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가족의 의미 (10)
탁, 단정히 신은 운동화가 도보 위를 디뎠다. 그 위로 긴 다리와 정석대로 차려입은 교복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거리를 걷던 소년이 턱을 치켜올렸다. 하늘이 검다.
너무 일찍 나왔나.
최근에 읽던 소설책을 오늘 다 읽어버려서 할 게 없어졌다. 도현은 새로운 책을 펼치는 대신 가방을 들고 등굣길에 나섰다. 지이잉,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도현이 귀에 꽂은 이어폰을 한 번 눌렀다.
-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반가워하던 도현의 표정이 대번에 억울해졌다.
“나 때문 아니야.”
- 아니긴 뭐가!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기가 찬 숨소리가 들렸다. 으음, 곤란한 소리를 내던 도현이 말했다.
“진정해, 니키. 너도 들었으니까 알잖아. 노래가 좋은걸.”
- 그건….
“정말 나 때문이었으면 금방 식었을 거야.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건 좋은 노래가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보는 게 맞지.”
물론, 새디 로스라는 변수의 존재감이 컸겠지만, 그 모든 게 노래의 퀄리티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애초에 새디가 영상을 찍은 것도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니.
하아,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아, 그래. 노래 잘 나온 건 알겠어. 근데 너 아니면 애초에 이렇게 될 일도 없었겠지. 있었더라도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었을 테고. 아니야?
할 말이 없었다.
“맞아, 그랬겠지.”
인정하자마자 탄식이 들렸다.
- 진짜 돌겠네.
도현은 문득, 그의 반응에서 의문을 느꼈다.
“니키.”
- 으어어, 어….
“왜 그렇게 신경 써?”
뭐? 곧장 어이없다는 반문이 날아든다.
- 친구 일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도현이 재차 물었다.
“왜 이렇게 걱정하는 거야?”
뚝, 내내 들리던 좀비 같은 소리가 끊겼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도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엄, 내가?
“응, 네가.”
- 내가 그랬던가?
“니키.”
니콜라스에겐 미안한 발언이지만, 그는 묘하게 누나가 있는 막내 티가 날 때가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꼼짝 못 한다는 게 그랬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던 니콜라스가 결국 말을 토해냈다.
- 인기 많은 게 싫은 건 아니야. 싫은 건 아닌데…. 오히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 좀 갑작스럽잖아.
도현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게 왜?
- 우린, 아니, 걔넨 어리고… 근데 너무 갑작스럽고….
아, 도현은 순간적으로 탄성을 뱉을 뻔했다. 이내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물론 들켰다간 상대가 화낼 테니 입을 열기 전에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유명해져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된다는 거지?”
- …말하자면 그, 그런가? 아, 물론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걸 수도 있는데, 그렇잖아. 갑자기 너무 유명해지거나 돈벼락 맞으면 오히려 불행해지는 사람도…. 하?
너, 지금 웃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음산한 목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고 바들바들 떨던 도현은 결국 웃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 야! 너, 너…! 내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제 딴엔 심각했는데 웃음이 돌아오자 니콜라스는 귀까지 새빨개져 버렸다. 이게 영상통화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하하!”
- 너…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흐하, 설마. 그럴 리가.”
도현은 너무 웃어서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아냈다. 그의 뺨은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발갛게 물든 상태였다.
후, 하아. 숨을 고른 도현이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안해. 그냥….”
- 뭐.
퉁명스러운 반응에 도현은 한 번 더 잘게 떨었다.
“그냥, 나한테는 그런 걱정 안 하잖아.”
- 경우가 다르잖아. 넌 처음부터 그랬고….
“다를 거 없어.”
도현은 단호히 말했다. 난 심지어 그때 여덟 살이었는걸. 조곤조곤 이어진 말에 니콜라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그랬으니까.
“니키, 누구나 처음은 있어.”
- 젠장. 나도 알아. 바보 같은 건 알지만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너는 걱정 안 돼?
“그다지….”
미적지근한 반응에 니콜라스는 도리어 당황해했다. 도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니키, 벌써 잊었어? DJ-N 조에서 누가 제일 똑똑한지.”
단순 암기력이나 두뇌 회전을 따지자면 도현을 따라올 자가 극히 드물다. 도현이 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진은 그것과 다른 똑똑함을 지녔다.
“난 걱정하지 않아.”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 …정말 할 말 없게 하네.
인정의 말이었다. 그에 짧게 웃은 도현이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주말에 무슨 영화를 본 거야? 비긴어게인?”
- 야!
“아하하!”
상쾌한 웃음소리에 지나가던 직장인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어떤 미친놈이 개쓰레기 같은 월요일 아침에 웃는….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지?
소년의 검은 머리칼이 시야를 간지럽히며 지나치고 나서야, 직장인의 머리에 한 이름이 강타했다.
“…이도현!”
허억,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이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멀어진 소년은 유유히 걸어갈 뿐이었다.
키득거리며 교실에 들어선 도현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아, 교실 다 왔다.”
- 이제 끊는다.
“왜. 바빠?”
아쉬움이 묻어나는 질문에 니콜라스가 단호히 말했다.
- 곧 훈련 시간이야.
이건 어쩔 수 없지. 도현은 아쉬움을 고이 접은 채 니콜라스를 보내주었다. 전화를 끊자 곧이어 익숙한 정적이 찾아왔다.
드르륵! 창문을 열어 교실을 환기한 도현은 교무실에 열쇠를 갖다 놓고 시간이 남자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였다.
이어폰 너머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이후로 틈날 때면 듣곤 하는 밴드 음악이었다. 도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노래를 크게 틀고 있으면, 꼭 그 아지트에 있는 거 같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과 과자를 집어 먹는 소리,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와 가끔 지직거리던 전등,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그러한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 너는 걱정 안 돼?
“흐음.”
솔직히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 애들이 인기가 많건 아니건 도현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서. 많다고 더 좋아지는 것도, 적다고 덜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주변에 유명인이 많은 탓일 수도 있겠지.
뭐. 어디까지나 도현의 입장이고, 니콜라스의 시선으로 보면 당황스러울 것도 같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붙어 다니던 소꿉친구가 갑자기 유명해지는 거니….
…그래도 역시 걱정은 안 되네.
진의 현명함을 무턱대고 믿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진이 열셋의 소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도현이 믿는 건 진과 진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밀턴, 로테와 함께 있는 진이라면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웃은 도현은 문자를 작성했다.
[밴드부는 어때?]
* * *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야!”
대표실에 앉아 있던 정한결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형에 과장되게 반겼다. 양팔을 펼치는 모양새에 도현의 표정이 떫어졌다. 설마 안기라는 건 아니겠지.
“미국에서 잘 못 먹었나?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망부석처럼 선 도현에게 알아서 다가온 정한결 대표는 어깨를 잡고 여기저기 돌려보았다. 그에 이 실장이 정색했다.
“명절에 시골집 방문한 손주를 반기는 할머니같이 굴지 마시죠. 배우님 불편해하잖아요.”
“뭔 소리야.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그렇지, 도현 씨?”
“하하….”
도현은 말없이 웃었다. 정한결은 프로답게 도현이 동의하지 않았단 사실을 흘려 넘겼다. 하하! 호탕하게 웃은 그가 도현을 소파로 이끌었다.
“자, 일단 앉아요. 오랜만에 왔는데 세워둘 수는 없지. 도현 씨 온다고 해서 특별히 간식도 맛있는 걸로 사다 뒀어요.”
그 말대로 테이블 위를 차지한 건 비싼 제과점의 디저트였다. 도현이 소파에 앉자 경찬호도 자연스레 그 옆자리에 앉았다.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왔어요?”
정한결은 한동안 시시한 잡담을 꺼내며 이것저것 물었다. 도현은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이러다 도현이 미국에서 먹었던 삼시세끼 모두 다 알 기세라 이 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늘그막에 손주 본 할머니처럼 굴지 마시라니까요. 무슨 걱정이 그리 많습니까?”
“걱정이라니? 우리 도현 씨 알아서 잘하는 거야 알지. 미국에 갔다 오는 줄 알았더니 스포티파이 차트에 들고 돌아오는 사람인데.”
“푸읍!”
커피를 마시다 뿜은 경찬호가 몰린 시선에 큼, 헛기침했다. 시선이 다시금 흩어졌다.
“남다르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도현 씨쯤 되면 친구랑 놀다가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도 올라가고 그런가 봐요.”
감탄조의 말이었지만 그 눈빛은 참 복잡미묘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휴가 가고 싶다길래 해외에 보내 놨더니 밴드로 데뷔하고 올 줄….
심지어 그게 가수도 아니고 배우일 줄은….
아련해지는 눈빛에 도현이 재빨리 말했다.
“허락은 받았어요.”
말하고 보니 사고 쳐놓고 변명하는 아이 같아서 머쓱해진 도현이 눈동자를 굴렸다. 허허, 사람 좋게 웃은 정한결이 도현의 어조를 따라하듯 답했다.
“그건 저도 경 팀장에게 들었어요.”
“큼, 크흠.”
경찬호는 몇 번째일지 모를 헛기침을 하며 대표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걸 누가 예상합니까. 그는 조금 억울했다.
“…그리고 스포티파이에 들었다지만, 금방 사라졌잖아요?”
도현의 반문에 정한결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의 말대로, 유튜브 조회 수가 뻥튀기되던 어느 날 스포티파이 글로벌 차트 끝자락에 고개를 내민 Thirteenth는 일주일 만에 다른 곡들에 휩쓸려 사라졌다.
도현의 인지도로 기반을 다지고 새디 로스의 티톡 영상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애초에 티톡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유행이 생겨나는 곳이었다. 반짝 타오르던 불은 곧 다른 유행으로 옮겨가 금방 식었다.
물론 꾸준히 듣는 사람도 있는 듯했고, 유튜브 조회 수는 전처럼 폭발적이진 않아도 계속 느는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또다시 변수가 생기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내 배우를 밴드로 데뷔시킬지 고민하진 않아도 되니 다행인 건가? 근데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걱정하시는 부분은 알겠지만, 전 임시 멤버고 객원 연주자였어요.”
밴드 멤버들은 정식 멤버라고 주장하지만.
뒷말은 쏙 삼킨 도현의 말에 정한결 대표는 결국 마지못해 수긍했다.
사실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상황이면 상황이었지. 딱 한 가지. 너무 황당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결국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도현이 이후로도 밴드 활동을 하며 수익 창출을 하면 조금 더 진지한 문제로 넘어가지만, 스스로 객원 연주자였다고 주장하니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애가 친구들끼리 놀았다는데 어른이 너무 말을 얹어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수많은 말을 삼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건 우리 측에서 허락한 일이었으니까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한결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그러나.
“하지만 더 얘기할 부분이 있지 않아요?”
“네?”
“바이올린.”
“…….”
“왜 소속사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