, 풀이나 나무 종류인 거 같긴 한데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두 개의 가지는 마치 버드나무처럼 둥글게 휘어 끝이 아래를 향해 있었는데, 조금은 앙상해 보이는 가지 사이사이 노란색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맨 끝,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것은 막 개화하는 것처럼 봉오리를 살짝 벌리고….
“개나리예요.”
“!”
그림에 집중하느라 도현이 잠에서 깬 걸 모르고 있었던 서혜나는 깜짝 놀라 흠칫했다. 몸을 뒤로 물리니,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도현이 보였다.
“덜 핀 개나리요. 제 음반 재킷에 실을 거예요.”
“…왜 덜 핀 거야?”
“개나리가 피면 떠날 존재가 있어서요.”
보통 봄이 찾아오는 시기엔 돌아오지 않던가? 그게 새든, 꽃이든, 봄이든, 무엇이든. 그 반대를 말하는 도현에 서혜나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그리고 만개한 꽃을 그리기엔 성숙하지 않거든요. 저도, 걔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도현은 친절히 설명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색연필을 하나, 둘씩 정리하던 도현이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몽도 꽃이라고 했죠?”
“응. 복숭아꽃.”
무언가 뺨을 간지럽혀서 눈을 떠보니 복숭아 꽃잎이었다.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웬 꽃잎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 순간. 그녀는 생전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했다.
그건 바다였고, 밭이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에 꽃이 만개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무언가 종아리를 툭 건드렸다. 물살을 타고 내려온 꽃 한 송이였다.
왠지 애틋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것을 소중히 감싸 안으니 꽃이 만개하며 탐스러운 과실로 변했다. 그것을 베어 무니 잠에서 깨어났다.
“저도.”
약간 애틋해졌던 두 눈이 소년을 다시금 담아냈다.
“저도 있었어요, 태몽?”
“…아.”
그녀의 낯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그건 대답으로서 충분했다.
“원래 다 꾸는 건 아니래.”
변명처럼 나온 말에 도현이 말했다. 예상한 일이었어요. 여상하게 나오는 대답에 서혜나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마치 그녀가 꿈을 꾸지 않은 게 아이의 탄생을 축복해주지 못한 거 같았다.
“조금 궁금하긴 해요.”
달칵. 가지런히 정리된 색연필 뚜껑을 닫았다. 뭐가? 조심스레 묻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태몽 말이에요. 그게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진 걸까요? 부모님조차 반길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나는 게.”
별것 아니라는 듯 쏟아낸 말에 서혜나는 입술을 닫았다. 넘치는 물 위에 덮어둔 그릇이 결국 바닥에 떨어진다. 그 위로 넘실거리는 물이 흘러내렸다.
- 왜 자꾸 죄지은 사람처럼 굴어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나는 다 아는데. 나는 정말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혼자만 알고 있는 건데.
표백된 무표정 위로 점점 차오르던 감정들. 일그러진 낯빛. 그리고 답답함을 토해내던 숨. 까맣게 물든 눈은 분함을 담고 그들을 노려보고, 흰 뺨 위로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좀, 그냥 두면 안 돼요?
큰 소리 하나 없었어도 그건 분명, 아이가 처음으로 내지른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