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41화 (542/582)

제541화. 가족의 의미 (11)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아티스트의 전반적인 생활을 관리한다. 촬영 일정뿐만 아니라 피부과, 건강검진, 더 사소하게는 운동이나 취미 일정까지도. 인지도 있는 아티스트일수록 그 관리의 영역은 더 세세해진다.

그러니 아티스트에 대한 사전 조사는 당연했다. 도현도 소속사 측에 자신의 정보를 넘겼고, 그중에 바이올린 이야기는 한 톨도 없었다.

도현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정한결은 한숨을 삼켰다. 몰아붙이듯이 꺼내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도현 씨. 회사는 아티스트를 서포트하기 위해 존재해요.”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죠. 다만, 회사는 전적으로 도현 씨 편이에요. 그런데 저희가 도현 씨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면, 돕고 싶어도 그 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는 단순히 바이올린에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한 가지를 숨겼다는 건 다른 것들도 얼마든지 숨길 수 있음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알지 못하면 도울 수 없다고 미리 경고하는 거였다.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연예계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예방할 수 있는 건 뭐든 미리 예방하는 편이 좋았다.

도현은 정한결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서 프로의 얼굴이 된 도현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유념할게요.”

진지한 대답에 정한결은 더 잔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돌아가 싱긋 웃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곧이어 다른 화제를 꺼냈다.

누가 봐도 더 불편해하지 않게 분위기를 푸는 모습에 도현은 오히려 가슴이 무거워졌다.

지금 순간조차도 도현은 그들에게 비밀을 만들고 있었다. H. 음반. 그중 무엇도 말할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으니까.

입을 열 마음은 없지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단히 경고만 하고 넘어간 게 배려란 걸 알기에 더욱이.

도현아, 옆에서 들린 작은 부름에 도현의 고개가 들렸다. 경찬호가 유심한 눈길로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피곤해?

“…아뇨.”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도현은 다시금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대본 몇 개를 뽑아뒀거든요. 도현 씨 오면 짜잔 하고 주려고 회의도 여러 번 거쳤죠.”

도현은 보통 제게 오는 대본을 직접 확인했다. 그 전에 경찬호가 검토하긴 하지만, 작품성을 따지기보다는 아주 기본적인 검토일 뿐이었다.

이번엔 미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직접 검토를 마친 모양이었다. 원래 배우의 손에 도착하는 작품들은 팀 단위의 회의를 거치거나, 대표의 손을 스쳐 지나가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이 당연했다.

도현은 테이블에 올라온 세 개의 대본을 보았다. 정한결은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어느 작가의 대본이고, 또 무슨 내용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 도현은 그 자리에서 대본을 가볍게 훑었다.

“가져가서 고민해 봐요. 괜찮은 걸로만 추렸으니까 뭘 고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 마음대로 해도 돼요.”

“그렇게 할게요.”

도현은 얌전히 대본을 챙기고, 정한결과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후에 그가 챙겨준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들고선 대표실을 나왔다.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걷던 도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 옆을 돌아보았다.

“형.”

“응?”

“다른 대본들 보관하고 있죠?”

“…그럴 줄 알았다.”

다른 일정은 아예 매니저의 손에 맡겨 버렸으면서, 대본에 한해서는 남다른 집착을 보여주는 도현이었다.

그날, 종이가방에 꽉꽉 들어찰 만큼 대본을 뭉텅이로 챙긴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집에 돌아갔다.

* * *

도현은 요새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나 그렇지, 머릿속은 다음 작품 생각으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세 개의 대본은 어째서 뽑은 건지 알 만했다. 일단은 유명 작가들이었고, 소재도 제법 흥미로웠다. 어제 읽은 대본도 꽤 괜찮았는데.

대표가 추천해준 대본을 생각하던 도현은 어느 순간 한 대본을 떠올리고선 멈칫 굳었다. 하지만, 그건….

“-현.”

아니다. 그건 조금 미뤄두자. 남은 대본 먼저 보고.

그러고 보니 매니저 형이 대본 몇 개가 새로 들어왔다고 했지. 언제 소속사에 들러….

“도현아!”

깜빡. 눈앞에 훅 들어온 한설아의 얼굴에 도현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이렇게 가까워.

“내 말 들려?”

“…이렇게 가까이에서 안 들리기도 힘들지 않나?”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아, 너무 깊이 몰두했었나 보다.

“미안. 생각할 게 있어서.”

찬찬히 사과한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반 아이들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선이 모였는데도 모르고 있던 건가. 뒤늦게 민망해진 도현이 그 기색을 숨기려 태연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체육대회 때 나갈 종목 정하고 있었어. 넌 뭐 할 거야?”

그녀의 질문에 칠판에 써진 글씨가 보였다. 축구, 농구, 배구, 피구, 줄다리기 등등….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종목을 정하는 중이었구나.

올해 가연예중의 체육대회는 4월에 열렸다. 그래서 새 학년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는 체육대회로 인해 소란스러워진 상태였다.

종목 아래에 써진 아이들의 이름을 읽던 도현은 계주 아래 적힌 한설아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작년에도 계주였었지. 짧은 생각이 따라왔다.

“난….”

도현은 작년처럼 가장 묻어가는 종목에 나갈 심산이었다. 딱히 체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온 정신이 대본에 쏠려 있는 상태였다.

“그냥 피,”

“농구!”

“…구, 응?”

반짝반짝한 갈색 눈이 와닿았다. 하필이면 눈꼬리가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도현이 옴짝달싹 못 하는 올망한 인상으로.

“농구 나가면 안 돼?”

“…왜?”

“그게.”

희운이 수줍게 볼을 붉혔다.

“전에 우유 광고에서 멋있어서….”

그걸 봤다고?

“농구는 싫어?”

수치심에 하얗게 굳었던 도현은 멈칫했다.

피구와 달리 농구는 진심인 아이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그건 추가적인 연습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현은 그만한 열정이 없었다.

역시 거절해야지.

“알겠어.”

“정말!?”

“응, 농구 나갈게.”

믿음직스럽게 답하는 도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입의 배신이었다.

* * *

탕, 탕.

한쪽에서 드리블을 연습하던 도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아니,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지 않나. 동경 어린 눈으로 보는 동생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는 형이 대체 어디 있는데. 도현은 애써 변명했다.

“이도현 집중! 자세 더 낮추고 팔꿈치는 올리고!”

농구 동아리 소속이라는 이유찬은 엄한 얼굴로 지적했다. 도현은 영혼이 날아간 얼굴로 고분고분히 답했다.

“알았어….”

“조금 더 기합 넣어서 대답해야지! 우리 목표는 전국 제패라고!”

교내 체육대회가 언제부터 전국 대회가 된 건데.

“팔 떨어지고 있다!”

다른 생각을 하자마자 호랑이 같은 지적이 날아들었다. 도현은 말없이 팔을 조금 더 들었다.

* * *

“…너 괜찮아?”

떨떠름한 질문에 도현이 팔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니. 요즘 인생의 장르가 조금 바뀐 거 같아. 무언의 의사 표현에 한설아의 표정이 안타까이 변했다.

“힘들면 바꿔도 돼. 너 운동 별로 안 좋아하잖아.”

“…….”

순간 솔깃했다.

“솔직히 유찬이가 좀 열정이 과하긴 하잖아.”

“…그렇지.”

농구에 지원한 아이들을 모은 그는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달라진 건, 도현이 연습 경기 중 무의식적으로 기의 흐름을 읽고 3점 슛에 성공했을 때였다.

그 탐욕스러운 눈빛이란. 다시금 떠올린 도현의 어깨가 조금 바르르 떨렸다.

“희운이도 뭐라고 안 할걸.”

“그야 그러겠지.”

어디 정희운이 불만을 표할 인사인가? 아쉬운 눈빛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써 웃으면 몰라도….

파직. 도현은 무언가, 자존심에 거대한 스크래치가 나는 걸 느꼈다. 동시에 얼굴을 감싸 안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형….

“그럼 내가 명단 가져와서….”

“아니.”

팔에 얼굴을 묻었던 도현이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부스스해진 앞머리를 한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야 해.”

도현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속, 있는지도 몰랐던 형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도현은 형이 그토록 동생 앞에서 멋있는 척하는 거에 집착하는 줄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푸슬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웃는 도현에 한설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힘들어서 정신이 나간 건가?

“그리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왜?”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있거든.”

“…나쁜 거 아니야?”

“아냐.”

공놀이에 재미를 붙여본 적은 없는데, 물론 지금도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는 일정한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차츰 정리되어 갔다.

그때, 도현의 귀에 변성기 특유의 목소리가 꽂혔다.

“여기 있었네!”

흠칫, 도현의 어깨가 떨렸다. 도현은 잘게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체육복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내가 점심시간에도 모이는 걸 깜빡하고 말 안 해줬더라고! 그래서 데리러 왔어!”

“…정말 아니야?”

한설아의 물음에 이유찬이 물음표를 띄웠다.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던 도현은 결국 인내심이 닳은 이유찬에게 질질 끌려갔다.

“자! 가자! 오늘은 레이업 슛을 연습하는 거야!”

“…알았으니까 놔 줘. 알아서 걸을 수 있어.”

간신히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도현이 발을 내디뎠다. 이러나저러나. 한번 하기로 한 일을 무르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양손 열 번씩 성공할 때까지 해보자. 아, 물론 연속으로 성공해야 해.”

하지만 취향이 중요할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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